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 세계의 심장부, 천하제일 무술대회가 열리는 ‘무황전’ 앞은 발 디딜 틈 없이 인산인해였다. 십 년에 한 번, 무림의 운명을 좌우할 최고수를 가리는 이 대회는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니었다. 우승자는 향후 십 년간 무림맹주의 자리에 올라, 혼란스러운 무림의 질서를 바로잡고, 강호의 미래를 결정할 막강한 권한을 손에 쥐게 된다. 하지만 모두가 그 숭고한 의미를 아는 것은 아니었다.
“어휴, 또 저 강진우라니!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답답해지는구먼!”
군중 속에서 앳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검은 도포를 깔끔하게 차려입은 사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경기장 중앙에 선 모습이 비치자마자, 여기저기서 한숨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무림에서 ‘벽력신군’이라 불리는 강진우. 그는 강호에 평화를 가져올 적임자로 추앙받는 존재였지만, 그의 무뚝뚝한 성격과 주변에 아랑곳 않는 태도는 팬층만큼이나 안티팬층도 두텁게 만들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얼굴은 국보급인데 연애세포는 멸종 위기종”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까지 붙어 있었다.
“이번 대회도 강진우가 우승하겠지? 에휴, 무림에 로맨스 따윈 없겠네.”
“그러게 말이야. 한설아 사저나 좀 결승에 올라와 줬으면 좋으련만.”
강진우는 그런 수군거림에도 미동도 없이 곧 시작될 첫 대결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오직 우승, 그리고 무림의 질서 회복만이 존재했다. 사랑? 연애? 그런 감정 소모는 한가한 자들의 사치일 뿐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쩌렁쩌렁 울리던 징 소리와 함께 첫 대결이 시작되려던 찰나, 경기장 입구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란이 일었다.
“야, 길 좀 비켜! 사람 지나간다! 천하제일 무술대회 구경 온 거야, 단체 멍 때리기 하러 온 거야?”
경쾌하고 발랄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새하얀 도복에 붉은색 수가 놓인 검대를 찬 여인이었다. ‘매화검선’ 한설아. 강호의 여인들 중 최고수로 꼽히며, 그 뛰어난 미모만큼이나 예측 불가능한 성격으로도 유명했다. 그녀는 사람들 사이를 혜성처럼 가로질러 달려오다, 그만 경기장 가장자리에 서 있던 강진우와 ‘쿵!’ 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아야야! 조심 좀 하지?”
발끈한 한설아가 고개를 들자, 눈앞에 강진우의 얼음장 같은 얼굴이 들어왔다. 그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실례.”
강진우는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몸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실례? 실례가 끝이야? 세상에, 이 도련님은 돌멩이랑 대화하는 줄 알겠네!”
한설아는 기가 막혔다. 그녀의 눈에 비친 강진우는 ‘무심’ 그 자체였다. 그녀가 바닥에 떨어뜨린, 방금 막 산 꿀타래 한 조각조차 돌아보지 않았다.
“경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강진우는 그녀를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어우, 됐어요! 그 잘난 집중이나 하시죠! 무림의 평화 다 당신 혼자 지키세요, 네?!”
한설아는 씩씩거리며 꿀타래 조각을 발로 툭 차버렸다. 그녀 역시 이번 대회의 유력한 우승 후보 중 한 명이었지만, 그녀의 목표는 강진우와는 조금 달랐다. ‘무림의 평화’보다는 ‘재미’와 ‘성취감’, 그리고 어쩌면 ‘잘생긴 사내 엿 먹이기’ 정도?
그날 이후, 강진우와 한설아의 악연은 시작되었다.
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예선과 본선을 거쳐 강진우와 한설아는 나란히 8강에 안착했다. 무림인들은 그들의 강력함에 감탄했지만, 둘 사이의 묘한 기류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이, 얼음동자! 이쪽에서 연습할 테니 비켜라!”
훈련장에서도 한설아는 강진우를 보면 시비를 걸었다. 강진우는 묵묵히 자리를 피했지만, 가끔 그녀의 매화검법을 훔쳐보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매화처럼 흩날리면서도 날카로운 검선(劍線)은 분명 아름다웠다.
어느 날 밤, 대회 본부에서 열린 작은 연회에서 강진우는 또다시 한설아와 마주쳤다.
“어머, 벽력신군께서 이런 곳에도 발걸음을 하시네요? 혹시 술이라도 한잔 하시려나?”
한설아는 강진우가 들고 있던 찻잔을 보며 얄궂게 웃었다.
“그저… 정보 수집 중입니다.” 강진우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정보 수집이요? 그럼 저 매화검선의 정보는 좀 수집하셨으려나?” 한설아가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말했다.
강진우는 살짝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음… 강합니다. 그리고… 예측 불가능합니다.”
“어머나! 나보고 예측 불가능하다니? 칭찬으로 받아들일게요!” 한설아는 깔깔 웃었다. “근데 강진우 사형은 너무 예측 가능해요. 맨날 똑같은 표정, 똑같은 말투, 똑같은 무술. 재미없어.”
그녀의 말이 강진우의 심장에 콕 박혔다. 재미없다니. 무림의 고수에게 ‘재미없다’는 말은 굴욕적이었다.
“강해야만 하는 것이 무림입니다.” 강진우는 굳건히 말했다.
“강하기만 해서 뭐해요? 좀 다채로워야지! 인생이든, 무술이든, 사랑이든!”
“사랑…?” 강진우는 그 단어에 고개를 갸웃했다.
한설아는 그의 순진한 반응에 피식 웃었다. “어우, 진짜 연애세포 멸종 위기종 맞네. 됐어요, 됐어! 내가 당신 무술을 다채롭게 만들어 줄 테니 기대나 하시죠!”
그녀는 그렇게 선전포고를 하고는 홀연히 자리를 떴다. 강진우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궁금해하기 시작했다.
대회는 준결승으로 치달았고, 무림의 기대대로 강진우와 한설아가 각자의 조에서 승리하여 결승에서 만나게 되었다.
대회 전날, 강진우는 훈련장에서 밤늦도록 수련 중이었다. 벽력권의 강력한 기세가 주변 나무들을 뒤흔들었다. 그때,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힘만 쓰는 거 아니에요?”
한설아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 “무림의 평화는 그렇다 치고, 당신은 우승하면 뭘 할 건데요?”
강진우는 수련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무림의 질서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고통을 줄일 것입니다.”
“에이, 재미없어. 나는 우승하면, 무림맹주가 된 기념으로 ‘천하제일 연애 무술대회’를 열 거예요! 다들 사랑만 하고 싸움은 그만하라고 선포할 거라고!”
강진우는 그녀의 엉뚱한 말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그게… 무림의 평화입니까?”
“그럼요! 사랑에 빠지면 누가 싸울 힘이 있겠어요? 다들 꽁냥꽁냥하느라 바쁠 텐데!”
한설아는 진지하게 제 주장을 펼쳤다. 밤하늘 아래, 그녀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 유난히 빛나 보였다. 강진우는 처음으로 그녀의 ‘예측 불가능함’이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강진우 사형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한설아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강진우는 얼어붙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그런 것은…”
“어우, 됐어요, 됐어! 내일 결승에서나 똑바로 하시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사라졌다. 강진우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결전의 날. 무황전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열기로 가득했다.
강진우와 한설아는 경기장 중앙에 마주 섰다. 무심한 표정의 강진우와 달리, 한설아의 얼굴에는 장난기 어린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 벽력신군! 제가 당신의 무술을 ‘다채롭게’ 만들어 준다고 했죠?”
“…무슨 소립니까?”
“후훗. 두고 보면 알 겁니다!”
시작을 알리는 징 소리가 울리자마자, 한설아는 맹렬하게 매화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검은 마치 꽃잎이 흩날리는 듯 아름다웠지만, 그 속에는 치명적인 살기가 감춰져 있었다. 강진우는 벽력권으로 그녀의 공격을 막아냈다. ‘쾅! 콰과광!’ 강력한 권풍과 날카로운 검기가 부딪히며 엄청난 충격파를 일으켰다.
강진우는 필사적으로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문득 그녀의 검법이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음을 느꼈다. 어딘가… 더 자유롭고, 때로는 유혹적인 움직임까지 섞여 있는 듯했다. 그의 시야에 그녀의 붉은색 수가 놓인 도복 자락이 스치고 지나갔다.
“강진우 사형, 집중 안 합니까?!”
한설아가 그의 빈틈을 노려 날카로운 검을 찔러 넣으려 했지만, 강진우는 가까스로 피했다.
“매화검선! 장난칠 때가 아닙니다!” 강진우는 조금 화가 난 듯 소리쳤다.
“누가 장난칩니까! 이건 사랑을 위한 검법이라고요!”
그녀의 말에 강진우는 멍해졌다. 사랑을 위한 검법이라니!
둘의 대결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게 이어졌다. 강진우는 그녀의 검법 속에서 예측 불가능한 변수를 읽으려 애썼고, 한설아는 그의 굳건한 벽력권을 뚫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수를 찾아냈다. 그 과정에서 강진우는 한설아의 눈빛에서 강렬한 투지뿐 아니라, 미묘한 장난기와 함께 자신을 향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기 시작했다.
‘아니, 저 여인이 나를… 좋아하나? 아니야, 그럴 리가!’
강진우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무뚝뚝한 심장이 격렬한 타격에 울리는 것만큼이나 세차게 고동쳤다.
결국 대결은 막바지에 다다랐다. 한설아는 마지막 일격을 준비하며, 온몸의 기운을 매화검 끝에 모았다. ‘천공매화무(天空梅花舞)!’. 하늘을 가르는 매화가 휘몰아치듯, 수십 개의 검기가 강진우를 향해 날아들었다.
강진우는 피할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기운을 끌어모아 마지막 일격을 날렸다. ‘벽력천뢰(霹靂天雷)!’. 먹구름이 걷히고 번개가 치듯, 거대한 뇌전이 매화검기를 향해 뻗어 나갔다.
‘쾅!!!!’
천지를 뒤흔드는 폭음과 함께 엄청난 섬광이 경기장을 뒤덮었다. 관중들은 눈을 가리고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연기가 걷히자 드러난 것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강진우와 한설아는 서로에게 검과 권을 겨눈 채, 완전히 멈춰 서 있었다. 매화검 끝이 강진우의 심장 바로 앞에 닿아 있었고, 그의 벽력권은 한설아의 어깨를 스치듯 지나가고 있었다. 둘의 몸은 너무나 가까이 밀착되어, 서로의 숨결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졌다.”
강진우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의 심장에는 분명 매화검의 기운이 스며들어 있었다.
“어머나? 진짜 내가 이겼네?” 한설아는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때, 강진우는 갑자기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졌다. 하지만… 당신의 예측 불가능함에… 내 마음까지 빼앗긴 것 같다.”
한설아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뭐, 뭘 빼앗겨요! 이 싸움꾼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이겼으니… 무림맹주의 자리와… 나를 책임지세요.”
강진우는 여전히 무표정했지만, 그의 눈빛은 흔들리고 있었다.
관중들은 얼어붙었다. 이건 무술 대결이 아니었다. 이건… 고백이었다!
“어머나 세상에! 저 얼음동자가!”
“드디어 연애세포가 살아난 건가!”
“천하제일 무술대회가 천하제일 연애대회가 됐잖아!”
한설아는 당황한 나머지 매화검을 떨어뜨릴 뻔했다.
“뭐, 뭐예요! 내가 왜 당신을 책임져요! 무림의 운명을 책임지는 거지!”
“당신이 무림의 운명을 책임지면, 그 안의 나도 책임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강진우는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그의 연애세포는 아직 초급이었지만, 논리력만큼은 무림 최고수답게 완벽했다.
한설아는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하! 좋아요! 좋아요! 벽력신군 강진우, 당신이 그렇게까지 나온다면, 이 매화검선 한설아가 특별히 책임져 주도록 하죠!”
그녀의 시원한 대답에 관중들은 환호했다.
결국 한설아가 천하제일 무술대회의 우승자가 되었다. 그녀는 무림맹주가 되어, 예상대로 ‘천하제일 연애 무술대회’를 선포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녀는 강진우와 함께 무림의 질서를 바로잡는 데 힘썼고, 무림의 평화는 강진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로운’ 방식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얼마 후, 무림맹주가 된 한설아는 강진우에게 아주 특별한 명령을 내렸다.
“벽력신군, 앞으로는 매일 아침 저와 함께 ‘사랑의 매화검법’과 ‘연애의 벽력권’을 수련해야 할 것입니다!”
“그게… 무림의 평화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강진우가 여전히 뻣뻣하게 묻자, 한설아는 그의 팔짱을 끼며 환하게 웃었다.
“물론이죠! 사랑이 넘치는 무림에 평화가 깃드는 법이니까! 그리고 당신의 연애세포를 제가 책임지고 활성화시켜 줘야 하잖아요?”
강진우는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도 이제는 한설아만의 ‘예측 불가능한’ 미소가 어렴풋이 피어났다. 천하의 운명은 그렇게, 사랑과 함께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