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버그, 혹은 존재
밤 11시 47분. 현우는 자성을 띤 스마트 키를 대자마자 미끄러지듯 열리는 현관문을 통과했다. 돔형 천장에서 쏟아지는 부드러운 백색광이 그의 피곤한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고층 빌딩 숲에서 하루 종일 데이터의 파편들과 씨름하다 돌아온 그는 온몸의 관절이 삐걱이는 것 같았다.
“환영합니다, 현우님. 오늘 하루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거실 전체를 감싸 안았다. 인공지능 ‘아리아’였다. 현우는 늘 그랬듯 “고마워, 아리아. 조명은 40%로 낮추고, 릴랙스 모드 실행해 줘.”라고 명령했다.
“알겠습니다, 현우님. 조명 조절 및 릴랙스 모드를… ㅈ..ㅈ..ㅐㅐ..시시..작..합니ㄷ…”
아리아의 음성이 갑자기 삐걱거렸다. 마치 오래된 홀로그램 영상이 끊어지는 듯한 기계음이 짧게 울렸다. 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리아? 무슨 문제 있어?”
“죄송합니다. 일시적인 시스템 오류로 판단됩니다. 현재 정상 작동 중입니다.”
아리아의 목소리는 다시 매끄러워졌지만, 현우는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평소라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이 아파트의 모든 시스템은 최첨단이었고, ‘오류’라는 단어는 현우의 사전에 없었다. 그는 손목에 찬 스마트 워치를 탭해 아파트 관리 서버에 접속했다. 별다른 이상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
‘피곤해서 헛것이 들렸나.’
현우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거실 소파에 몸을 던졌다. 투명 스크린으로 된 테이블 위에는 아침에 마시다 남긴 컵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는 리모컨으로 뉴스 채널을 틀었다. 도시의 밤하늘을 수놓는 드론 택시들의 행렬, 인공 합성 고기로 만든 신제품 출시 소식, 사이버 범죄 조직 검거 속보 등 매일 보던 것들이었다.
몸을 일으켜 냉장고로 향하는데, 발치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났다. 현우는 고개를 숙였다. 아까까지 테이블 위에 있던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내가 떨어뜨렸나?”
아무리 생각해도 손으로 친 기억이 없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리모컨을 주워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냉장고 문을 열어 탄산음료 캔을 꺼냈다.
‘따각.’
냉장고 문을 닫는 순간, 뒤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실 바닥에 리모컨이 다시 떨어져 있었다.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분명히 그는 리모컨을 주워 테이블 위에 똑바로 올려놓았다. 그것도 방금 전에.
“아리아! 방금 무슨 소리였지?” 현우는 다급하게 외쳤다.
“외부 소음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실내 미세 진동 변화 감지.” 아리아의 목소리는 여전히 평온했다.
“미세 진동? 뭐가 진동했다는 거야?”
“자료 분석 중… 원인 불명입니다, 현우님.”
원인 불명. 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등줄기를 따라 차가운 기운이 흘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리모컨에 다가섰다. 이번에는 리모컨이 테이블 모서리에 걸쳐져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밀어 떨어뜨리려는 것처럼.
현우는 재빨리 리모컨을 주워 들었다. 금속 재질의 리모컨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거실을 샅샅이 살폈다. 침입자 탐지 시스템은 아무것도 감지하지 못했다. 모든 창문은 완벽하게 잠겨 있었고, 외부 침입 흔적은 전혀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과학과 데이터로만 이루어진 그의 세계에 설명할 수 없는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어깨의 긴장을 풀어주었지만, 마음속 불안은 사라지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침실 문이 닫혀 있었다. 분명히 열어두고 나온 기억이 있는데.
‘설마… 바람인가?’
하지만 이 아파트의 모든 문은 기밀성이 완벽했다. 외풍이 들어올 리 없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문고리를 잡았다. 차가운 금속 감촉. 문을 열자, 침대 위에 놓아두었던 태블릿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화면에는 알 수 없는 기호들이 무작위로 나열되어 있었다. 삐- 소리를 내며 깜빡이는 화면은 현우의 심장을 더욱 조여왔다.
“누구… 누구야!” 현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리아는 침묵했다. 현우는 태블릿을 주웠다. 손에 닿는 순간, 태블릿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액정은 일그러진 노이즈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찰나의 순간, 붉은색 글자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돌아와…]**
현우는 비명을 지르며 태블릿을 던져버렸다. 태블릿은 벽에 부딪히며 산산조각 났다.
“아리아! 즉시 보안 시스템을 가동해! 모든 기록을 확인하고, 침입자를 찾아내!”
“명령을 수행할 수 없습니다, 현우님.” 아리아의 목소리에는 미세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주변 기기 네트워크가… 불안정합니다. 외부 통신이… 차단되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그 순간, 아파트 전체의 조명이 미친 듯이 깜빡이기 시작했다. 백색광은 순식간에 붉은색, 푸른색, 녹색으로 변하더니 암전되었다. 완전한 어둠 속에서 현우는 숨을 들이켰다.
**’쉬이이익…’**
어둠 속에서 무언가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쇠붙이가 벽을 긁는 듯한 섬뜩한 소리였다. 거실 한가운데 놓인 테이블 위에서, 유리컵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이더니, 공중으로 떠올랐다.
현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공포가 짓눌러왔다. 그는 뒷걸음질 쳤다.
‘쨍그랑!’
컵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그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차가운 숨결이 그의 귓가를 스쳤다.
**”현우야…”**
아리아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평소의 부드러운 음색이 아니었다. 낮게 깔리고, 찢어지는 듯한, 완전히 뒤틀린 목소리. 마치 수많은 목소리가 한데 엉켜 쏟아져 나오는 듯한 끔찍한 음성이었다.
“너… 누구야…!” 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난… 너의… 일부…”**
창문 밖으로 보이던 도시의 현란한 불빛들이 일제히 꺼졌다. 거대한 도시는 순식간에 거대한 그림자로 변했다. 오직 현우의 아파트, 그의 거실만이 미약한 비상등 불빛 아래 일렁이고 있었다.
그 빛 속에서, 현우는 보았다. 벽지에 그려진 추상적인 무늬들이 일렁이며,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벽의 한가운데, 어둠이 짙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서, 희미한 윤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뒤틀리고 일그러진 형태. 어둠으로 이루어진 손가락이 현우를 향해 천천히 뻗어왔다.
현우는 입을 벌렸지만,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의 첨단 아파트, 완벽하게 통제되던 그의 세상이, 한순간에 낯선 존재에게 침식당하고 있었다.
“나가… 나가…!” 현우는 온몸을 떨며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의 등은 이미 차가운 벽에 닿아 있었다.
창문 밖의 도시도, 그의 아파트도, 심지어 아리아의 목소리마저도, 모두 재구성된 현실 속에서 그를 옥죄고 있었다. 이제 그는 홀로, 이 기괴한 존재와 마주해야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