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으로 물든 도시는 숨을 멈춘 지 오래였다. 12층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황량했다. 부서진 빌딩의 뼈대들, 먼지에 뒤덮인 채 멈춰 선 차들, 그리고 그 위를 덮은 소름 끼치는 고요. 지훈은 익숙한 듯 창문에서 눈을 돌려 고요한 아파트 내부를 응시했다. 해가 기울어 가면서 건전지 램프의 희미한 불빛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는 냉장고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내용물이라곤 며칠 전 수색 작전에서 얻은 깡통 하나와 물병 몇 개가 전부였다. 깡통을 꺼내 식탁에 내려놓는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에서 미끄러진 숟가락이 바닥에 떨어졌다.
“젠장.”
작은 짜증을 내뱉으며 숟가락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때였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한 기운. 그는 고개를 들었다. 식탁 위, 방금 전 깡통을 꺼냈던 바로 그 자리에, 비어있던 컵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분명히 그 컵을 싱크대에 엎어두었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지훈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밤낮으로 이어지는 생존 스트레스가 환각을 유발하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다시 숟가락을 집어 들고 컵을 확인했다. 물기 없는 마른 컵. 그는 컵을 다시 싱크대에 엎어두고 깡통을 땄다. 내용물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통조림 고기였다.
저녁 식사는 짧고 우울했다. 식사를 마치고 남은 음식물을 잘 봉해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어둠이 완전히 깔리자, 아파트는 마치 살아있는 듯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오래된 건물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마찰음. 지훈은 침대에 기대앉아 닳고 닳은 소설책을 펼쳤다. 이런 날에는 다른 세계로 도피하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때였다.
슥… 슥…
아주 작고 날카로운 소리. 마치 손톱으로 나무를 긁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책을 덮고 숨을 죽였다.
‘쥐인가?’
그는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벽을 타고 울렸다. 그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슥… 슥… 슥…
소리는 안방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안방은 그가 이 아파트에 들어온 이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 늘 거실 소파에서 잠들었다.
지훈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손은 무의식적으로 침대 옆에 놓인 쇠 파이프를 움켜쥐었다.
“누구… 누구 있어?”
목소리는 예상보다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다만, 긁는 소리는 멈췄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는 천천히 안방 문으로 다가갔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가 문고리를 잡으려 손을 뻗는 순간,
끼이이익-!
문이 안쪽에서부터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문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어둠 속에서 문틈이 벌어지고, 그 너머의 검은 공간이 드러났다. 지훈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젠… 젠장…”
그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에 쥔 쇠 파이프가 덜덜 떨렸다.
문은 활짝 열렸다. 안방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확신했다. 뭔가 그곳에 있었다.
그 순간, 거실 책장 위에서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책 한 권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지훈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심장이 발작적으로 뛰어댔다. 그는 재빨리 시선을 돌려 책이 떨어진 곳을 살폈다. 책은 똑바로 세워져 있던 다른 책들 사이에서 혼자만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마치 누군가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이건… 이건 아니야…”
그는 중얼거렸다. 바람도 아니고, 진동도 아니었다.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찼다.
그가 다시 안방을 돌아보았다. 문은 여전히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그는 아주 희미한 움직임을 감지했다. 마치 검은 휘장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은 움직임. 그러나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아파트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았다. 그는 현관문으로 향했다. 다급하게 문고리를 잡으려 할 때였다.
휘익-!
찬 바람이 그의 뺨을 스쳤다. 마치 차가운 손이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아주 낮은,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섬뜩할 정도로 생생했다.
“누… 누구야! 대체 뭐야!”
그는 소리쳤다. 그의 외침은 텅 빈 아파트에 메아리쳤다. 건전지 램프의 불빛이 불안하게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전기가 끊어질 듯이 약해졌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그때, 거실 중앙에 놓인 작은 유리 테이블 위에서, 그가 아침에 마시다 뒀던 컵이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저절로 움직이는 것처럼. 지훈은 공포에 질려 그것을 바라봤다. 컵은 테이블 가장자리까지 다다르더니, 아무 소리 없이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깨지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부드럽게 받아낸 것처럼.
“말도 안 돼…”
그의 눈앞에서 벌어진 현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의 등 뒤에서, 현관문이 쾅-! 하고 닫혔다.
육중한 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아파트를 흔들었다. 현관문은 잠겨버렸다. 그는 갇혔다.
램프의 불빛이 더욱 격렬하게 깜빡였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꺼졌다.
지훈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졌다. 그의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왔어…”**
그 소리는 그의 귓가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아파트는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지훈은 마치 거대한 손바닥 안에 놓인 것처럼, 천천히 흔들리고 있는 것을 느꼈다.
어둠 속에서, 안방 문이 열린 그 검은 구멍이 마치 거대한 입처럼 그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그의 손에 든 쇠 파이프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하는 소리와 함께.
지훈은 움직일 수 없었다.
이 기괴한 아파트는 더 이상 그의 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제, 무언가의 소굴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안에 갇힌 먹잇감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