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챕터 3: 우연을 가장한 필연
“김미나 씨,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효율적입니다.”
내 옆자리에서 펜을 든 리안 선배가 나지막이 말했다. 조명이 은은한 도서관 열람실, 책과 노트 사이에서 선배의 단정한 옆모습은 언제 봐도 비현실적이었다. 흠잡을 데 없는 얼굴에, 흑단처럼 부드러운 머리카락, 그리고 서늘하면서도 깊은 눈동자. 그는 분명 우리 과의 ‘넘사벽’이었다. 외모도, 성적도, 심지어 성격마저도 완벽해서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운 그런 사람.
문제는, 그런 사람이 왜 하필 나 같은 평범한 김미나에게, 그것도 이렇게 지극정성으로 시험공부를 가르쳐주고 있느냐는 거다. 그것도 자그마치 세 번째 주말이다.
“아, 네… 그런데 선배, 여기 이 공식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거죠? 아무리 찾아봐도 교재에 없는데…”
내 눈앞의 문제는 복잡한 미적분 기호로 가득 차 있었다. 선배가 짚어준 공식은 해답을 향한 지름길처럼 보였지만,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생소한 기호들이었다.
리안 선배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동작이 어딘가 조금, 아주 조금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이것은 특정 차원의… 아, 아니. 심화 학습 자료에 수록된 내용입니다. 제가 따로 공부하던 것인데, 김미나 씨에게도 도움이 될까 하여.”
선배는 자연스럽게 말을 고쳤지만, 나는 이미 ‘특정 차원’이라는 단어에 꽂혀버렸다. 설마, 우리 선배, 사실 외계인이야? 아니면 이세계에서 오신 용사님? 미나야, 정신 차려. 로맨틱 코미디 소설에 과몰입하지 마!
나는 고개를 흔들며 애써 불길한 상상을 떨쳐냈다. 하지만 리안 선배는 한두 번 이상한 게 아니었다. 시험 기간 내내 커피 한 잔 마시는 걸 본 적 없고, 잠도 안 자는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종종 먼 산을 보거나, 허공에 대고 무언가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릴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그의 눈동자에는 찰나의 이질적인 빛이 스치곤 했다.
나는 의심의 눈초리로 선배의 손을 바라봤다. 그의 길고 하얀 손가락이 펜을 쥔 채 노트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였다.
팟!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노트 모서리에서 파란 불꽃이 튀었다. 리안 선배의 손가락 끝에서 아주 미세한 스파크가 터진 것이다. 마치 정전기가 심한 날, 손끝에서 찌릿하고 정전기가 발생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전기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게다가 난방 시설이 잘 되어있는 도서관인데.
“어… 선배, 방금 그거 뭐예요?” 내가 얼떨떨하게 묻자 리안 선배의 얼굴이 미세하게 굳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잠시… 열이 오른 것 같군요.” 그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평소보다 훨씬 차가웠다. 마치 시원한 얼음을 만지는 것 같은 감촉.
나는 더 의심스러워졌다. 선배의 눈동자가 잠시 방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계속 공부할까요? 아니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김미나 씨의 학습 효율에 도움이 될까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하고 완벽한 존댓말이었지만, 나는 그 안에서 왠지 모를 당황스러움과 함께 어딘가 긴장한 듯한 기색을 읽어냈다. 이 선배, 뭔가 숨기고 있어!
“아, 네, 좋아요. 조금 쉬다가 할까요? 마침 목도 마르고…” 나는 괜히 볼을 긁적이며 선배의 눈치를 살폈다. 그의 반응이 궁금했다.
리안 선배는 잠시 침묵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음료라도… 저는 괜찮으니 김미나 씨가 마실 것을 사 오시죠.”
나는 왠지 모르게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같이 카페라도 갈 줄 알았는데. 물론, 내가 선배와 단둘이 카페에 갈 자격 같은 건 없지만.
“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열람실 밖으로 향했다. 문을 닫기 직전, 나는 슬쩍 리안 선배를 돌아봤다.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그의 주변 공기가, 아주 미세하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마치 여름 아지랑이처럼, 흔들리는 아지랑이 사이로 그의 그림자가… 아주 잠깐, 형체가 미묘하게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등 뒤에 무언가 커다란 날개라도 돋아났다가 사라진 것처럼.
나는 눈을 비볐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나? 아무리 상상의 나래를 펼쳐도 ‘날개’는 좀 심했다. 내가 무슨 판타지 소설 여주인공인가.
“미쳤어, 김미나. 공부나 해.” 나는 스스로를 타박하며 복도 끝에 있는 자판기로 향했다.
—
캔 커피를 들고 다시 열람실 문을 열자, 리안 선배는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마치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시간이 멈췄던 것처럼.
“음료 사 왔어요, 선배.” 나는 익숙하게 내 자리에 앉으며 캔 커피를 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고맙습니다.” 선배가 말했다. 그런데 그의 눈이, 캔 커피가 아니라 내 손을 향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내 손목에 있는, 친구에게 받은 작은 실팔찌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쑥스러워 팔찌를 가렸다. “아, 이거요? 그냥 친구가 만들어준 거예요.”
선배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내 손목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내 팔찌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의 손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 차가움은 왠지 모르게 따뜻하게 느껴졌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예상치 못한 스킨십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김미나 씨의… 이런 소박한 취향이, 흥미롭군요.” 그의 목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내 귓가에 속삭이는 것처럼.
그의 시선이 팔찌에서 내 얼굴로 향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동자가 나를 꿰뚫어 보는 것 같았다. 숨이 막혔다. 내가 숨어있던 모든 감정들이 그의 눈빛에 들켜버린 것 같아서.
“선배도… 팔찌 같은 거 좋아하세요?” 나는 어색함을 감추려 애쓰며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리안 선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에는 다시 그 알 수 없는 이질적인 빛이 스쳐 지나갔다.
“저에게는… 이런 것을 지닐 자격이 없습니다.”
“네?”
그의 손이 내 손목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마치 뜨거운 것을 만진 것처럼, 재빨리 물러나는 움직임이었다. 그의 얼굴에는 순간, 복잡한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쓸쓸함, 체념, 그리고… 갈망?
“죄송합니다. 제가 잠시… 불필요한 행동을 했습니다.” 그는 다시 평소의 완벽한 리안 선배로 돌아왔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의 가면 뒤에 숨겨진 무언가를 본 것 같았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차가웠던 손길의 잔상과, 알 수 없는 그의 눈빛이 내 심장을 계속해서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불필요한 행동이라니. 그럼 이건 내게 아무 의미도 없는 스킨십이었다는 건가? 아니면 그가 무언가를 애써 숨기고 있다는 고백이었을까.
그때, 열람실 문이 살짝 열리더니 우리 과의 소식통인 동기, 박수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미나야, 리안 선배! 아직 있었네? 소문 들었어? 이번에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에 리안 선배가 지원했다던데? 경쟁률이 엄청나대!”
박수진의 말에 내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해외 교환학생? 그 완벽한 선배가, 이 학교를 떠난다고?
나는 리안 선배를 돌아봤다. 그의 눈동자에 찰나의 흔들림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내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이었다. 그의 이상한 행동,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존재. 그리고 이제는 그의 갑작스러운 ‘떠남’.
나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쩌면 내가 그의 비밀에 너무 깊이 들어선 걸까? 아니면, 내가 그에게 너무 깊이 빠져버린 걸까?
선배의 차가운 손이 닿았던 내 손목이, 여전히 뜨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