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잿빛 심장의 고동**
메마른 강철 바람이 뼈까지 파고들었다. 카인은 낡은 가죽 고글 너머로 회색빛 하늘을 응시했다. 해는 언제나 그랬듯 두꺼운 매연 구름 뒤에 숨어 희미한 존재감만을 드러낼 뿐이었다. 잿더미와 녹슨 잔해 사이로 삐죽이 솟아오른 거대한 구조물들은 한때 이 세계의 심장이었던 기계 도시의 폐허였다. 모든 것이 숨을 멈춘 듯 고요했으나, 그 고요함 속에는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파괴의 예감과 살아남은 것들의 끈질긴 비명이 뒤섞여 있었다.
“젠장, 또 헛걸음인가.”
카인은 낮게 중얼거리며 닳아빠진 부츠를 끌었다. 그의 어깨엔 각종 공구와 망가진 부품들로 가득 찬 캔버스 가방이 얹혀 있었다. 낡고 칙칙한 갈색 트렌치코트는 주변의 황량한 풍경과 완벽하게 어우러져 그를 움직이는 그림자처럼 보이게 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은 ‘압력 조절 밸브’. 그것만 있으면 그의 은신처에 있는 증기 여과기가 다시 작동할 수 있었다. 깨끗한 물 한 모금이라도 마시려면 반드시 필요한 부품이었다.
그가 발을 디딘 곳은 한때 거대한 비공정이 정박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계류장이었다. 녹슨 황동 기둥들은 거인의 뼈대처럼 앙상하게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부서진 톱니바퀴들은 지면에 박혀 거대한 꽃잎처럼 굳어 있었다. 곳곳에서 희미하게 증기가 새어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이 죽은 도시가 여전히, 아주 느리게나마 숨을 쉬고 있음을 알리는 유일한 신호였다.
카인은 망가진 자동 인형의 잔해를 발로 툭 차며 지나갔다. 뼈대만 남은 인형의 눈동자 자리에는 이미 먼지와 녹이 가득했다. 한때 사람들을 위해 움직였을 강철 인형의 최후였다. 이 도시가 무너진 지 수십 년, 이제는 그들의 주인인 인간보다 더 흔한 존재가 되어 버린 고철덩어리일 뿐이었다.
시선을 들어 올리자, 멀리서 거대한 증기 기관차의 잔해가 보였다. 하늘을 뚫을 듯 치솟았던 연통은 옆으로 쓰러져 구불구불한 뱀처럼 지면을 기고 있었고, 강철 외벽은 부식되어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저 안에 압력 조절 밸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카인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쓰러진 기차는 과거의 영광을 웅변하는 듯 거대했지만, 동시에 현재의 비참함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칙- 칙-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증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거대한 파이프 뒤에 숨었다. 그의 손은 허리춤의 나이프 손잡이를 쥐었다. 그 소리는 일반적인 증기 누출음이 아니었다. 무언가 움직이는 소리였다.
이 황무지에서 소리가 난다는 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했다.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다른 인간이거나, 혹은 인간보다 더 위험한 기계 짐승이거나.
카인은 천천히 고개를 내밀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낡고 거대한 증기식 청소용 자동 인형이었다. ‘청소부’라고 불리던 이 인형들은 도시가 살아있던 시절, 거리의 먼지를 빨아들이고 쓰레기를 처리하던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는 제어 불능의 광기가 깃든 고철 덩어리에 불과했다. 증기 압력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솔은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이 돌고 있었고, 삐걱거리는 몸체는 마치 굶주린 짐승처럼 주변의 잔해들을 흡입하고 있었다. 놈의 몸체 곳곳에는 날카로운 강철 조각들이 박혀 있어, 본래의 용도와는 거리가 먼 흉측한 무기처럼 보였다.
카인이 숨어있는 파이프에서 불과 십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청소부’는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아마도 잔해 더미 속에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작동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놈의 회전 솔이 굉음을 내며 지면의 부서진 파편들을 빨아들였다. 그 안에 카인이 찾는 압력 조절 밸브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저 기계가 내는 소음은 멀리서 다른 위험한 존재들을 끌어들일 수도 있었다.
“빌어먹을.”
카인은 재빠르게 상황을 판단했다. ‘청소부’를 상대하는 건 연료 낭비이자 시간 낭비였다. 게다가 저 덩치에 압력 조절 밸브를 찾을 만큼의 가치가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그는 조용히 몸을 돌려 쓰러진 기차 쪽으로 향했다. 기차가 훨씬 안전한 선택이었다.
조심스럽게 기차 잔해에 다가가자, 그 거대한 몸체는 마치 거대한 고래의 유골처럼 느껴졌다. 뻥 뚫린 창문 사이로 희미한 빛이 들어왔고, 그 빛은 내부의 켜켜이 쌓인 먼지를 비췄다. 카인은 낡은 랜턴을 꺼내어 불을 밝혔다. 황동과 강철로 이루어진 기차 내부는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곳곳이 주저앉아 있었다. 한때 사람들이 앉아 세상을 여행했을 의자들은 이미 찢어지고 곰팡이 슬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다.
“이런 곳에 박혀 있을 리가…”
카인은 중얼거리며 기관실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운 좋게도 기관실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좁은 틈새로 몸을 구겨 넣자, 고철 냄새와 함께 기름때 찌든 공기가 확 끼쳐왔다. 복잡한 계기판과 레버들이 뒤엉켜 있었고, 그 중심에는 거대한 증기 보일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보일러의 파이프를 따라 시선을 옮기던 카인의 눈에 번뜩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녹슬었지만, 아직 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압력 조절 밸브!
카인은 심장이 쿵, 하고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며칠을 헤맨 보람이 있었다. 그는 재빨리 공구 가방에서 렌치를 꺼내 들었다. 밸브는 강철 파이프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조심스럽게, 그리고 신속하게 볼트를 풀기 시작했다. 볼트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풀리자, 오래된 기름과 쇳물이 뒤섞인 악취가 피어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콰아앙!
기차 외부에서 거대한 충격음이 들렸다. 기차 잔해가 흔들리더니 천장에서 녹슨 철 조각들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카인은 본능적으로 머리를 감쌌다.
“망할, 저 청소부 자식인가?”
아까 그 청소부가 여기까지 쫓아온 것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기차를 건드린 것일까? 바깥에서 들려오는 굉음과 둔탁한 마찰음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카인은 거의 다 풀린 마지막 볼트를 잡아챘다. 땀으로 끈적이는 손으로 렌치를 비틀자, 드디어 밸브가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파이프에서 분리되었다.
카인은 얼른 밸브를 가방에 쑤셔 넣고 기관실 문 쪽으로 향했다. 문틈으로 바깥을 내다보니, 그를 향해 돌진하는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그것은 청소부가 아니었다. 훨씬 크고, 훨씬 흉악했다. 여러 개의 강철 팔이 뒤엉킨 채 무자비하게 지면을 긁으며 달려오는 거대한 짐승형 자동 인형이었다. ‘폐기자’라고 불리는, 무너진 도시의 잔해를 처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가 제어 불능이 되어 모든 것을 파괴하는 살인 기계였다.
놈의 붉게 빛나는 광학 눈이 정확히 카인이 있는 기관실을 향해 있었다.
“젠장, 이런!”
카인은 더 이상 망설일 틈도 없이 몸을 돌려 기관실 반대편으로 뛰어갔다. 낡은 기차의 벽을 뚫고 지나가자, 그는 밖으로 통하는 또 다른 구멍을 발견했다. 폐기자의 굉음이 등 뒤를 덮쳤다. 육중한 강철 발톱이 기차 잔해를 찢어발기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했다. 카인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구멍 밖으로 몸을 던졌다.
찬 바람과 함께 잿빛 하늘이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그의 은신처는 아직 멀었다. 하지만 그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손에 들린 낡은 캔버스 가방 속에는 희망이자 생명줄인 압력 조절 밸브가 들어 있었다.
폐기자의 울부짖음이 멀리서도 들려왔다. 카인의 심장 역시 그 울부짖음에 맞춰 필사적으로 고동쳤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그 고동이 멈추는 날이 바로 그의 마지막 날이 될 터였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달렸다.
그의 눈앞에는 끝없는 잿빛 황야가 펼쳐져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