어둠은 가장 오래된 은신처이자, 가장 잔인한 심판관이었다. 눅눅한 흙냄새와 희미하게 타는 등잔불 기름 냄새가 뒤섞인 지하 동굴에 긴장감이 낮게 깔렸다. 스무 명 남짓한 이들이 숨죽인 채 테이블을 둘러싸고 있었다. 중앙에는 찢어진 천 조각을 이어 붙인 허름한 지도가 놓여 있었다. 그 위로 류진의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움직였다.
“제국의 제7군 보급 부대는 정확히 내일 밤 자정, 이곳을 통과할 겁니다.”
류진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그의 손가락이 지도 위 한 지점을 가리켰다. 협곡 어귀에 희미하게 그려진 좁은 길목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가온’이 무거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가온은 이 반란군의 실질적인 지도자였다. 깊게 패인 미간과 날카로운 눈매는 수많은 전투와 패배를 겪어온 자의 흔적이었다.
“자정? 제국 보급선이 그렇게 늦게 움직일 리가. 그들은 보통 해가 지기 전에 모든 경로를 확인한다.” 가온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섞여 있었다. 너무나 오랜 시간, 제국은 예상 가능한 움직임을 보여왔다. 그들의 패턴은 피할 수 없는 철칙과 같았다.
류진은 고개를 들었다. 등잔불의 희미한 빛이 그의 지친 얼굴을 비췄다. 그는 이 ‘미래’에서 온 이방인이었고, 그의 말은 언제나 양날의 검이었다. 신뢰를 주기도, 동시에 더 깊은 의심을 심어주기도 했다.
“원래는 그렇습니다.” 류진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 주는 달라요. 제국 내부에 새로운 권력 다툼이 시작되었고, 고위 귀족 간의 은밀한 암투가 몇 주 전부터 벌어졌습니다. 덕분에 보급선 책임자가 교체되었고, 그는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무리한 야간 수송을 감행할 겁니다. 경로 역시 기존과 달리, 이 협곡을 택할 수밖에 없어요. 최단거리이자, 보안이 취약한 곳으로 보이거든요. 물론 착각이지만.”
모두의 시선이 류진에게 집중됐다. 그의 말은 황당하리만큼 구체적이었다. 누가 감히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을, 그것도 고위 귀족의 암투를 이렇게 상세히 알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몇 주 전부터’라는 과거형으로.
가온 옆에 앉아 있던 ‘세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날렵한 몸놀림과 비상한 기억력을 가진 반란군의 정찰대장이었다. “협곡이라… 우리 정찰병 보고에 따르면, 그곳은 제국의 감시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매복하기에도 지형이 썩 좋지 않아요. 너무 개방적이고, 만약 역습을 당하면 퇴로도 마땅치 않습니다.”
“그들이 매복을 전혀 예상하지 못할 테니까요.” 류진이 세라의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제국은 평민들의 반란을 언제나 우습게 여겨왔습니다. 우리는 그저 몽둥이와 돌멩이를 들고 덤비는 미물로 보일 뿐이죠. 그들은 설마 우리가 이런 ‘정교한’ 계획을 세울 거라곤 상상조차 못 할 겁니다.”
정교한 계획. 류진의 입에서 나온 그 말에 가온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들이 지금껏 세웠던 계획이란, 그저 굶주린 이들의 비루한 절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류진이 나타난 이후,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그의 ‘미래 지식’은 가끔은 이해할 수 없고 때로는 비현실적이었지만, 놀랍게도 번번이 제국의 허를 찔렀다. 지난번 국경 수비대 습격 역시 그의 예언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확실한가?” 가온이 다시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여전히 의심과 함께, 한 줄기 희망이 스며들어 있었다. 이번 공격은 단순한 보급선 습격이 아니었다. 제국 수도로 향하는 최전선 보급로를 끊고, 그들의 사기를 꺾는 동시에 반란군의 존재감을 알리는 첫 번째 대규모 작전이었다. 성공하면 수많은 굶주린 백성에게 희망을 줄 수 있었고, 실패하면, 그들의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류진은 잠시 침묵했다. 그에게 ‘확실’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잔인한 무게를 지닌 것이었다. 그의 기억 속 미래는 이미 과거가 되어버렸고, 아주 작은 나비의 날갯짓 하나에도 거대한 폭풍처럼 변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이곳에 있었다. 이들의 눈빛 속에 담긴 처절한 희망을 외면할 수 없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말씀드립니다.” 류진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성공하면, 우리는 열흘 치의 식량과 겨울을 날 군수 물자를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국에게 경고를 보낼 수 있을 겁니다. 더 이상 그들의 세상이 아니라고.”
가온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는 류진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지독한 피로감과 알 수 없는 비장함이 뒤섞여 있었다. 가온은 이 젊은이가 대체 어떤 과거를 겪었고, 어떤 무게를 짊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단지 그가 가져오는 정보가 너무나도 절실하다는 것만을 알 뿐이었다.
“좋다.” 가온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동굴 안에 낮게 울려 퍼졌다. “세라, 자네 부대는 협곡 입구에서 제국의 선발대를 막아. 류진의 말대로라면 야간 수송이니 분명 경계를 늦출 거다. 기습으로 혼란을 가중시키고, 뒤따라오는 보급 수레를 노려야 해.”
“알겠습니다!” 세라가 짧게 답했다. 그녀의 눈빛은 이미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머지는 나와 함께 협곡 안쪽에 매복한다. 보급 수레가 충분히 들어섰을 때, 양쪽에서 동시에 공격한다. 무엇보다, 무기와 식량을 최우선으로 확보한다. 제국 병사들과의 교전은 최소화해. 우리는 싸우는 자들이 아니다. 빼앗고, 달아나야 한다.”
가온의 지시가 떨어지자, 지하 동굴 안에 있던 모두의 얼굴에 결의가 떠올랐다. 낡은 창과 활, 심지어는 농기구를 개조한 무기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그때였다. 밖에서 급하게 뛰어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문이 거칠게 열리며 거친 숨을 내쉬는 정찰병 하나가 뛰어들어왔다.
“대장님! 큰일입니다! 서쪽 길목에… 제국 수색대가 나타났습니다! 평소보다 두 배는 많은 숫자입니다! 흑랑 기사단의 깃발도 보였습니다!”
동굴 안의 모든 시선이 순식간에 정찰병에게, 그리고 다시 류진에게로 향했다. 흑랑 기사단. 제국 황제의 직속 부대이자, 가장 잔혹하고 악랄한 진압 부대였다. 그들이 이 외진 곳에 나타났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뜻이었다.
가온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의 눈빛은 류진에게 ‘이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있었다. 류진 역시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흑랑 기사단이라니. 그의 기억 속 ‘미래’에는 없는 변수였다.
“흑랑 기사단…?” 류진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의 기억은 완벽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주 작은 변화가 거대한 결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제국 내 권력 다툼은 분명 있었으나, 그로 인해 흑랑 기사단이 움직인다는 정보는 없었다.
“류진!” 가온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자네의 ‘미래’는 이 상황을 설명할 수 있나?”
류진은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정보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흑랑 기사단이 움직인다는 것은 단순한 수색이 아닐 터. 그들은 분명 어떤 ‘목표’를 가지고 이동하고 있을 것이다. 협곡 보급선 습격이 아니라, 그들만의 다른 임무가 있을 수도…
아니, 잠시. 보급선 책임자의 교체. 무리한 야간 수송. 그리고 흑랑 기사단. 만약…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함정이라면?
류진은 번개처럼 눈을 떴다. “아닙니다! 이건… 함정입니다! 보급선은 미끼고, 흑랑 기사단은 우리를 잡기 위한 포위망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이곳에 집결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동굴 안은 순식간에 경악과 혼란으로 가득 찼다. 함정이라니? 그들은 지금껏 류진의 정보를 믿고 모든 것을 걸 준비를 해왔는데?
“무슨 소리냐! 자네가 모든 것을 걸고 말하지 않았나!” 한 병사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
가온은 그를 제지하며 류진을 응시했다. “확실한가, 류진? 또다시 말하지만, 우리의 모든 것이 걸려 있다.”
류진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식어 있었다. “그렇습니다. 제국의 새로운 책임자는 자신의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단순히 야간 수송을 감행한 게 아니라, 반란군을 일망타진할 기회로 삼으려 한 겁니다. 보급선은 미끼이고, 흑랑 기사단은 우리를 잡기 위한 그림자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보급선이 아니라, 우리를 이 협곡으로 유인해 전멸시키는 것입니다!”
모두의 얼굴에 절망과 공포가 드리웠다. 그들은 지금 막 죽음의 문턱을 향해 나아가려던 참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세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대로 후퇴해야 합니까?”
류진은 지도를 다시 짚었다. 그의 손가락이 흑랑 기사단이 나타났다는 서쪽 길목과 협곡, 그리고 반란군의 현재 위치를 빠르게 오갔다. 함정이라면, 이대로 물러서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하지만 돌파구는 어디에…
그때, 류진의 눈에 지도의 한 부분이 들어왔다. 협곡 어귀에서 북쪽으로 뻗어 있는, 버려진 듯한 작은 오솔길. 제국군조차 거의 신경 쓰지 않는,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었다.
“아니요.” 류진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혼란에 빠져 있던 모두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향했다. “후퇴가 아닙니다. 이대로 돌격해야 합니다. 다만…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가온의 눈빛이 다시 한 번 깊어졌다. “방향을 바꾼다고?”
“그들은 우리가 이 협곡으로 들어설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보급선을 미끼로 삼았으니, 우리의 시선은 오직 그곳에 쏠려 있을 거라 생각할 겁니다. 흑랑 기사단은 우리의 퇴로를 막고, 협곡 안에서 우리를 포위할 준비를 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예상치 못한 곳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류진은 지도의 오솔길을 가리켰다. “이곳으로 움직입니다. 흑랑 기사단이 포위망을 완성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의 예상 경로를 벗어나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급선을 노릴 거라 생각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을 노려야 합니다!”
“다른 것?” 세라가 물었다.
“흑랑 기사단의 보급 마차입니다.” 류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잡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필시 후방에 자신들의 보급 마차를 두고 왔을 겁니다. 그들의 보급로는 텅 비어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들의 배후를 치는 겁니다!”
모두의 얼굴에 다시 한 번 혼란이 스쳐 지나갔다. 적의 함정에 걸릴 뻔한 상황에서, 오히려 적의 배후를 노리라니. 이것은 무모한 것인가, 아니면 천재적인 발상인가?
가온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류진의 말대로라면, 흑랑 기사단은 반란군을 ‘협곡 안’에 가둘 생각이었다. 그들의 보급로는 그들의 예상대로 비어있을 확률이 높았다. 무엇보다, 이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물러서는 것은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었다.
“좋다.” 가온이 다시 결정을 내렸다. 그의 목소리는 이제 흔들림이 없었다. “류진, 자네의 ‘미래’에 다시 한번 모든 것을 걸겠다. 세라! 모든 부대는 흑랑 기사단의 배후를 친다! 우리의 목표는 식량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대장님!” 반란군 병사들의 눈에서 다시금 불꽃이 타올랐다. 절망은 순식간에 결의로 바뀌었다.
어둠 속, 지하 동굴의 공기는 이전보다 더욱 차갑고 팽팽해졌다. 류진은 모두의 결의에 찬 눈빛을 보았다. 그의 어깨 위에 이 모든 것의 무게가 얹혀 있었다. 그는 정말로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아니, 그는 과연 이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모두, 움직인다!” 가온의 외침과 함께, 반란군의 그림자들이 동굴 밖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류진은 마지막으로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낡은 종이 위, 그가 가리킨 오솔길이 마치 그들의 운명을 결정할 유일한 실마리처럼 섬뜩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울렸다. 피할 수 없는 싸움. 피할 수 없는 운명.
이 모든 것이 과연 미래를 바꿀 수 있을까?
그는 그 답을, 오늘 밤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속에서 찾아야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