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밤 11시 37분. 지우는 모니터 불빛 아래서 마지막 시안을 수정하고 있었다. 서울의 고층 빌딩 숲 속, 그의 18층 아파트 창밖으로는 수많은 불빛들이 거대한 별자리를 이룬 채 반짝였다. 키보드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만이 적막한 거실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익숙한 도시의 밤은 평화로웠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그랬다.

“으음, 이 정도면 됐겠지.”

지우는 기지개를 켜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는데, 탁,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 위 연필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뾰족한 심이 박살나며 나무 조각이 파편처럼 튀었다. 지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분명 연필을 책상 한가운데 두었었다. 오래된 책상이라 조금 기울어졌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굴러 떨어진 연필을 주워 쓰레기통에 버렸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한결 몸이 가벼웠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왔을 때였다. 맞은편 벽에 걸린 전신 거울이 살짝 삐뚤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위쪽 모서리가 안쪽으로 미세하게 돌아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건망증이 심했나?”

지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완벽주의자에 가까웠고, 특히 이런 사소한 것들에는 민감했다. 어제 분명 거울의 균형을 맞췄던 기억이 생생했다. 혹시 지진이라도 있었나 싶어 뉴스를 검색했지만, 그런 소식은 없었다. 별것 아니겠지, 하며 거울을 똑바로 고쳐 걸었다. 차가운 유리 표면이 손끝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섬뜩한 한기가 덮쳐왔다. 에어컨을 켠 것도 아닌데, 마치 한겨울 밤의 창문을 열어둔 듯한 냉기가 폐부 깊숙이 스며드는 느낌이었다.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지우는 급히 뒤를 돌아봤지만, 텅 빈 거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모든 불이 꺼진 채 도시의 불빛만이 간접적으로 스며들어 어스름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오싹하게.”

간밤의 추위는 그대로인데, 몸은 긴장으로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불안한 기분에 괜히 핸드폰을 들어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답장은 오지 않았다. 밤이 늦었으니 당연했다.

다시 침실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까의 한기와 묘한 불안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창밖의 도시 소음조차 멀리 느껴지는, 비현실적인 고요함이 아파트를 감싸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달칵.

현관문 잠금장치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우는 숨을 멈췄다. 도둑인가? 그는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손에 잡히는 가장 묵직한 물건인 테이블 램프를 움켜쥐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거실을 살폈다.

텅 비었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잠금장치도 멀쩡했다.

“착각인가?”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거실 불을 켜려 손을 뻗었다. 그 순간, 탁! 하는 소리와 함께 거실 스탠드 조명이 스스로 켜졌다. 그것도 깜빡거리지 않고, 마치 누군가 스위치를 올린 것처럼 정확히 켜졌다.

지우는 얼어붙었다. 이어서, 싱크대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똑. 일정한 간격으로. 그런데 그의 집 싱크대는 한 달 전에 수리를 마쳐 물이 새지 않았다. 지우는 홀린 듯 부엌으로 향했다.

싱크대 수도꼭지는 분명 잠겨 있었다. 그런데 물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수도꼭지 끝에서부터가 아니었다. 마치 공중에 매달린 물방울이 바닥으로 낙하하는 것처럼, 싱크대 위 허공에서 물방울이 맺히고 떨어졌다. 그리고 그 물방울이 닿는 싱크대 표면에는, 연기처럼 희뿌연 서리가 피어났다.

“이게… 뭐야….”

지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때였다. 등 뒤에서 거대한 책장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천천히, 그리고 무겁게. 마치 속삭이듯 책장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지우는 뒤를 돌아봤다.

거실의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거대한 나무 책장이, 스스로 벽에서 떨어져 나오고 있었다. 수십 권의 책들이 우르르 쏟아져 내리며 바닥에 충격음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떨어진 책들 중 몇 권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바닥 위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한 권은 거실 중앙으로, 다른 한 권은 벽 쪽으로. 검은색 하드커버의 백과사전이 바닥을 스치며 ‘륵’ 하는 소리를 냈고, 얇은 시집은 마치 바람에 날리듯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그리고 이내, 바닥에 떨어진 다른 책들 또한 천천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지우가 읽지도 않았던, 묵혀두었던 책들이 밤하늘의 별처럼 거실 공중에 떠올랐다. 이내 책들은 아무런 소리도 없이, 하지만 거대한 힘에 이끌린 듯 일정한 간격과 속도로 움직였다. 마치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손으로 조종하듯이, 책들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거실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어둠 속에서 도시의 불빛이 흐릿하게 스며드는 가운데, 책들은 놀랍게도 일정한 형태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저 단순한 원이나 사각형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잡하고 기하학적인, 마치 고대 유적에서 발견될 법한 잊힌 문자의 일부 같았다. 거대하고 불길한 문양.

‘이건… 꿈이야. 악몽이야.’

지우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온몸의 신경이 극도의 공포로 마비된 것 같았다. 그 순간, 책들이 이룬 문양의 중앙에서, 시커먼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마치 밤하늘에 찢어진 상처처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검은 틈이 벌어졌다.

그 틈은 점점 커졌다. 아파트의 벽을 집어삼킬 듯, 거실의 공간 자체를 뒤틀어버릴 듯이 확장됐다. 그 안쪽은 어떤 빛도 삼켜버린 듯한 무한한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형체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마치 공간 자체가 형언할 수 없는 악의로 압축된 듯한 기운이 균열 속에서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검은 연기 같았고, 동시에 수억 년 전의 심연에서 기어 나온 듯한 원초적인 공포를 품고 있었다.

지우는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이 닿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시야를 가득 채운 검은 균열 속에서, 셀 수 없는 그림자들이 아른거렸다. 그것들은 울부짖는 듯했고, 속삭이는 듯했으며, 지우의 영혼을 갈기갈기 찢어발길 듯한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그 순간,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심장처럼 울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마치 지하 깊은 곳에서 거인이 깨어나는 듯한 진동이었다. 지우의 발밑, 18층 아파트의 견고한 콘크리트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균열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갔다. 천장에서도, 벽에서도, 사방에서 ‘파지직’ 하는 소리와 함께 균열이 생겨났다.

지우의 눈앞, 거실을 가득 채운 검은 균열의 가장자리에서, 기다란 그림자 하나가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은 팔다리도, 얼굴도 없는 순수한 어둠의 형태였지만,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지우의 정신을 붕괴시킬 것만 같았다.

그것은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지우를 향해 다가왔다.

고층 아파트의 텅 빈 거실에서, 세상의 끝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우는 그 가장자리에 홀로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