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먼지가 춤추는 세상이었다. 아니, 잿빛 세상이 먼지 속에 파묻힌 것일지도 모른다. 강하리는 폐허가 된 상점가의 삐걱거리는 철골을 밟으며 깊은 한숨을 쉬었다. 찢어진 방진 마스크 아래로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망할. 오늘도 썩은 통조림 신세인가. 지겨워 죽겠네, 진짜.”
태양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그 빛은 더 이상 따스하지 않았다. 도시를 뒤덮은 거대한 구조물들의 그림자 아래로 희미하게 드리워진 회색빛이었다. 하리는 등 뒤에 멘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는 잔뜩 녹슨 건물 외벽에 붙은 표지판을 뚫어지라 응시했다. ‘푸른 희망 정수 시설’. 누가 언제 붙였는지 모를 낙서였다. 어쩌면 전설 같은 이야기일 수도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 중 하나. 이 도시 어딘가에, 완벽하게 작동하는 정수 시설이 남아있다는.
물론, 하리는 그런 허황된 이야기는 믿지 않았다. 그러나 마실 물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낡은 정보를 무시할 수도 없었다. 지난 사흘 동안 그녀가 마신 물이라고는 빗물 저장고에서 길어 올린 흙탕물뿐이었다. 그마저도 이제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발아래 깨진 유리 조각들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그녀의 눈은 부서진 상점 진열장 너머, 어둠 속에 잠긴 내부를 훑었다. 으스스한 냉기가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누군가 먼저 다녀갔는지, 아니면 이 건물이 그냥 오랫동안 폐허로 남아있었는지,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었다.
“젠장, 진짜 아무것도 없잖아?”
투박한 철문을 간신히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천장에서 덜렁거리는 녹슨 파이프가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먼지 가득한 복도를 지나 깊숙이 들어가자, 거대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설마. 하리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진짜라고?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돌자, 거대한 금속 덩어리들이 얽혀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중심에, 낡았지만 어딘가 반짝이는 패널이 보였다. 정수 시설! 하리는 숨을 헐떡이며 달려갔다. 패널을 손으로 쓸자, 먼지가 묻어나왔다. 전원 버튼을 누르자, 희미한 불빛이 깜빡였다.
“돼, 된다!”
환호성을 지르려는 찰나, 발아래에 뭔가 ‘틱’ 하고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하리가 아래를 내려다본 순간, 바닥에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투명한 낚싯줄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낚싯줄에 연결된 건… 깡통 수류탄.
“젠장!!!”
외마디 비명과 함께 하리는 본능적으로 몸을 던졌다. 콰아앙! 폭발음이 귓가를 때렸고, 동시에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등 뒤를 스쳤다. 날아드는 파편을 겨우 피했지만, 폭발의 충격파는 하리의 몸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온몸이 쑤셨고, 귀에서는 이명이 울렸다.
“콜록, 콜록… 누가 이딴 함정을…”
억지로 몸을 일으킨 하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몸이 제대로 가누어지지 않았다. 엉망진창이 된 몰골로 패널을 바라보니, 폭발의 여파로 전원 불빛마저 꺼져 있었다. 희망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때였다. 잿빛 먼지 사이로, 길고 단단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리가 고개를 들자, 실루엣 너머로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방진복을 입고, 얼굴에는 낡은 고글과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등에는 거대한 저격총으로 보이는 장비를 메고 있었다. 그저 그림자 같았다.
하리는 그를 경계하며 뒷걸음질 쳤다. “누구… 누구세요?”
남자는 말없이 하리를 응시했다. 그의 시선은 하리의 엉망이 된 옷차림과 상처투성이의 팔을 훑는 듯했다. 그리고는 툭,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함정, 밟지 말랬을 텐데.”
하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뭐… 뭐라고요?”
“방금 전, 건물 입구에 경고 표식을 붙여뒀었다.” 남자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글을 읽을 줄 모르는가?”
하리의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이, 아저씨! 누가 여기 경고 표식을 붙인대요? 그리고 누가 아저씨한테 말을 그렇게 싸가지 없이 하래요!”
남자는 대꾸 없이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손에 들린 커다란 도구 가방이 스산한 소리를 냈다. 그는 폭발로 인해 떨어져 나간 정수 시설 패널의 잔해를 툭툭 건드렸다.
“쓸모없어졌군. 한 시간만 더 일찍 왔어도 고칠 수 있었을 텐데.”
“뭐라고요?!” 하리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누구 때문에 쓸모없어진 건데요?”
남자는 하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고글 너머로 그의 눈이 보이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비웃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내 잘못인가?”
“그럼 누구 잘못인데요! 아저씨가 경고 표식만 제대로 달아놨어도! 아니, 그 이전에 그런 함정을 왜 설치하는 건데요?” 하리는 분을 참지 못하고 쏘아붙였다.
남자는 한참을 하리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바닥에 떨어진 깡통 수류탄의 잔해를 발로 툭 밀었다. “생존 방식이다. 그리고 그 경고 표식은 내가 보기에 충분히 눈에 띄게 달아뒀다.”
“아무리 그래도…” 하리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남자의 무덤덤한 태도에 오히려 말문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정수 시설은 이 부근에 딱 하나 남아있었다.” 남자는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했다. “하지만 이제 사라졌다. 물은 당분간 없을 거다.”
하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럼 이제 어떡하라는 거예요? 목말라 죽으라는 말이에요?”
“그건 네 사정이다.” 남자는 정말 매정하게도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려는 듯했다.
“잠깐만요!” 하리는 다급하게 그를 붙잡았다. “아저씨는 그럼 물 어떻게 구하는데요? 아저씨가 여길 지키고 있었던 거면, 아저씨도 이 정수 시설 쓰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남자는 멈춰 섰지만,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나에게는 다른 방법이 있다.”
“다른 방법이 뭔데요?” 하리는 필사적이었다. “알려주면 안 돼요? 저도 죽을 수는 없잖아요!”
남자는 마침내 고개를 돌렸다. 고글 너머로 그의 얼굴 절반이 드러났는데, 의외로 젊은 턱선과 굳게 다문 입술이 보였다. 그의 시선은 하리의 배낭에 박혔다. “네 배낭에, ‘에너지 바’ 몇 개와 ‘응급 처치 키트’가 보였다.”
하리는 자기 배낭을 힐끗 보았다. 언제 봤는지 모를 정도로 정확한 그의 관찰력에 소름이 돋았다. “어… 네, 뭐 좀 있긴 한데…”
“나는 물을 구할 수 있다.” 남자가 말했다. “너는 나에게 그 물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리는 잠시 망설였다. 그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지금으로서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이 싸가지 없는 남자와 동행해야 한다니.
“얼마나 오래 걸릴 건데요?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물을 줄 건데요?” 하리는 바싹 마른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이틀. 그리고 네가 만족할 만큼.” 남자는 의외로 관대한 대답을 내놓았다. “물론,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 없이 깨끗한 물이다.”
하리는 그의 말을 믿어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좋아요. 좋아요! 그럼 저도 동행하겠다는 건데…”
“정시우.” 남자가 툭 던지듯 말했다. “내 이름이다. 너는?”
“강하리요.” 하리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그런데 시우 씨, 혼자서 그렇게 잘 다니세요? 이 위험한 세상에?”
정시우는 하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혼자가 익숙하다.”
“그래봤자 둘이 더 안전한 법인데.” 하리는 투덜거리며 그를 뒤따랐다. “그리고 아까 그 함정 설치한 거, 시우 씨 맞죠? 인정 좀 해요!”
정시우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하리는 그의 뒤를 졸졸 따라가며 계속해서 질문을 쏟아냈다. 그가 대꾸하든 말든, 하리는 지치지 않고 떠들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정적 속에 갇힌 폐허에 활기를 불어넣는 듯했다.
***
이틀 후, 그들은 거대한 지표면 균열 근처에 있는 지하수로 입구에 도착했다. 정시우는 능숙하게 자물쇠를 해제하고, 하리는 옆에서 그를 도왔다. 삐걱거리는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와… 진짜 이런 곳이 있다니.” 하리는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곳이지.” 정시우가 말했다. “이제 곧 나올 거다.”
그의 말대로, 조금 더 들어가자 지하수가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리가 랜턴을 비추자, 투명한 물줄기가 바위틈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맑고 깨끗한 물이었다. 하리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대박! 진짜 깨끗한 물이다! 와, 시우 씨, 진짜 고마워요!”
하리는 배낭을 벗어던지고는 재빨리 물통을 꺼내 물을 담았다. 그리고는 물통을 기울여 벌컥벌컥 마셨다. 차가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자, 온몸의 세포들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정시우는 그런 하리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고글을 벗은 그의 얼굴은 의외로 깔끔하고, 깊은 눈매는 어딘가 모르게 차분했다.
“진짜 살 것 같아요…” 하리는 물통을 내려놓고 정시우를 바라보았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정시우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을 하리는 놓치지 않았다.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그가 말했다.
하리는 흠칫했다. “아, 맞다! 그럼 배낭에 있는 에너지 바랑 구급 키트 다 드릴게요!”
“아니.” 정시우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내가 이미 가져갔다. 네가 나에게 갚을 빚은 다른 것이다.”
하리는 당황했다. “네? 그럼 뭔데요? 제가 뭘 또 줄 게 있다고…”
정시우는 하리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리고는 그녀의 옆에 있던 빈 물통을 집어 들었다.
“나는 혼자가 익숙했다.”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 너의 시끄러운 잔소리가 익숙해졌다.”
하리는 그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게 무슨…”
정시우는 물통을 하리의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물은 계속 나올 거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물을 구할 방법을 알고 있다.”
하리는 그의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왠지 모르게 따뜻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계속 같이 다니자는 말이에요?” 하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시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고글을 다시 쓰고는 어둠 속으로 먼저 걸어갔다.
“저기요! 시우 씨! 그럼 저도 함부로 버리지 말라고 경고 표식 달아줘요! 그리고 함부로 버리지 않을 거라는 약속도 해줘요!” 하리는 투덜거리면서도 피식 웃었다.
그녀는 빈 물통을 꽉 쥐고는 정시우의 뒤를 따라 걸었다. 지하수로를 벗어나 폐허가 된 지상으로 다시 나왔을 때, 석양이 잿빛 도시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에, 하리의 발걸음은 조금 더 가벼워졌다.
세상은 여전히 황폐했지만, 그들의 앞에는 물이 있었고, 그리고 서로가 있었다. 어쩌면 그게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생존 물품일지도 몰랐다. 최소한 하리에게는 그랬다. 그리고 정시우도, 아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물론, 그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겠지만. 그녀는 앞으로 그의 입에서 그런 말을 끌어내기 위해 더 열심히 잔소리할 작정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