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은 늘 그랬듯 침묵했다. 폐허가 된 도시의 뼈대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휘파람처럼 불었다. 하린은 찢어진 망토를 여미며 눅눅한 흙바닥을 내딛었다. 발밑에서는 깨진 유리 조각과 콘크리트 파편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녀의 등에는 빛바랜 배낭이, 허리춤에는 닳아빠진 에너지 칼집이 매달려 있었다. 눈은 사방을 경계하며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살아남은 자에게 방심은 곧 죽음이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잖아.”
메마른 입술 사이로 혼잣말이 터져 나왔다. 며칠째 식량도, 연료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 보급 기지까지 돌아가려면 이틀은 족히 걸릴 텐데, 이대로라면 중간에 지쳐 쓰러질 게 뻔했다. 그녀의 목표는 낡은 아파트 단지 깊숙이 숨겨져 있을지 모를 비축 창고였다. 소문만 무성한 곳이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어둠이 드리워진 복도를 따라 걸었다. 한때는 누군가의 안식처였을 공간들이 이제는 그림자와 침묵만 가득했다. 벽에는 긁힌 자국과 알 수 없는 액체의 흔적이 얼룩져 있었다. 심연의 그림자가 이 도시를 덮친 후로 모든 것이 변이했다. 살아남은 인간도, 죽은 도시도, 그리고 저 괴물들도.
갑자기 귀를 찢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하린의 몸이 순식간에 반응했다. 본능적으로 한쪽 벽에 몸을 바싹 붙였다. 망가진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새어 들어오는 방. 거기서 소리가 났다. 쿵, 쿵, 쿵. 발소리는 아니었다. 무언가 질척이는 것이 바닥을 기어가는 소리.
하린은 천천히 에너지 칼을 뽑았다. 푸른빛이 감도는 칼날이 희미하게 빛났다. 그녀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짜증이 앞섰다. 귀찮은 녀석.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폐기된 가구들이 나뒹구는 공간, 곰팡이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여 역겨웠다. 그리고 그 방 한가운데, 거대한 그림자처럼 웅크리고 있는 존재가 있었다.
“하필 이 타이밍에.”
그것은 흡사 거대한 지네 같았다. 여러 개의 다리가 꿈틀거리고, 등에는 뾰족한 가시가 돋아 있었다. 심연의 오염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부풀어 오른 눈알이 하린을 향해 붉게 번뜩였다. ‘변이 지네’였다. 놈은 허공에 주둥이를 치켜들고는 맹렬한 기세로 하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의 눈동자에 푸른 마법진이 번개처럼 스쳤다. 낡은 망토와 옷차림이 빛과 함께 재구성되었다. 푸른색과 은색이 어우러진 전투복으로 바뀌고, 손에 들린 에너지 칼은 더욱 선명한 빛을 뿜어냈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력이 공기를 압도했다.
“나를 우습게 보지 마!”
마법소녀, ‘광휘의 하린’이 강림했다.
변이 지네의 맹렬한 돌진을 옆으로 피하며, 하린은 칼을 휘둘렀다. 푸른빛이 섬광처럼 놈의 다리를 스쳤다. 찍! 역겨운 액체를 뿜어내며 놈의 다리 하나가 잘려 나갔다. 변이 지네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틀었다.
놈은 남아있는 다리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거대한 몸뚱이가 하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하린은 순식간에 푸른빛 방패를 소환했다. 쾅! 방패와 놈의 몸이 충돌하며 폐허 전체가 흔들렸다. 방패는 간신히 충격을 막아냈지만, 하린의 안색은 창백해졌다. 마력 소모가 컸다.
“이 빌어먹을 녀석!”
하린은 방패를 거두는 동시에 앞으로 내달렸다. 이번에는 놈의 머리를 노렸다. 에너지 칼을 찌르려는 순간, 변이 지네의 붉은 눈이 더욱 강렬하게 빛나더니, 놈의 등에서 돋아난 가시들이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쉭, 쉭, 쉭!
하린은 몸을 굴려 가시들을 피했다. 몇몇은 그녀의 팔과 다리를 스치며 옷을 찢었다.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상처는 아니었지만, 옷이 찢겨나가는 것이 짜증스러웠다. 이 옷도 고작 한 벌뿐인데.
마력을 집중했다.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푸른빛이 한층 더 강렬해졌다. 그녀는 가시 공격이 멈춘 틈을 타 다시 돌진했다. 이번에는 놈의 약점인 배를 노렸다. 빠르게 바닥을 미끄러지듯 이동하여 놈의 배 아래로 파고들었다.
“끝장내주겠어!”
하린은 온몸의 마력을 칼날에 실어 올렸다. 푸른빛이 거대한 칼날 형태로 증폭되었다. ‘광휘의 섬멸참!’ 그녀는 칼을 위로 맹렬히 찔러 올렸다. 퍽! 변이 지네의 물컹한 몸뚱이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놈의 몸에서 검붉은 피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끼아아아아악!
변이 지네는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치명상을 입은 놈은 몇 번 몸을 뒤틀더니 결국 축 늘어져 움직임을 멈췄다. 역겨운 악취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하린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전투복은 다시 낡은 망토와 옷으로 돌아왔다. 이마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손발이 후들거렸다. 마력을 과도하게 쓴 탓이었다. 이런 작은 변이체 하나 잡는 데도 이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살아남는다는 건 언제나 피를 말리는 일이었다.
“젠장, 정말 아무것도 없잖아?”
지친 몸을 이끌고 방을 다시 수색하기 시작했다. 변이 지네가 숨어 있던 곳이니 뭔가 먹을 것이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는 실낱같은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놈의 둥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썩어가는 고깃덩어리 몇 개뿐. 쓸모없는 것들이었다.
좌절감이 밀려왔다. 힘겹게 싸운 보람도 없이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 하린은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피로가 온몸을 짓눌렀다.
그때였다. 놈의 시체 아래, 바닥에 금이 간 틈새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정말 희미해서,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정도의 빛이었다. 하린은 무언가에 이끌린 듯 손을 뻗었다. 놈의 끈적한 체액을 걷어내고,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을 치웠다.
그 아래, 낡은 나무 상자 하나가 숨겨져 있었다. 상자는 오랜 세월을 버텨낸 듯 낡고 먼지가 가득했지만, 틈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여전히 신비로웠다. 하린은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작은 원통형 물체가 하나 놓여 있었다. 낡고 바래긴 했지만, 그 푸른빛은 여전히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그것은 ‘생명 핵’이었다. 과거 문명 시대에 쓰이던 생체 에너지를 압축한 코어. 보급 기지의 제네레이터를 다시 돌릴 수 있는 희망이었다.
하린의 입술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지독한 악취와 피비린내, 그리고 마력 고갈의 고통 속에서도, 이 작은 빛은 기적처럼 느껴졌다.
“이런 게 아직 남아있었다니…”
그때, 하린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소리가 들렸다. 끼이이익-! 아까 그 변이 지네보다 훨씬 굵고 거친 소리. 놈의 동료인가? 아니면 더 큰 녀석인가?
하린은 급히 상자를 닫고 생명 핵을 품에 안았다. 몸에서 마력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작은 변이체 하나도 제대로 상대하기 힘들 터였다.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쿵, 쿵, 쿵. 마치 폐허 전체를 울리는 듯한 묵직한 발소리였다. 하린은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도망칠 곳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도망칠 기력도, 시간도 없었다.
“젠장, 젠장, 젠장!”
하린은 품속의 생명 핵을 꽉 부여잡았다. 이 핵은 반드시 보급 기지로 가져가야 했다. 이곳의 모두를 위한 희망이었다. 그녀는 다시 눈을 감았다. 몸속 깊이 숨어 있는 마지막 마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냈다.
그녀의 몸에서 희미한 빛이 다시 피어올랐다. 낡은 망토와 옷은 푸른빛과 은색의 전투복으로 바뀌었지만, 그 빛은 아까보다 훨씬 약하고 희미했다. 칼날 역시 겨우 형체를 유지할 정도였다.
“그래, 이게 내 한계야.”
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아까 그 변이 지네보다 훨씬 크고 흉측한 모습이었다. 놈의 머리에는 여러 개의 붉은 눈들이 번득였다.
하린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손에 든 에너지 칼은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어.”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심장, 그 속에서 타오르는 작은 불씨 하나가 마지막 남은 마력을 끌어올렸다. 그 빛은 약했지만, 결코 꺼지지 않을 생존의 의지 그 자체였다. 이 황폐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빛나는 의지였다.
또 하루를, 반드시.
또 한 번의 새벽을, 반드시.
그녀는 자신과, 그리고 아직 살아있는 모든 이들을 위해, 마지막 힘을 짜내 전투태세를 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