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언제나처럼 묵직했다. 붕괴된 고층 빌딩의 뼈대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바람이 낡은 철골 구조물을 휘감아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토해냈다. 강진우는 폐허가 된 서점 잔해 속에서 쭈그리고 앉아 먼지 낀 책들을 뒤적였다. 먹을 것, 쓸만한 부품, 하다못해 성냥개비 하나라도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거친 손가락이 찢어진 종이 조각을 스쳤다. 아무것도 없었다. 늘 그랬듯이.
식도 깊숙이 파고드는 갈증과 뱃속을 쥐어짜는 허기보다 더 지독한 건, 잊혀지지 않는 배신의 그림자였다. 턱 선이 날카롭게 깎인 얼굴에는 며칠 밤낮을 새워도 지워지지 않는 피로와 그보다 더 깊게 파인 증오가 뒤섞여 있었다. 등 뒤로 메고 있는 낡은 배낭은 그의 모든 소유물이었다. 녹슨 칼, 반쯤 남은 에너지 바, 그리고 한 번도 쓰지 않은, 하지만 언제나 갈고 닦아온 작은 권총 한 자루.
“젠장.”
진우는 낮게 읊조렸다. 쉰 목소리가 폐허 속에 부딪혀 공허하게 메아리쳤다.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건 이제 일상이 되었지만, 그 일상 속에서도 심장을 꿰뚫는 고통은 단 한 순간도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현수. 그 이름 석 자가 혀끝에 맴돌 때마다 피가 역류하는 듯한 격렬한 감정이 치솟았다.
그때였다. 멀리서 둔탁한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진우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반사적으로 어둠 속에 몸을 숨겼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이내 굉음으로 변했다. 낡은 방탄 트럭 두 대와 개조된 지프차 한 대. 바닥을 지나는 진동이 흙먼지를 일으켰다.
진우는 찢어진 콘크리트 틈새로 눈을 가늘게 떴다. 선두 트럭의 조수석 창문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잘 정리된 머리카락, 여유로운 미소, 그리고 단단해 보이는 방탄복.
이현수.
숨이 턱 막혔다. 심장이 온몸의 피를 머리로 쏟아붓는 것처럼 격렬하게 고동쳤다. 그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는 듯한 섬광이 스쳤다.
현수는 변한 것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좋아 보였다. 잘 먹고, 잘 지내고, 뭔가 이끄는 자의 여유로움마저 느껴졌다. 마치 이 폐허 속에서 자기 혼자만 다른 세상에 사는 것 같았다.
“개자식…….”
진우의 입술 새로 터져 나온 욕설은 뱀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 순간, 눈앞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 * *
“진우야, 믿어줘.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야.”
현수의 목소리는 달콤했고, 눈빛은 진실을 가장하고 있었다. 진우는 이미 허벅지에 박힌 칼날의 고통 때문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현수의 손에 들린 총구만은 똑똑히 보였다. 현수가 방아쇠를 당기기 직전, 그가 마지막으로 들은 말은 비웃음 섞인 현수의 목소리였다.
“너 같은 놈은 여기서 죽는 게 맞아. 쓸모없는 놈.”
절벽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순간, 진우는 현수의 얼굴에 떠오른 역겨운 미소를 봤다. 피와 흙으로 뒤범벅된 시야 속에서, 그는 오직 복수만을 맹세했다.
* * *
눈앞의 현수는 여전히 그 끔찍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트럭은 굉음을 내며 진우가 숨어있는 곳을 지나쳐 사라졌다. 먼지가 가라앉고 시야가 다시 맑아졌지만, 진우의 눈은 여전히 이글거렸다. 손이 저절로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허벅지 안쪽 깊이 새겨진 흉터가 욱신거렸다. 현수가 그를 배신했던 그 자리, 그 칼날이 박혔던 자리였다. 죽음의 문턱에서 기어 올라와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버텨온 지난 세월.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쥐와 바퀴벌레까지 잡아먹어야 했던 날들.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건물 틈새에서 밤을 지새우며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고통. 그 모든 것이 현수, 저 개자식 때문이었다.
“숨어봤자 소용없다.” 진우는 중얼거렸다. “네가 어디에 있든, 내가 찾아갈 거다.”
그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폐허 속에서 먹을 것을 찾는 것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목적은 이제 하나뿐이었다. 현수의 뒤를 쫓는 것. 그리고 놈에게 그가 자신에게 했던 모든 것을,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을 되갚아주는 것.
먼지가 아직 가라앉지 않은 길 위로 진우는 몸을 던졌다. 낡은 트럭의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그는 놈들의 흔적을 쫓기 시작했다. 햇살이 비치는 곳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진우의 심장은 태양보다 뜨겁게 타올랐다.
한참을 쫓아가자 놈들의 차량이 멈춰 선 곳이 보였다. 도시 외곽에 버려진 거대한 공장 단지였다. 낡은 철조망이 둘러쳐져 있었고, 곳곳에 폐차된 차량들이 바리케이드처럼 쌓여 있었다. 경비가 삼엄했다. 입구에는 중무장한 인원들이 서성이고 있었고, 망루 위에서는 총구를 겨눈 그림자가 보였다. 현수가 단순한 생존자를 넘어, 꽤 규모 있는 집단의 리더가 된 모양이었다.
진우는 공장 단지에서 꽤 떨어진 건물 잔해 속에 몸을 숨겼다. 쌍안경도, 망원경도 없었지만, 그의 눈은 매의 눈처럼 예리했다. 움직임을 살피고, 패턴을 읽었다. 놈들이 얼마나 많은지, 어떤 무기를 가졌는지, 취약한 곳은 어디인지.
“꽤 성가시겠군.” 진우는 혼잣말을 했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보다 단단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밤이 깊어지자 공장 단지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현수는 분명 그 안에 있었다. 따뜻한 잠자리와 배부른 식사, 그리고 그의 주변을 지키는 놈들을 거느리고.
진우는 차가운 시멘트 바닥에 엎드린 채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봤다. 별들은 무심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상이 멸망하든 말든, 별들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마치 자신의 복수가 세상의 섭리인 것처럼, 변치 않을 것임을 말해주는 듯했다.
“기다려라, 이현수.”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너에게 남겨줄 건 아무것도 없을 거다. 네가 내게 남긴 것처럼.”
그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복수의 밤은 이제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진우는 차가운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폐허의 그림자 속으로 더욱 깊숙이 숨어들었다. 다음 날 아침, 태양이 떠오를 때쯤, 그 공장 단지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할 터였다. 그리고 그 피는, 이현수, 너의 것이 될 것이다. 반드시.
그는 밤새도록 공장 단지의 약점을 찾았다. 낡은 배수로, 무너진 담벼락, 경비병들의 교대 시간. 모든 것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그의 손은 녹슨 칼자루를 더욱 단단히 쥐었다. 마치 그 칼이 현수의 심장을 꿰뚫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