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 판타지 (현대 판타지)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1장. 도시의 그림자, 깨어나는 전설

그날, 서울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분주했다. 빽빽한 빌딩 숲 사이로 아침 햇살이 비집고 들어와, 강남대로를 횡단하는 직장인들의 등짝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지하철은 만원이었고, 카페에서는 아메리카노 향이 짙게 퍼졌다. 모든 것이 너무나 평범해서, 한강 변 벤치에 앉아 헤드폰을 낀 채 강물을 응시하던 서진은 잠시 자신이 이 지루하고 안전한 평범함에 완벽히 동화되었다고 착각할 뻔했다.

그러나 착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전 9시 17분.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서진의 심장이 기묘하게 울렁거렸다. 심장이 갈비뼈 안에서 한 박자 엇나가 쿵, 하고 떨어지는 듯한 감각. 동시에 시야가 아주 미세하게 일렁였다. 마치 투명한 막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 미세한 비틀림 속에서 서진은 도심의 빌딩들이 찰나의 잔상을 그리며 왜곡되는 것을 보았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자동차 경적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아주 잠깐, 불협화음처럼 뭉개졌다.

“……이런.”

서진은 헤드폰을 벗어 던지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느끼지도 못했을, 혹은 그저 눈 깜빡임이나 컨디션 난조로 치부했을 이질적인 감각. 그러나 서진에게는 달랐다. 이건 지진도, 단순한 현기증도 아니었다. 그의 온몸의 감각기관이, 잠시 잊고 지냈던 어떤 낯선 경고음을 내뱉고 있었다.

시계탑의 시침은 정확히 9시 17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서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벤치에서 커피를 마시던 노인도, 조깅을 하던 젊은이도, 아무도 그 순간의 이상을 눈치챈 것 같지 않았다. 모두가 너무나 평화롭고, 너무나 무지했다. 그 평화로운 풍경이 서진의 심장을 더욱 거칠게 몰아세웠다.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발신인 이름은 ‘사부님’.
서진은 깊은 숨을 내쉬며 전화를 받았다.

“예, 사부님.”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평소의 느긋한 어조와는 확연히 달랐다. 목소리에는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안감과, 마치 거대한 무게를 짊어진 듯한 피로감이 섞여 있었다.
“서진아. 방금, 느꼈느냐?”
“네. 9시 17분. 아주 잠깐이었지만.”
서진의 목소리도 낮고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가 평범한 대학생인 척 위장하며 보냈던 지난 3년간의 노력이, 단 한 번의 진동으로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예상보다 빨랐군. 봉인의 틈이 더 벌어진 모양이다.”
사부님의 목소리는 한숨처럼 이어졌다.
“무림은 이미 발칵 뒤집혔다. 아니, 단순히 무림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세상의 근간이 흔들릴지도 몰라.”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봉인’, ‘무림’, ‘세상의 근간’. 그가 애써 멀리했던 단어들이 다시금 그의 귓가를 후벼 팠다.
“그래서, 그게 무슨 의미인데요?”
“의미? 네가 더 잘 알지 않느냐. 천명대회가 열릴 때가 된 것이다.”
천명대회.
그 세 글자가 서진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잊고 싶었던 과거, 지워버리고 싶었던 운명의 굴레. 서진은 눈을 감았다.

천명대회(天命大會).
천하의 명운(命運)을 걸고, 무림 각 문파와 고수들이 한자리에 모여 기량을 겨루는 대사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지만, 실상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십, 수백 년 주기로 봉인된 존재들이 깨어나려 할 때, 혹은 세계의 균형이 깨질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열렸던 최후의 비책이었다. 대회의 승자는 단순한 ‘천하제일’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깨어진 균형을 바로잡을 힘, 혹은 다시 봉인을 걸고 세상을 수호할 ‘천명’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림인들이 피를 흘리거나, 심지어 목숨을 잃기도 했다.

“벌써요? 사부님, 아직 멀었다고 하셨잖아요.” 서진은 애써 침착하려 했지만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였다.
“예측은 어디까지나 예측일 뿐. 세계의 흐름은 늘 예상보다 빠르거나 느리게 흘러왔다. 봉인의 약화는 이미 수년 전부터 감지되고 있었지만, 오늘 아침의 진동은 그 틈이 완전히 벌어졌다는 신호다. 이제 막을 수 없어.”
사부님은 말을 이었다.
“각 문파에서는 이미 전음(傳音)으로 이 사실을 공유하고 있다. 대회 개최에 대한 의논이 시작되었고, 머지않아 정식 소집령이 떨어질 것이다. 이번에는 도심 한가운데에서 열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은밀한 장소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으니까.”

도심 한가운데서 무술 대회가 열린다고?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치게 될까? 기상천외한 퍼포먼스로, 혹은 집단 착란으로 치부될까? 서진은 눈앞에 펼쳐진 서울의 풍경을 다시 한번 보았다. 저 빌딩들 사이에서, 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싸움이 벌어진다고?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무림맹에서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지만, 이번 위협은 차원이 다른 듯싶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고대 무림의 힘이 다시금 도시 속에서 꿈틀대는 것이 느껴져.”
사부님의 목소리에는 전에 없던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들은 이번 대회에 반드시 ‘그 아이’를 참가시키려 할 것이다. 너는… 아니, 우리는 그 아이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
‘그 아이’. 서진은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아이와 엮이는 것은 곧 서진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길로 되돌아가는 것을 의미했다.

“저는… 이번 일과는 상관없습니다. 사부님. 저는 더 이상…”
서진은 말을 흐렸다. 지난 3년간 그가 얼마나 평범한 삶을 동경하며 노력했는지, 사부님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사부님의 대답은 단호했다.
“네가 상관없을 수 있는 일이었으면, 애초에 전화하지도 않았다. 네가 누구인지, 네 혈통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잊었느냐? 그리고 ‘그 아이’와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 것이다. 너는 선택받은 자이며,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지녔다.”

선택받은 자. 피할 수 없는 운명.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애써 감추고 살았던 힘이, 잊으려 했던 훈련의 기억들이, 몸속 깊은 곳에서 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힘은 마치 잠자던 맹수처럼, 서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깨어나고 있었다.

“어디로 오면 됩니까?”
결국, 서진은 체념하듯 물었다. 그의 질문에 사부님은 짧게 한숨을 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안도감보다는 깊은 고뇌가 담긴 한숨이었다.
“강남역 4번 출구에서 좌회전하면 보이는, 그 한정식집 뒷골목으로 와라. 그곳에 이미 몇몇이 모여 있다.”

전화가 끊겼다.
서진은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헤드폰은 벤치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한강의 잔물결을 바라봤다. 햇살에 부서지는 윤슬은 아름다웠지만, 서진의 눈에는 그 빛마저도 일렁이는 위협처럼 보였다.
평범한 도시의 일상은, 단 9시 17분의 진동 한 번으로 산산조각 났다.

강남역. 서울의 심장.
그곳에서, 천하의 운명을 건 무림 고수들의 싸움이 시작될 참이었다.
서진은 주머니 속 낡은 목걸이를 만졌다. 어릴 적 사부님께 받은, 검은 비단 주머니에 싸인 작은 조약돌. 손끝에 닿는 차가운 감촉이, 그에게 다가올 피할 수 없는 운명을 생생히 일깨웠다.

그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평범한 대학생 서진은 그날, 그렇게 도시의 그림자 속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