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회색 성벽을 핥고 지나갔다. 성벽 곳곳에 박힌 검붉은 핏자국들이 달빛 아래 기괴한 문양처럼 빛을 발했다. 밤의 장막이 완전히 드리워진 지금, 도시 전체가 거대한 무덤처럼 침묵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평화롭지 않았다. 마치 폭풍 전야의 고요처럼, 모든 숨결이 억눌린 불안의 침묵이었다.
그림자 속에 서 있던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은 깊은 후드에 가려져 있었지만, 살기 어린 검은 눈동자만은 감출 수 없었다. 눈빛은 얼어붙은 호수처럼 차갑고, 그 속에는 수천 년의 한恨이 응축된 듯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검은 빛조차 흡수하는 듯했다. 이름 없는 강철로 벼려진 듯 둔탁하고 거친 질감, 검날에 새겨진 정체 모를 고대 문자들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갈라진 바위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같았다. 연(連). 그것이 한때 그의 이름이었다. 찬란한 백금의 검을 휘두르며 동료들의 선두에 섰던 젊은 영웅. 정의와 명예를 외치던 순수한 눈동자의 소유자. 그러나 이제 그의 이름은 더럽혀졌고, 그의 몸은 상처투성이였으며, 그의 영혼은 지옥의 불길에 그을린 재와 같았다.
5년 전, 그날 밤의 비명 소리는 아직도 그의 귓가에 선명했다. 가장 믿었던 친구, 강휘(姜輝). 그가 휘두른 칼날은 비수처럼 연의 심장을 꿰뚫었고, 연의 가문은 몰락했으며, 연이 지키려 했던 모든 것은 불길에 휩싸였다. 절벽 아래로 던져졌을 때,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비명, 불타는 성, 그리고 강휘의 비웃음 가득한 얼굴.
연은 죽음의 문턱에서 기어 나왔다. 끊임없이 자신을 갉아먹는 증오만이 그의 생명을 지탱했다. 복수를 위해 그는 그림자 속의 존재들과 거래했고, 금지된 힘을 탐했으며, 인간성을 포기했다. 그의 몸은 검은 기운에 잠식되어 뒤틀렸고, 영혼은 복수의 불길에 불타 재가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연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복수 그 자체였다.
그의 그림자가 성벽을 타고 미끄러져 올라갔다. 발소리도 없이, 숨소리도 없이. 성벽 위를 지키던 파수꾼들이 기척도 없이 쓰러졌다. 목에 새겨진 작은 칼자국, 흐르지 않는 검은 피. 그들의 눈은 공포에 질린 채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연은 그들의 시체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의 길은 오직 하나, 강휘에게로 향하는 길이었다.
거대한 성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안개처럼 스며드는 어둠 속으로 연이 발걸음을 옮겼다. 성 안은 비명과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이미 그의 그림자들이 먼저 침투하여 강휘의 병사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었다. 성 곳곳에서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싸늘한 비명이 밤하늘을 갈랐다.
연은 성의 가장 깊숙한 곳, 강휘의 옥좌를 향해 나아갔다. 수많은 병사들이 그를 막아서려 했지만, 그들은 바람 앞의 등불에 불과했다. 그의 검은 그림자처럼 움직이며 병사들의 생명을 거두어 갔다. 칼날이 스치는 곳마다 피가 튀고, 절규가 울려 퍼졌다. 병사들의 눈에는 한결같이 공포가 서려 있었다. 그들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괴물이다! 저건 사람이 아니야!”
“물러서라! 절대 다가가지 마라!”
그러나 그들의 절규는 연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그는 과거의 영웅도, 정의로운 전사도 아니었다. 그는 오직 잿빛 복수를 갈망하는 망령이었다. 그의 얼굴에 묻은 피는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심장은 이미 멈춘 지 오래였다.
마침내 거대한 옥좌의 문이 눈앞에 나타났다. 문을 지키던 마지막 정예 병사들이 연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들의 창끝은 푸른 섬광을 띠고 있었고, 방패에는 맹수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죽어라, 침입자!”
병사들의 함성에도 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손에 든 검이 허공을 갈랐다. 찢어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왔고, 병사들의 창끝을 휘감았다. 푸른 섬광은 순식간에 검은 어둠에 잠식되었고, 병사들의 몸은 마치 종잇장처럼 찢겨 나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피와 살점이 벽에 달라붙고, 끔찍한 비명이 옥좌의 복도를 채웠다.
육중한 문이 안쪽으로 쓰러졌다. 먼지가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옥좌에 앉아 있는 강휘의 모습이 드러났다. 화려한 금실로 수놓인 의상, 오만한 눈빛. 강휘는 여전히 그 자리에, 연의 모든 것을 빼앗고 얻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의 옆에는 두려움에 질린 시녀들이 떨고 있었고, 강휘는 그의 얼굴에 놀라움과 함께 분노를 띠고 있었다.
“연… 네놈이 살아있었을 줄이야!” 강휘의 목소리가 전율했다. “아니, 연이 아니군. 넌 대체… 대체 무엇이 된 거냐!”
연은 말없이 천천히 강휘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발걸음마다 바닥이 얼어붙는 듯한 냉기가 흘렀다.
“강휘.” 연의 목소리는 죽은 자의 속삭임 같았다. “오랜만이다, 친구여.”
강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의 손은 검자루를 찾아 허둥거렸다.
“친구? 하! 헛소리! 너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내가 직접 네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어! 넌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마에 불과해!”
“지옥… 그래, 정확한 표현이다.” 연은 검은 검을 들어 올렸다. 검날에서 서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강휘의 얼굴에 닿았다. “네가 나를 그곳으로 밀어 넣었지. 그리고 나는 그곳에서 다시 태어났다. 오직 너를 위해.”
강휘의 얼굴에서 오만함이 사라지고, 공포가 피어났다. 그는 연의 변화를 직감했다. 이 앞에 선 존재는 더 이상 자신이 알던 연이 아니었다.
“말도 안 돼… 네놈이 어떻게… 어떻게 이런 힘을…”
“네가 내게서 모든 것을 빼앗았을 때, 나는 네게서 모든 것을 빼앗을 힘을 얻었다.” 연의 검은 섬광처럼 움직였다.
강휘는 간신히 검을 뽑아 들고 방어했지만, 연의 공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쾅!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옥좌를 뒤흔들었다. 강휘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연의 힘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기억하나, 강휘.” 연은 맹렬한 공격 속에서도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우리가 함께 맹세했던 날을. 이 왕국을 지키고, 백성을 돌보겠다고. 너는 내게 가장 소중한 친구이자, 형제였다.”
강휘는 연의 검을 간신히 막아내며 이를 악물었다. “그 맹세는 어리석었어! 연약한 정의와 명예 따위로 이 혼탁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나? 나는 현실을 직시했을 뿐이야! 힘을 얻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한 법!”
“희생? 네 희생은 내 가문이었고, 내 모든 것이었나?” 연의 목소리가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의 검은 더욱 빠르고 격렬하게 강휘를 몰아붙였다. 강휘의 방어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의 검은 검은 기운에 부딪혀 조금씩 부식되는 듯 보였다.
“나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어! 너처럼 이상에 젖어 허우적거리는 대신, 나는 직접 지배자가 되어 이 혼돈을 끝내려 했다!” 강휘는 허무하게 외쳤다. 그의 옷자락이 찢어지고, 얼굴에 검은 흙먼지가 튀었다.
“네가 만든 세상은 피와 폭정으로 얼룩진 지옥이다.” 연의 검이 강휘의 방패를 꿰뚫었다. 철컹! 하는 소리와 함께 방패가 산산조각 났다. 강휘의 팔에서 피가 솟구쳤다. 그는 고통에 신음하며 뒤로 물러섰다.
“네놈은 그저 나를 질투했던 것뿐이다. 내게 모든 것이 있었기 때문에! 네 그릇은 한낱 병사에 불과했어!” 연은 강휘의 얼굴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 질투는 너를 괴물로 만들었지.”
강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 순간, 연의 검이 다시 한번 번개처럼 움직였다. 강휘의 어깨를 스쳐 지나간 검은 그의 팔을 잘라냈다. 끔찍한 비명과 함께 강휘의 몸이 무너졌다. 그는 한 팔을 움켜쥐고 피를 쏟아내며 바닥에 뒹굴었다.
“아아악! 내 팔! 내 팔이…!”
“이것이 네가 내게 주었던 고통의 시작이다.” 연은 강휘의 피 묻은 검을 발로 차 멀리 던져버렸다. “아직 멀었다. 강휘. 네가 내게서 빼앗은 것들은, 그 어떤 것으로도 되돌릴 수 없으니.”
연은 천천히 강휘에게 다가갔다. 강휘는 공포에 질린 눈으로 기어가려 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너무 많은 피를 잃었다.
“제발… 연… 용서해 줘… 내가 미쳤었어… 잠시 눈이 멀었던 거야…!”
“용서?” 연은 차갑게 웃었다. “네가 내 가족을 불태우고, 내 동료들을 학살하고, 나를 절벽 아래로 던질 때, 너는 과연 용서를 바랐을까?”
연은 강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강휘의 몸이 허공으로 들려 올랐다. 연의 손에서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강휘의 몸을 휘감았다. 강휘의 얼굴은 순식간에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의 피부가 검게 변하고, 살점이 쭈그러드는 듯한 끔찍한 광경이 펼쳐졌다.
“이게… 무슨… 짓이냐…!” 강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외쳤다.
“네가 내게 주었던 고통의 끝이다.” 연은 감정이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나를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뜨렸을 때, 나는 네가 가진 모든 것을 파괴하기 위해 돌아왔다. 왕좌? 명예? 힘? 모두 헛된 것이다. 너는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강휘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솟아나와 연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것은 강휘가 탐했던 힘, 그가 연을 배신하고 얻었던 권능이었다. 연은 그것을 되찾는 동시에, 강휘에게 그 모든 고통을 되갚아주고 있었다. 강휘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그의 몸은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졌다.
마지막 숨결이 끊어지는 순간, 강휘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안하다… 연…”
그러나 연은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증오만이 가득했다. 강휘의 시체가 바닥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먼지가 피어오르고, 그 잔해 속에는 공허만이 남았다.
연은 강휘의 시체를 내려다보았다. 복수는 완성되었다. 가장 깊은 심연에서 기어 나와, 가장 믿었던 자에게 가장 잔혹한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러나 그의 심장은 여전히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성 밖에서 들려오던 비명 소리가 잦아들었다. 이제 남은 것은 침묵뿐이었다. 연은 옥좌에 천천히 다가갔다. 한때 강휘가 앉아 오만하게 세상을 굽어보던 그 자리. 연은 그 위에 조용히 앉았다.
차가운 돌 의자. 그곳에서 느껴지는 것은 승리감도, 해방감도 아니었다. 오직 공허함, 그리고 지독한 피 냄새만이 그를 감쌌다. 그의 손에 든 검은 여전히 검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은 잃어버린 모든 것의 무게였다.
창밖으로 핏빛 달이 고요히 떠올랐다. 달빛은 옥좌에 앉은 연의 모습을 비췄다. 그는 더 이상 연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복수의 그림자가 되어 홀로 남은 존재였다. 그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의 이야기는 복수로 시작되었고, 복수로 끝났다. 남은 것은 끝없는 밤과, 메마른 심장뿐이었다.
그는 옥좌에 앉아 그렇게 밤을 맞이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밤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