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의 서고는 미로였다. 세월의 무게에 짓눌린 나무판자들이 삐걱거렸고, 곰팡이 핀 종이 냄새와 묵은 먼지 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이진은 이 미로의 가장 깊숙한 곳, 사람들이 ‘폐기실’이라 부르는 곳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냈다. 햇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이치는 빛은 그저 더 깊은 어둠을 강조할 뿐이었다.
“젠장, 또 먼지와의 전쟁이로군.”
이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들린 붓은 서고의 책을 정리하는 도구라기보다는 먼지와의 싸움에서 쓰는 창에 가까웠다. 그는 규장각의 말단 서리였다. 높은 이들은 진귀한 서책과 고문헌이 가득한 중앙 서고에서 우아하게 연구에 몰두했지만, 이진 같은 말단은 주로 이렇게 쓸모없다고 여겨지는 오래된 책들을 분류하고 보존하는, 또는 폐기하는 일에 동원되었다. 특히 이곳, ‘하급 필사본 보관고’는 정말이지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곳이었다.
오늘은 낡은 나무 서가를 통째로 비워내고 그 안의 책들을 새로 분류하라는 명을 받았다. 책들이 워낙 오래되고 쌓여있어 서가 자체가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삐걱이는 사다리를 밟고 올라서자, 수십 년은 족히 쌓였을 먼지 구름이 콜록거리는 기침과 함께 터져 나왔다. 마른기침을 몇 번 토해내고 눈물을 훔쳤다. 이런 일은 이골이 났다.
그는 가장 높은 칸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두꺼운 책들을 하나씩 꺼내 바닥에 쌓았다. 대부분은 빛바랜 유교 경전이나 관가 문서의 필사본이었다.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몇몇은 종이가 너무 삭아 만지기만 해도 부스러질 지경이었다. 그렇게 한 칸, 한 칸 내려가던 중이었다.
손이 닿지 않던 가장 구석진 곳에서 이진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여느 책들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색 비단으로 단단히 묶여 있는 두툼한 목판본이었다. 다른 책들이 모두 칙칙한 갈색이나 회색빛을 띠는 와중에, 이 책만 홀로 칠흑 같은 어둠을 품고 있었다. 서가에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 오랜 세월 아무도 건드리지 않은 듯했다.
“이건 또 뭐야?”
호기심이 발동했다. 규장각에 이런 형태의 책이 있었다니. 그는 조심스럽게 책을 빼내려 했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서가와 한 몸인 양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이진은 손전등을 꺼내 서가 안쪽을 비췄다. 빛이 닿자, 그는 숨을 들이켰다.
책은 단순히 서가에 꽂혀 있는 게 아니었다. 책의 등 부분이 서가의 나무판자에 박혀 있었고, 그 주변으로 미세하게 나 있는 틈새가 보였다. 마치 책 자체가 어떤 잠금장치나 손잡이 역할을 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틈새 안쪽으로, 낡은 나무의 질감과는 확연히 다른, 검은색 금속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설마, 비밀 통로?”
그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어릴 적 몰래 읽던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규장각의 폐기실에서 이런 것이 발견될 줄이야.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폐기실은 늘 그랬듯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이진은 조심스럽게 목판본을 양손으로 잡았다. 꽉 쥐고 천천히 당겨 보았다. 삐걱이는 소리도 없이, 목판본이 아주 미세하게 바깥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서가의 안쪽 벽면에서 ‘딸깍’ 하는 작은 금속성 소리가 울렸다. 이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목판본이 더 깊숙이 빠져나오자, 그 뒤에 숨겨져 있던 벽면이 마치 문처럼 서서히 안쪽으로 밀려 들어갔다. 낡은 나무 냄새와 먼지 냄새를 뚫고, 전혀 다른 종류의 서늘한 공기가 그의 얼굴을 스쳤다.
숨겨진 통로였다.
이진은 망설였다. 이런 것을 발견했다고 보고하면 어떻게 될까? 상부에 보고하는 순간, 이 발견은 그의 것이 아니라 규장각의 것이 될 터였다. 어쩌면 귀찮은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미지의 것에 대한 강렬한 충동이 그를 사로잡았다. 대체 이 통로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는 결국 호기심에 굴복했다. 손전등을 켜고, 목판본이 열어젖힌 좁은 틈새로 고개를 밀어 넣었다. 통로는 생각보다 짧았다. 몇 걸음 옮기자 금세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여, 여기는…?”
그것은 작은 방이었다. 벽은 돌로 되어 있었고, 천장은 규장각 서고와는 달리 꽤 높았다. 방 한가운데에는 큼직한 석판이 놓여 있었다. 석판 위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 형상이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거리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이진은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오래된 돌바닥에서 얇게 부서지는 먼지 소리가 났다. 방 안은 서늘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묘한 기운이 감돌았다. 숨겨진 공간이라는 사실이 실감 나게 했다.
석판에 가까이 다가가자,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석판 위에 놓인 단 하나의 물건이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색 옥이었다. 표면은 매끄럽고 윤기가 흘렀지만, 그 안에는 흡사 밤하늘의 은하수를 담은 듯 희미한 빛의 줄기들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이진은 홀린 듯 옥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 끝이 옥에 닿는 순간, 차가운 돌덩이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온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옥 안에서 꿈틀거리던 빛의 줄기들이 폭발하듯 강렬한 섬광을 터뜨렸다.
**콰아앙!**
천둥소리 같은 굉음과 함께 방 전체가 흔들렸다. 이진은 너무 놀라 뒷걸음질 쳤지만, 이미 늦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이더니, 그의 정신은 마치 깊은 심해로 빨려 들어가는 듯 아득해졌다. 머릿속에는 난생 처음 보는 이미지들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거대한 용이 하늘을 가르고, 대지가 갈라지며 불꽃이 솟아오르고, 빛나는 손길이 산을 들어 올리는 믿을 수 없는 풍경들…
그의 손에 쥐인 옥은 뜨겁게 달아올라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으로 깜빡였다. 그리고 그 깜빡임과 함께, 이진은 자신의 몸속에 알 수 없는 힘이 흐르기 시작했음을 깨달았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마치 수천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존재가 깨어나는 듯한, 아득하고도 압도적인 전율이었다.
옥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이 그의 눈동자에 깊이 박히는 순간, 이진은 확신했다.
이것은 그저 평범한 돌멩이가 아니었다.
이것은, 고대의 마법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마법이 그의 손안에서 깨어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