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1: 잿빛 언덕의 우연
어스름이 내리는 잿빛 언덕은 언제나 고요했다. 바람 소리조차 희미하게 스치는 이곳은 제국 최남단, 문명의 끝자락에 겨우 매달린 폐허나 다름없었다. 내가 맡은 일이라곤 그 폐허 속에서 먼지를 털어내고, 무너져가는 벽에 임시 기둥을 세우는 것뿐. 카이, 스무 해를 겨우 넘긴 나는 이곳에서 유물 관리인 보조라는 거창한 이름의 잡부로 일하고 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낡은 끈으로 묶인 곡괭이를 어깨에 메고, 해 질 녘 언덕 아래로 향하는 비탈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잿빛 언덕의 가장자리에는 제국 초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수천 년 전 ‘태초의 시대’라 불리던 시절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다. 대부분은 이미 도굴되거나 풍화되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간혹 뜻밖의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내 생애에는 한 번도 없었지만.
“젠장, 또 무너졌잖아.”
유적지 보수 작업이 한창이던 제7구역의 입구는 며칠 전 내린 폭우로 인해 또다시 일부가 붕괴되어 있었다. 거대한 돌무더기가 입구를 완전히 막아버린 모습에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본래 ‘잿빛 심연의 도서관’이라 불리던 곳이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초의 시대, 마법이 가장 번성했던 시기에 온갖 지식이 기록된 서판과 두루마리가 가득했던 장소라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거대한 돌무덤일 뿐, 안에 무엇이 남아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학자들은 한결같이 이곳이 위험하고 가치 없는 폐허라고 단정 지었다.
나는 허리에 찬 낡은 손도끼를 꺼내들었다. 흙과 뒤섞인 잔돌들을 걷어내고, 비교적 견고한 바위를 지지대 삼아 무너진 입구를 겨우 비집고 들어섰다. 내부 공기는 언제나처럼 축축하고 곰팡이 냄새가 진동했다. 돌무더기 너머의 공간은 암흑 그 자체였다. 나는 허리춤에서 마법 램프를 꺼내들고 마법석을 비틀어 푸른 불꽃을 피웠다. 희미한 불빛이 동굴 같은 내부를 조금이나마 밝혀주었다.
“젠장, 끝도 없네.”
돌덩이들을 치우는 작업은 육체노동 중에서도 가장 고역이었다. 단단하게 굳은 흙더미는 삽으로도 잘 떨어지지 않았고, 작은 돌멩이조차 곡괭이로 부숴야 했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나는 잠시 쉬어가기 위해 허리를 폈다.
그때였다. 램프 불빛이 바닥을 스치는 순간, 뭔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까지 내가 곡괭이로 내려쳤던 바위 틈새에서 희미하게 빛을 발하는 그것은, 마치 까만 흙 속에서 피어난 얼음 조각 같았다.
“이게 뭐지?”
나는 무심코 손을 뻗었다. 흙먼지로 뒤덮인 그 바위를 조심스럽게 파내자, 엄지손가락만 한 푸른색 결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투명하면서도 내부에 미세한 금빛 줄기가 박혀 있는, 아주 기묘한 형태의 돌이었다. 이곳에서 일하며 수없이 많은 돌멩이를 보고 만졌지만, 이런 것은 처음이었다. 그저 평범한 광물 조각이라기엔 너무나 이질적이었다.
나는 푸른 결정을 손에 쥐었다. 차가울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내 손바닥에 닿는 순간 은은한 온기가 느껴졌다. 마치 작은 심장이 내 손안에서 가볍게 뛰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으로 아주 희미한 이미지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건축물, 그리고 그 주위를 감싸는 푸른빛 안개. 찰나의 순간이었다. 너무나 빠르고 모호해서 꿈을 꾸었나 싶을 정도였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고된 노동이 환각을 불러일으켰을 거라고 애써 치부했다. 하지만 손안의 결정은 여전히 따뜻했고, 은근한 진동은 멈추지 않았다. 호기심이 일었다. 이 폐허에서 발견된 물건치고는 너무나도 생경했다. 나는 결정을 품속에 잘 갈무리했다. 잿빛 언덕에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일단 작업을 중단하고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숙소는 유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낡은 오두막이었다. 저녁 식사로 딱딱한 빵과 묽은 수프를 먹고 난 뒤, 나는 아까 발견한 푸른 결정을 다시 꺼내들었다. 마법 램프 불빛 아래, 결정은 더욱 영롱하게 빛났다. 내부에 박힌 금빛 줄기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했다.
나는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결정을 쥐었다.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집중했다. 아까 그 희미한 환영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다. 내 손가락이 결정을 감싸는 순간,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강렬한 파동이 내 몸을 덮쳤다.
‘욱!’
마치 얼음물을 한 번에 들이킨 듯한 차가움과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내 시야가 일렁였다.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오두막 안이 아니었다. 푸른빛 안개로 가득 찬 드넓은 공간. 그 중심에는 내가 아까 보았던 거대한 건축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돌이 아닌, 마치 빛으로 빚어낸 듯한 기묘한 탑이었다. 그리고 그 탑의 꼭대기에서는 무수한 푸른 섬광이 뿜어져 나와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오랜 침묵 끝에, 깨어나는가.]**
나직하지만 모든 것을 꿰뚫는 듯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목소리라기보다는, 마치 내 머릿속에 직접 새겨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것은 어떤 언어로도 정의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는 공포에 질려 손을 떨었다. 푸른 결정이 손에서 떨어져 나갈 뻔했지만, 나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환영은 몇 초 만에 사라졌지만, 그 여파는 엄청났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미친 듯이 박동했다. 등줄기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것은 단순히 피곤해서 보는 환각이 아니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이 푸른 결정은, 분명 살아있는 무언가였다. 그리고 나에게 어떤 알 수 없는 힘을 불어넣고 있었다. 태초의 시대, 전설로만 듣던 고대 마법의 잔재가 내 손안에 있다는 사실에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했다.
나는 결정을 든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이제껏 살면서 마법은 오직 책 속의 이야기나 제국의 궁정 마법사들에게나 허락된 먼 꿈같은 것이었다. 평범한 잡부인 나에게는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쥐어진 이 작은 푸른 결정은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잿빛 언덕의 우연이, 나의 삶을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이끌고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결정을 꽉 쥐었다. 두려움과 함께, 미지의 힘에 대한 걷잡을 수 없는 호기심이 밀려왔다.
내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작은 돌멩이가 가져올 파장이 두려우면서도, 나는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