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각(白蓮閣)이 뿜어내는 흰 빛이 한여름의 태양 아래서도 눈부셨다. 구름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한 거대한 누각은 마치 하늘과 땅을 잇는 교두보처럼 보였다. 그 아래 수많은 무림인들이 숨을 죽인 채, 거대한 비무대를 응시하고 있었다. 비무대는 신성한 기운을 품은 검은 현무암으로 만들어져, 모든 발걸음과 검기가 그 위에서 생생하게 울렸다.
“천하운명결정대회(天下運命決定大會).”
현우는 낮게 읊조렸다. 그의 손아귀에 들린 검집은 땀으로 살짝 미끄러웠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단순히 무를 겨루는 것이 아니었다. 수백 년에 한 번 도래하는 거대한 위협에 맞서, 천하의 운명을 결정할 단 한 명의 무인을 뽑는 자리. 동시에 현우에게는,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음모의 실체를 파헤칠 마지막 기회이기도 했다.
장내가 술렁였다. 이제 막 한 경기가 끝나고, 다음 대진이 발표될 참이었다. 쩌렁쩌렁한 기합 소리와 함께 승자가 비무대에서 내려오자, 여기저기서 환호와 탄식이 교차했다. 현우는 그 소란 속에서 시선을 비무대 한쪽에 고정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는 오직 의심만이 가득했다.
“다음 대진!”
우렁찬 목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무림맹의 원로이자 이번 대회의 심판장을 맡은 백호문의 문주, 백천산이었다. 그의 옆에 선 젊은 무인이 두루마리를 펼치고 힘껏 외쳤다.
“청해문의 벽력검(霹靂劍), 사문량!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조금은 의외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무명 문파, 이명(李明)!”
장내가 술렁였다. 사문량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는 고수였다. 청해문의 비기인 ‘벽력검법’을 익혀, 검 한 번 휘두르면 벼락이 치는 듯한 위력을 낸다고 정평이 난 인물. 그에 반해 이명이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무명 문파라니, 듣도 보도 못한 신예가 어찌 여기까지 올라왔을까. 대부분 사문량의 낙승을 예상하는 분위기였다.
“흥, 사문량 상대로 무명 문파라니. 운도 없지.”
“겨우 몇 합 버티면 다행일 게야.”
현우는 그런 수군거림을 들으며 묵묵히 서 있었다. 그 또한 사문량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 석연치 않은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이 대회에 참가한 모든 고수들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고 있다는 것을 그는 며칠 전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조작하는 듯한 기분.
사문량이 묵직한 발걸음으로 비무대에 올랐다. 그의 허리에는 늘 그의 신체 일부와 같다고 평가받는 벽력검이 꽂혀 있었다. 수려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날카로운 검날 같았다. 그에 맞서는 이명은 왜소한 체격에 평범한 인상이었다. 약간은 불안해 보이는 눈빛이었지만, 비무대에 오르는 그의 발걸음은 의외로 흔들림이 없었다.
“시작!”
백천산의 외침과 동시에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검례를 올렸다. 곧이어 정적이 비무대를 감쌌다. 먼저 움직인 것은 사문량이었다. ‘휘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벽력검이 섬광처럼 이명을 향해 쇄도했다. 검 한 자루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장내를 얼어붙게 할 정도로 매서웠다.
이명은 겨우 검을 들어 막아냈으나, 그 충격에 손목이 뒤틀리는 듯 보였다. 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대로였다. 사문량의 검은 첫 일격부터 이명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명은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뒤로 물러섰지만, 사문량은 물고 늘어지는 맹수처럼 끈질기게 추격했다. 검의 궤적은 거침없었고, 벼락 같은 기세는 비무대 전체를 뒤흔들었다.
“크아악!”
일격에 이명의 방어 자세가 무너졌다. 그의 검이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질 뻔했다. 사문량은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이제 승부가 나는가 싶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사문량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의 벽력검이 허공에서 멈칫하는 순간, 현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방금, 뭐지?’
사문량의 발걸음이 휘청였다. 그의 날카롭던 눈빛이 순간적으로 흐려지는 것을 현우는 놓치지 않았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아니면 어떤 충격으로 정신을 놓친 사람처럼.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던 기세가 급격히 약해졌다.
“기회다!”
이명이 갑자기 소리쳤다. 그의 눈빛은 아까와는 확연히 달랐다. 불안과 두려움 대신, 섬뜩하리만큼 차가운 광기가 서려 있었다. 이명은 망설임 없이 바닥에 떨어진 자신의 검을 주워 들고는, 휘청거리는 사문량을 향해 무섭게 돌진했다. 그의 움직임은 아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다.
“저게 무슨 일인가?”
“사문량 고수가 왜 저러지?”
장내의 모든 이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벽력검 사문량이 갑자기 허물어지다니.
“벽력섬광!”
사문량은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하려는 듯, 필사의 외침과 함께 자신의 비기를 펼쳤다. 허공을 가르는 검기가 다시 한번 터져 나왔지만, 그 위력은 평소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무엇보다, 검의 궤적이 엉망이었다. 마치 생전 처음 검을 잡은 사람처럼, 그의 검은 어딘가 어색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저건 벽력검법이 아니야.’
현우는 확신했다. 저것은 사문량의 검이 아니었다. 분명 그의 동작은 벽력검법의 기본 자세를 흉내 내고 있었지만, 그 안에 담긴 내공과 검리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마치 껍데기만 남은 듯한 기묘한 움직임.
“크윽!”
사문량의 검은 이명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갔다. 치명적인 일격이 될 수 있었던 기회가 허공으로 사라졌다. 이명은 냉소를 흘리며 그 틈을 파고들었다. 그의 검이 사문량의 옆구리를 꿰뚫는 듯 맹렬하게 파고들었다.
“커헉!”
사문량의 입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비무대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쿵!’
거대한 고수 한 명이 비무대 아래로 추락하는 소리가 메아리쳤다. 장내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였다.
이명은 싸늘한 표정으로 사문량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미묘한 웃음이 걸려 있었다. 승자의 여유라기보다는,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교활한 미소였다.
“승자! 이명!”
백천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장내는 여전히 침묵에 잠겨 있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과였다. 아니, 예상치 못한 수준을 넘어선, 납득할 수 없는 패배였다. 사문량의 실력은 적어도 이명보다 한 수 위가 분명했다.
현우는 사문량이 떨어진 곳을 응시했다. 그는 그곳으로 달려가려는 주변 무림인들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사문량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잿빛으로 변해 있었고, 입가에는 마른 피가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왼손은, 마치 무언가를 쥐고 있다가 놓친 듯, 느슨하게 펴져 있었다.
현우의 시선이 이명에게로 향했다. 이명은 승리에 취한 듯 검을 거두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섬뜩하리만치 차가웠다. 마치, 승리 그 자체보다도, 어떤 임무를 완수했다는 듯한 만족감이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이건 단순히 실력 차이가 아니야. 무엇인가가 있다.’
현우는 직감했다. 무림인에게 있어 생명과도 같은 ‘기’가 한순간에 흐트러지는 기이한 현상. 그리고 그 틈을 노린 이명의 냉혹한 공격. 이 모든 것이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완벽한 짜 맞춤이었다.
현우는 조용히 자신의 검자루를 매만졌다. 천하의 운명을 건 무술 대회가 아니라, 천하의 운명을 농락하려는 음모의 무대였다. 사문량의 패배는 시작에 불과했다. 현우는 이 대회에 참가한 모든 고수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조종당하고 있음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제 그는 단순한 참가자가 아니었다. 진실을 파헤쳐야 할 유일한 탐정이었다. 이 감춰진 어둠 속에서, 그는 반드시 그 실체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의 운명은 영원히 어둠 속에 잠기고 말리라.
대회가 고조될수록, 비극은 더욱 깊어질 터였다. 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