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챕터 1. 잿빛 황무지의 메아리

메마른 바람이 뼈까지 시리게 불어왔다. 엘라는 낡은 후드 아래로 얼굴을 깊숙이 파묻고, 잿빛 먼지가 휘날리는 발아래를 노려봤다. 폐허가 된 도시, 한때는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을 고층 건물들은 이제 앙상한 뼈대만 남긴 채 괴물처럼 서 있었다.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침묵은 살아있는 모든 것을 짓누르는 듯했다.

“젠장, 오늘도 없잖아.”

낮게 중얼거린 목소리는 이내 바람에 흩어졌다. 손에 쥔 녹슨 철근 조각은 이미 오래전에 날카로움을 잃었지만, 그래도 없으면 불안했다. 허리춤에는 낡은 가죽 주머니가 매달려 있었지만, 그 안은 어제처럼 텅 비어 있었다. 벌써 사흘째였다. 제대로 된 식량은커녕,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있었다.

엘라는 잔해 더미를 헤치며 발걸음을 옮겼다. 한때는 번화했던 상점가였을 곳. 지금은 깨진 유리 파편과 무너진 벽돌만이 가득했다. 돌연, 흙먼지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빨리 달려가 잔해를 걷어냈다. 낡은 금속 상자였다. 혹시 먹을 것이라도 있을까, 잔뜩 기대를 품고 뚜껑을 열었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그때였다. 으스스한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기어올랐다. 엘라는 반사적으로 몸을 숙이며 철근을 고쳐 쥐었다. 척추를 타고 흐르는 소름은 익숙한 공포의 전조였다. 시선은 자연스럽게 어둠이 짙게 깔린 골목 끝으로 향했다.

쉬이이익—!

어둠 속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날카로운 발톱과 뼈대만 남은 몸뚱이. ‘그림자 파편’이었다. 황폐해진 세상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위협적인 존재 중 하나. 녀석은 굶주린 하이에나처럼 낮은 포효를 내뱉으며 엘라를 향해 돌진했다.

“이 망할 자식!”

엘라는 욕설을 내뱉으며 철근을 휘둘렀다. 쾅! 철근이 녀석의 앙상한 몸통에 부딪혔지만, 그림자 파편은 아랑곳 않고 몸을 뒤틀며 덤벼들었다. 빠르게 피했지만, 녀석의 날카로운 발톱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옷 사이로 따끔한 통증이 밀려왔다.

‘젠장, 오늘은 정말 운이 없네.’

엘라는 이를 악물었다. 피할 곳은 없었다. 이대로 싸우거나, 죽거나. 선택지는 명확했다. 녀석이 다시 몸을 웅크리며 뛰어오르는 순간, 엘라는 발밑의 무너진 잔해를 걷어찼다. 깨진 벽돌 조각들이 흩뿌려지며 녀석의 시야를 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엘라는 철근을 녀석의 약점, 즉 척추가 드러난 부분으로 깊숙이 박아 넣었다.

크아아악!

기괴한 비명과 함께 그림자 파편은 허공에서 버둥거리다 바닥에 쓰러졌다. 이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엘라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에 쥔 철근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빌어먹을….”

힘이 빠진 다리로 주저앉았다. 아물지 않는 어깨의 상처보다도, 무력감이 더 크게 다가왔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싸워야만 했다. 먹을 것을 찾고, 위험을 피하고, 또 싸우고.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까?

그때였다. 그림자 파편이 사라진 자리에,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엘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 빛을 응시했다. 무언가 떨어져 있었다. 그림자 파편이 덤벼들기 전, 자신이 발견했던 금속 상자 옆이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살펴보니,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조각이었다. 마치 깎아낸 흑요석 같았지만, 그 표면에는 옅은 푸른색 문양들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고, 그 문양들 사이에서 희미한 빛이 스며 나오고 있었다.

‘이게 뭐지?’

엘라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주워 들었다. 차가운 금속 재질의 감촉. 무언가 오래된 것 같았다. 표면에 새겨진 문양은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 이질적이었다. 엄지손가락으로 문양을 쓸어보니, 옅게 스며 나오던 푸른빛이 갑자기 강렬하게 번쩍였다.

삐빅—!

예상치 못한 소리와 함께 검은 조각이 활성화되었다. 어두웠던 표면이 투명한 푸른빛으로 변하며, 그 안에서 희미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고대 문자들이었다. 엘라는 아는 글자가 단 한 글자도 없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알 수 없는 에너지는 온몸의 털을 곤두서게 만들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았다.

“그건 이 세상 것이 아니야.”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엘라는 화들짝 놀라며 몸을 돌렸다. 어둠 속에서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낡은 가죽 코트를 걸치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과 흉터가 가득했다. 그의 손에는 길고 날카로운 칼이 들려 있었다. 칼날에 희미하게 반사되는 불빛은 서늘한 위협을 담고 있었다.

그는 카엘이었다. 이 폐허를 오가는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한 명. 엘라와는 서로에게 위협이 되지 않을 정도의 거리만 유지하는, 일종의 불문율이 있었다.

“카엘….”

엘라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철근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카엘은 엘라의 손에 들린 검은 조각을 힐끗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망할 것을 여기서 찾았단 말인가? 오래전, ‘대몰락’ 이전에 존재했던 ‘데이터 슬레이트’로군.”

“데이터 슬레이트? 그게 뭔데?”

“세상이 망하기 전에 쓰이던 유물이지. 단순한 장난감이 아냐. 강력한 힘을 품고 있거나, 위험한 정보를 담고 있을 수도 있어. 그 주변엔 항상… 불길한 것들이 꼬이기 마련이지.” 카엘은 잠시 말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의 눈빛에는 오랜 경험에서 오는 냉철함이 서려 있었다. “아까 그 그림자 파편도, 네가 그걸 건드려서 나타났을 거야.”

엘라는 손 안의 데이터 슬레이트를 내려다봤다. 푸른빛이 계속해서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이게 위험한 거라면, 왜 사라지지 않는 거지?”

“어쩌면… 누군가를 부르는 건지도 모르지. 혹은, 네가 이 세상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걸 활성화시킬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고.” 카엘은 한숨을 쉬었다. “보여줘봐. 대체 뭘 보여주는 건지.”

엘라는 망설였다. 그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이 정체불명의 유물을 혼자서 다룰 자신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조심스럽게 데이터 슬레이트를 카엘에게 내밀었다.

카엘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아들고, 표면에 떠오른 고대 문자를 읽으려 애썼다. 그의 표정이 점차 심각해졌다. “흐음… 읽을 수 없는 언어다. 하지만… 이건… 좌표 같군. 그리고… 하나의 단어가 반복해서 나타나.”

“무슨 단어?” 엘라가 다급하게 물었다.

카엘은 미간을 찌푸린 채 그 단어를 힘겹게 발음했다. “음… ‘안식’. 혹은 ‘피난처’… 아니, ‘최후의 안식처’.”

엘라의 눈이 크게 뜨였다. 최후의 안식처라니? 이 황폐한 세상에 그런 곳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데이터 슬레이트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너무나도 생생했다.

“어디에 있다는 거지?” 엘라의 목소리에 희미한 희망이 섞여 있었다.

카엘은 데이터 슬레이트를 이리저리 돌려보며, 갑자기 활성화된 홀로그램 지도를 응시했다. 지도는 복잡한 폐허의 미로를 가리키고 있었고, 그 끝에는 붉은 점 하나가 깜빡였다. “이 지도가 가리키는 곳은… ‘저주받은 협곡’의 끝자락이야. 그곳은… 알려진 모든 생존자들이 피하는 곳이지. 예전부터 ‘그림자 군주’의 영역이라고 불렸어.”

엘라는 데이터 슬레이트에 비친 붉은 점을 바라봤다. 그곳으로 향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만약 정말로 ‘최후의 안식처’가 존재한다면?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을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갈 거야.” 엘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어딘지 모르지만, 난 그곳으로 갈 거야.”

카엘은 엘라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무모하군. 하지만… 어쩌면, 너만이 그걸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는 자신의 칼을 허리춤에 도로 꽂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나도 가겠다. 혼자서는… 거기까지 가지 못할 테니.”

엘라는 카엘을 믿을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홀로그램 지도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은 그녀의 심장을 강하게 두드렸다.

그때, 데이터 슬레이트가 다시 한번 강렬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윙- 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홀로그램 지도의 붉은 점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을 향해 오라고 유혹하는 것처럼. 엘라와 카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알 수 없는 존재가 그들을 부르고 있었다. 과연, 그 부름의 끝에는 희망이 있을까, 아니면 더 깊은 절망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들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