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량한 바람이 뼛속까지 스미는 듯했다. 붉은 흙먼지가 지평선 위를 춤추며, 그마저도 죽은 듯한 회색빛 하늘 아래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카인은 거친 숨을 내쉬며 망토 깃을 단단히 여몄다. 낡고 해진 가죽 망토는 더 이상 이 혹독한 세상의 찬 기운을 완전히 막아주지 못했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 있었지만, 흔들림 없는 시선은 저 멀리, 마치 거인의 뼈대처럼 솟아오른 거대한 석조 구조물을 향해 있었다.
수백 년, 아니 어쩌면 수천 년 동안 세상의 모든 기억에서 지워진 채 잊혔던 이름 없는 폐허. 이제는 ‘망각의 아가리’라 불리는 그곳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무덤이었다. 탐욕스러운 탐험가들은 보물을 찾아 뛰어들었고, 절박한 망명자들은 숨을 곳을 찾아 헤매었지만, 그 누구도 아가리 깊숙한 곳에서 온전히 돌아오지 못했다. 카인 또한 그들 중 하나가 될 운명이었다. 다만, 그의 목적은 보물도, 피난처도 아니었다.
“이 빌어먹을 곳에 다시 발을 들이게 될 줄이야.”
카인은 낮게 읊조렸다. 그의 목소리는 모래바람에 잠식되어 흩어졌다. 손에 들린 묵직한 곡괭이 자루가 땀으로 축축했다. 발걸음은 굳건했지만, 그의 내면은 거친 파도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돌아갈 수 없었다. 반드시 찾아야 할 것이 있었으니까. 그의 손목에는 낡은 가죽 끈에 매달린 작은 뼈 조각이 흔들렸다. 유일한 단서이자, 마지막 희망이었다.
수 시간이 더 흘렀을까. 사막의 해가 서서히 기울어 붉은 노을이 하늘을 태울 무렵, 카인은 마침내 망각의 아가리 입구에 당도했다. 거대한 석벽은 오랜 세월 풍파에 시달려 마치 닳아버린 이빨처럼 위압적으로 솟아 있었다. 입구는 검은 심연으로 향하는 거대한 균열 같았다. 그 균열의 한쪽 구석, 바람을 막아주는 바위 그림자 아래에서 작은 불꽃이 흔들리고 있었다.
카인의 발걸음이 망설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불꽃 옆에는 젊은 여인이 쪼그리고 앉아 낡은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있었다. 그녀의 차림새는 이곳의 거친 환경과는 어울리지 않게 다소 말쑥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드리운 피로와 굳은 의지는 그녀가 단순한 학자가 아님을 짐작하게 했다. 엘라. 그가 겨우 이틀 전, 한 마을의 낡은 여관에서 조우한 유일한 동행자였다.
“늦으셨군요, 카인 씨.”
엘라는 고개를 들어 카인을 바라보았다. 지쳐 보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호롱불처럼 또렷했다. 그녀는 불꽃에 가려져 있던 작은 주머니를 가리켰다. 마른 육포와 물통이 보였다.
“당신답지 않게 준비성이 좋군요. 보통 학자들은 이런 곳에 오면 벌써 징징댈 텐데.”
카인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던 묵직한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자, 둔탁한 소리가 사방의 침묵을 깨뜨렸다.
엘라는 픽 웃었다. “전 여느 학자와는 다릅니다. 이 폐허에 대한 전설을 모으고, 그 실마리를 찾아 수십 년을 헤맨 사람들의 기록을 읽었죠. 당신이 이곳의 문을 열어줄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도요.”
“내가 이곳의 문을 열어줄 거라고 확신하는 건가?”
카인은 눈썹을 치켜떴다. 엘라는 낡은 양피지 지도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닿는 곳에는 희미하게 그려진 문양이 있었다.
“이곳으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개가 있지만, 가장 깊은 곳으로 향하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입구에는 ‘침묵의 봉인’이 걸려 있다고 하죠.”
“침묵의 봉인.”
“네. 아무리 강력한 마법사도, 거대한 물리력도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오직 ‘정해진 자’만이 봉인을 해제할 수 있다고 전해지죠.”
카인은 대답 대신 허리춤에 매달린 작은 단검을 만지작거렸다. 엘라가 그를 ‘정해진 자’라고 믿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그녀에게는 카인이 이 미지의 존재를 열어줄 도구일 뿐일 터였다. 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엘라는 이 폐허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을 안내해 줄 유일한 열쇠였다. 그녀는 고대 언어와 유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밤이 깊어지기 전에 들어가야 합니다.” 엘라가 말했다. “이곳의 밤은 어떤 짐승보다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바깥의 추위와는 비교도 안 될 겁니다.”
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망각의 아가리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거대한 돌기둥들이 지붕을 지탱하고 있는 모습은 마치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짐승의 갈비뼈 같았다. 희미하게 잔존한 벽화들이 보였다. 괴기스러운 형상들이 그려진 벽화는 이미 빛바래 흐릿했지만, 그 안에 담긴 섬뜩함은 여전했다. 거대한 눈을 가진 존재들이 하늘을 올려다보고, 그 아래에서 수많은 인간들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경배하는 것 같기도 했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거대한 절벽의 가장자리였다. 입구는 절벽 아래, 약 십 미터 정도의 거리에 있었다. 누군가 설치해 둔 듯한 낡은 밧줄 사다리가 어둠 속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런.” 엘라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사다리가 많이 낡았군요.”
“이 정도는 약과다.” 카인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배낭을 다시 메고 곡괭이를 허리에 단단히 고정했다. “먼저 내려가겠다. 내가 내려가서 안전을 확인하면 당신도 내려오시오.”
그는 주저 없이 밧줄을 잡고 몸을 던졌다. 낡은 로프는 그의 무게에 삐걱거렸지만, 훈련된 그의 손아귀는 단단히 밧줄을 움켜쥐었다. 바위틈에 발을 딛고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절벽 아래는 숨 막힐 듯한 어둠이 지배하고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떨어지는 작은 돌멩이 소리만이 메아리치며 득달같이 멀어져 갔다. 얼마나 깊은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공간이었다.
마침내 발이 바닥에 닿았다. 습하고 차가운 공기가 폐부를 파고들었다. 흙과 곰팡이, 그리고 알 수 없는 쇠 비린내가 섞인 역겨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카인은 손전등을 꺼내 불을 켰다. 낡은 마법석으로 동력을 얻는 손전등은 희미한 빛을 내뿜었다.
빛이 닿은 곳은 마치 거대한 동굴의 입구 같았다. 아니, 동굴이라기보다는 누군가 거대한 칼로 바위를 도려낸 듯한 인위적인 통로였다. 천장은 아득히 높았고, 양옆으로는 기괴한 문양이 새겨진 석벽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다. 마치 망각의 아가리가 거대한 생명체의 뱃속으로 이어지는 통로처럼 느껴졌다.
“내려오시오!”
카인이 외치자, 위에서 엘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후, 그녀도 조심스럽게 사다리를 타고 내려왔다. 엘라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젠장, 정말 끔찍한 냄새군요.” 엘라가 코를 막으며 말했다. “이곳에 대체 무엇이 갇혀 있었던 거죠?”
“아마 우리가 찾게 될 무언가일 거다.”
카인은 대답 대신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습한 바닥에는 오래된 돌 부스러기와 알 수 없는 파편들이 널려 있었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소름 끼치는 물소리가 울렸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지하수의 흐름 소리였다.
얼마 가지 않아 통로는 더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다. 동그란 광장이었다. 광장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제단이 솟아 있었다. 핏자국처럼 검붉게 변색된 제단 위에는 촛대처럼 보이는 뼈대들이 기괴하게 솟아 있었고, 그 주변으로는 깨진 돌멩이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이런….” 엘라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여기… 여기는 분명 제례를 올리던 곳입니다. 벽화들을 보세요, 카인 씨.”
손전등의 빛이 닿는 벽에는 수십 개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다. 입구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섬뜩한 그림들이었다. 거대한 눈을 가진 존재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을 짓밟고 있었고, 인간들은 그 발아래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절규하는 얼굴, 공포에 질린 눈동자, 그리고 차마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변이되어 가는 몸뚱이들.
벽화의 마지막 장면은 끔찍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제단 위에서 도륙당하는 모습이 섬뜩하리만치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었다. 그들의 심장은 도려내져 알 수 없는 존재에게 바쳐지고 있었다.
“이들은 고대 문명의 주민들이었을까요?” 엘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니면… 희생자들?”
“둘 다일 수도 있지.” 카인은 싸늘하게 답했다. 그는 제단 주변의 파편들을 살펴봤다. 낡은 뼈 조각들이었다.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 크고, 너무 기괴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카인의 발밑에 있던 돌멩이 하나가 미세하게 움직였다. 그의 신경은 이미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쉬이이익!
돌멩이가 움직인 곳에서 검은 그림자 하나가 튀어나왔다. 거대한 뱀과 같으면서도, 다리가 여러 개 달린 기괴한 생명체였다. 빛을 싫어하는 듯 몸을 비틀며 손전등의 빛이 닿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려 했다. 하지만 카인은 이미 움직인 뒤였다. 허리춤의 단검이 번개처럼 뽑혀 나왔고, 섬광처럼 빛나며 그림자의 몸통을 꿰뚫었다.
크아악!
기괴한 비명 소리가 광장 전체를 뒤흔들었다. 검은 피가 바닥에 낭자하게 흩뿌려졌고, 생명체는 고통스럽게 꿈틀거리다 이내 움직임을 멈췄다. 역겨운 악취가 진동했다.
“이게… 대체….” 엘라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죽은 생명체를 바라보았다. “이런 것이 아직도 살아있다니.”
“썩은 물웅덩이에는 언제나 구더기가 끓는 법이지.” 카인은 아무렇지 않게 단검을 뽑아 허리춤에 다시 꽂았다. 그의 눈은 이미 다음 위험을 찾고 있었다.
그 순간, 엘라의 눈이 제단 한쪽 구석에 박힌 돌멩이 하나에 꽂혔다. 다른 돌멩이들과는 달리 매끄럽게 다듬어진 검은 돌이었다. 그 위에는 희미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그 돌로 다가갔다.
“이건… ‘심장의 인장’입니다.” 엘라의 목소리에 희미한 흥분이 섞였다. “이것이 바로 침묵의 봉인을 풀 열쇠일 수도 있습니다. 카인 씨, 이 문양을 보세요!”
그녀의 손가락이 인장을 가리켰다. 그때였다. 엘라의 손가락이 인장에 닿는 순간, 인장은 섬뜩한 붉은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리고 광장 전체를 진동시키는 거대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쿠우우우우우우웅!
제단의 벽화들이 산산조각 나기 시작했고, 천장에서 거대한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광장 한가운데 있던 제단이 아래로 꺼지기 시작하더니, 그 아래에 숨겨져 있던 거대한 구멍이 모습을 드러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존재의 울부짖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젠장!” 카인이 엘라를 잡아끌었다. “무슨 짓을 한 거야!”
“모릅니다! 그저… 그저 만졌을 뿐인데…!” 엘라는 당황했지만, 그녀의 시선은 이미 제단 아래의 어둠을 향하고 있었다. 붉은 빛을 뿜던 심장의 인장은 이제 불타는 심장처럼 쿵, 쿵, 하고 규칙적인 박동을 내뿜고 있었다.
그 박동이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렬해지며, 광장 전체가 격렬하게 요동쳤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은 점점 더 또렷해지고, 마치 무언가가 잠에서 깨어나는 듯한 소름 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이건 봉인을 푼 게 아니에요, 카인 씨!” 엘라가 소리쳤다. “이건… 깨워버린 겁니다!”
그들의 발밑을 지탱하던 바닥마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 거대한 것이 꿈틀거리는 그림자가 비쳤다. 카인은 엘라의 손을 잡고 무너지는 광장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균열은 삽시간에 그들을 덮쳤고, 그들의 몸은 사정없이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떨어지는 순간, 카인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붉게 빛나는 ‘심장의 인장’이었다. 그것은 마치 모든 재앙을 깨운 근원의 심장처럼 붉게 타오르며, 끝없는 어둠 속으로 그들을 집어삼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