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틱 코미디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 챕터 1. 내 모든 것을 훔친 너에게

2024년 10월 27일,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순간이자, 동시에 가장 비참하게 부서진 날. 나는 그날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날, 나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배신당했다. 그리고 내 모든 것을 잃었다.

“지혜야! 준비 다 됐어? 너 오늘 주인공이잖아!”

활짝 열린 사무실 문틈으로 유진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이어 사과머리를 한 채 방긋 웃는 유진의 얼굴이 빼꼼 나타났다. 큼지막한 눈을 가득 접으며 웃는 모습은 언제 봐도 사랑스러웠다.

“응, 거의 다 됐어! 이거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볼게.”

나는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흔들었다. 유진은 그런 나를 보며 “긴장돼?” 하고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젓고는 씨익 웃었다.

“긴장은 무슨. 자신감 뿜뿜이지! 그동안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우리’라는 말에 유진의 눈썹이 살짝 찡긋했지만, 이내 다시 환하게 웃었다.

“맞아! 지혜 네가 밤새워가며 만든 기획안이야. 당연히 성공할 거야.”

유진의 목소리에는 진심 어린 응원이 담겨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료를 저장했다. 지난 6개월간, 정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새벽녘까지 이어지는 야근은 기본이었고, 주말도 반납한 채 오직 이 프로젝트에만 매달렸다. 회사의 신사업을 책임질, 이른바 ‘블루오션’ 개척 프로젝트. 내가 직접 발로 뛰며 시장을 분석하고, 아이디어를 구체화했으며, 유진은 그런 나의 든든한 조력자였다.

유진은 내 가장 오랜 친구이자, 직장 동료였다. 대학교 때부터 늘 붙어 다녔고, 졸업 후에는 기적처럼 같은 회사에 입사했다. 서로의 첫사랑을 공유했고, 힘들 때는 어깨를 빌려주었으며, 성공을 꿈꿀 때는 서로를 응원했다. 그런 유진이 있었기에 힘든 회사 생활도 버틸 수 있었다.

“자, 이제 진짜 갈 시간! 강 이사님 벌써 내려오셨대.”

유진이 내 팔을 잡아끌며 재촉했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늘 PT만 잘하면, 나는 꿈에 그리던 신사업팀 팀장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나의 오랜 꿈, 내 미래가 오늘 결정되는 것이다.

강당으로 향하는 복도는 평소와 달리 조용했다. 모두가 PT의 성공을 간절히 바라는 분위기였다. 유진은 내 옆에 바싹 붙어 걸으며 손을 꽉 잡았다.

“지혜야, 떨지 마. 너니까 잘할 거야.”

그 말에 나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역시 유진밖에 없어.

강당 문이 열리고, 나는 안으로 발을 들였다. 수십 명의 임원들과 관계자들이 앞자리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로 향하는 것을 느꼈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준비된 자리로 향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내가 앉아야 할 자리에는 이미 누군가 앉아 있었고, 내 PT 자료가 올라가 있어야 할 연단에는 다른 자료가 놓여 있었다. 의아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자, 강 이사가 나를 보며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지혜 씨, 여기는 무슨 일입니까? 아직 PT 시작도 안 했는데.”

“네? 시작이요… 제 PT는 10분 뒤인데요.”

내 말에 강 이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그때, 연단의 대형 스크린에 익숙한 로고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옆에, 익숙한 이름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블루오션 개척 프로젝트 – 기획: 이유진’

순간 머리가 띵했다. 심장이 발밑으로 쿵 하고 떨어지는 것 같았다. 스크린 아래에 서 있는 사람은 바로 유진이었다. 그녀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임원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신사업팀 팀장 이유진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저희 회사의 미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진의 목소리가 강당에 울려 퍼졌다. 내 목소리와 똑같이, 하지만 훨씬 더 자신감 넘치는 어조로.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유진은 마치 연습이라도 한 듯 능숙하게 PT를 시작했다. 스크린에 뜨는 자료들은 내가 밤새워 만들었던 그래프와 문구, 그리고 이미지들이었다. 내 아이디어, 내 노력, 내 꿈, 모든 것이 고스란히 유진의 이름 아래 놓여 있었다.

내 옆에 서 있던 유진이, 아니, 내 옆에서 ‘신사업팀 팀장 이유진’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 내게 보여주었던 걱정스러운 표정 대신, 알 수 없는 비웃음과 싸늘한 승리감이 서려 있었다.

“유진아… 이게 무슨….”

나는 굳어버린 목소리로 간신히 속삭였다. 하지만 유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지혜야, 너 설마 아직도 나한테 감정 이입하고 있는 거야? 농담은 그만하고, 이제 네 자리로 가서 앉아.”

농담? 지금 유진이 나에게 농담이라고 했다. 나의 모든 것을 훔쳐 놓고.

나는 유진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고 싶었다. 소리 지르고 싶었다. ‘이건 내 거야! 네가 감히 내 것을 훔쳐?’ 하지만 내 몸은 마치 거대한 바위에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임원들의 시선이 이제는 유진이 아닌 나에게로 향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여자 뭐야?”
“이유진 팀장님 PT 방해하는 건가?”
“아니, 분위기 왜 이래?”

강 이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혜 씨!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중요한 PT 중에!”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유진을 노려볼 뿐이었다. 유진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내 시선을 피하며 다시 PT에 집중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졌고, 임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PT가 끝났다. 강당 안은 박수갈채로 가득 찼다. 임원들은 너도나도 유진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하고 칭찬을 건넸다. 유진은 그 모든 관심과 찬사를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원래 그녀의 것이었던 것처럼.

나는 강당을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복도에 서 있던 사람들이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들의 시선이 칼날처럼 내 살을 찢는 것 같았다.

탕비실에 들어서자, 몇몇 직원이 나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대화를 멈추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동정심과 비웃음이 뒤섞여 있었다. 내가 없는 동안, 이미 회사에는 모든 소문이 퍼졌을 터였다. ‘이유진이 김지혜의 기획안을 훔쳐 팀장 자리를 꿰찼다’는 잔인한 진실.

찬물 한 잔을 들이켰다. 얼음이 쨍그랑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내 인생을 걸었던 프로젝트, 내 가장 소중한 친구, 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그때, 탕비실 문이 열리고 유진이 들어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지혜야, 너 괜찮아?”

괜찮냐고? 네가 내 모든 걸 훔쳐 놓고, 괜찮냐고 묻는 거야?

나는 유진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내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 속에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왜 그랬어, 유진아?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유진은 어깨를 으쓱하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왜긴? 내가 더 잘할 수 있으니까. 너, 너무 순진하잖아. 이렇게 좋은 기획안을 그냥 흘려보낼 생각이었어? 난 네 덕분에 팀장 자리도 얻고, 신사업 프로젝트도 맡게 됐어. 고맙다, 친구.”

그녀의 눈빛은 차가웠다. 마치 얼음 칼날 같았다. ‘친구’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내 심장을 꿰뚫었다.

“넌… 넌 사람이 아니야. 어떻게 친구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 말에 유진은 픽 웃었다.

“친구? 지혜야, 우리는 이미 경쟁자였어. 너만 몰랐지. 이제라도 정신 차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

그녀의 말은 비수였고, 독이었다. 내 모든 자존감과 신뢰를 산산조각 내는 말.

나는 유진의 뺨을 때리고 싶었다. 아니, 그보다 더 잔인하게 그녀를 망가뜨리고 싶었다. 하지만 내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내 온몸은 배신감과 슬픔, 분노로 얼어붙어 있었다.

“내가…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으니….”

나는 으스러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유진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나는 고개를 들어 유진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내 눈에는 이미 모든 눈물이 말라버린 지 오래였다. 그 자리에는 차가운 결의만이 남아 있었다.

“내가 널 이렇게 만들었으니, 넌 나에게 모든 것을 갚게 될 거야. 내가 널 끌어올린 만큼, 네가 가진 모든 것을 잃게 될 거야. 내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거야.”

내 말을 들은 유진의 얼굴에서 비로소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의 눈에 경멸과 함께 미세한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김지혜, 너 지금 나 협박하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뒤돌아서 탕비실을 나섰다. 내 발걸음은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았다. 갈 곳은 정해졌다. 이 회사, 이 빌딩, 이 도시에서 유진이라는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회사 현관을 나서자, 차가운 가을바람이 내 얼굴을 후려쳤다. 붉게 물든 단풍잎들이 길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마치 피 흘리는 심장 같았다.

나는 걷고 또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그저 이 모든 악몽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벗어날 수 없었다. 내 귓가에는 유진의 비웃음과 임원들의 박수 소리가 맴돌았다.

“어이쿠! 앞 좀 보고 다니시죠.”

누군가와 부딪혔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커피가 내 옷과 그 사람의 옷에 튀었다.

“죄송합니다….”

고개를 들자, 눈앞에는 키 크고 잘생긴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젖은 셔츠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다문 입술은 마치 조각상처럼 완벽했다. 하지만 그 눈빛은 너무나도 차가웠다.

“하아… 내 한정판 셔츠인데. 이거 세탁비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그의 목소리도 차가웠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짜증과 함께 경멸이 서려 있었다. 마치 내가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오물이라도 되는 듯.

오늘,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친구도, 꿈도, 자존심도. 그리고 이제는 이름 모를 이 남자에게까지 경멸당해야 했다. 내 인생은 바닥을 쳤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었다.

하지만 바로 그 바닥에서, 아주 작은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다. 이 모든 것을 되갚아 줄 때까지는.

나는 젖은 눈으로 남자를 응시했다.

“얼마면 돼요?”

내 목소리는 떨리지 않았다. 오히려, 칼날처럼 단단했다. 남자의 눈썹이 살짝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요?”

“세탁비요. 얼마면 되냐고요.”

나는 삐딱하게 고개를 들었다. 내 심장은 배신감과 분노로 뜨겁게 타오르고 있었다. 이 비참함 속에서도, 나는 결코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 유진, 그리고 나를 이렇게 만든 모든 것들에게, 나는 반드시 복수할 것이다. 피눈물 흘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나는 다시 일어설 것이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이것은 나의 시작이었다. 처절한 복수극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 모든 고통의 끝에서 예상치 못한 사랑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아주 희미한 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오직 복수만을 꿈꾸는 한 마리 맹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