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팀펑크 독립적인 단편 소설

미나의 아파트는 서울이 아닌, 온통 황동과 증기, 그리고 복잡한 톱니바퀴로 짜인 도시의 심장부에 있었다. 창밖으로는 거대한 공중 부유선이 느릿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빌딩마다 얽히고설킨 증기 파이프가 뱀처럼 꿈틀대며 희뿌연 증기를 뿜어냈다. 그녀의 아파트, ‘탑동 레지던스’ 27층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주방의 냉장고는 거대한 황동제 압력솥처럼 부풀어 있었고, 거실의 전등은 에테르-전류가 흐르는 진공관 속에서 은은한 푸른빛을 내뿜었다. 시계는 태엽이 아니라 미세한 증기압으로 돌아가는 복잡한 기계장치였고, 매시간 정각이 되면 칙칙거리는 소리와 함께 작은 톱니바퀴들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오늘은 유난히 조용한 오후였다. 미나는 낡은 가죽 소파에 몸을 묻고, 증기 압력으로 돌아가는 독서등 아래에서 고전 역학 서적을 뒤적이고 있었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종이의 건조한 마찰음이 났다. 그때였다.

“…딸깍.”

아무것도 없었다. 미나는 고개를 들었다. 서재에서 들려온 듯한 소리였다. 그녀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요즘 들어 자꾸만 신경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피곤해서겠지. 며칠 밤을 새다시피 작업했으니까.

“따아알깍.”

이번에는 좀 더 분명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툭, 하는 가벼운 낙하음. 미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맨발이 차가운 황동 판으로 장식된 마룻바닥에 닿았다. 소리의 근원지인 서재로 향하는 발걸음이 망설여졌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안쪽은 늘 그랬듯, 벽 가득 황동 장식의 서가가 자리 잡고 있고, 중앙에는 기계식 계산기가 놓인 책상이 있었다.

미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서재 안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책상 위, 복잡한 기어와 레버로 이루어진 태엽식 필름 영사기가 놓여 있었다. 평소에는 완벽하게 수평을 이루고 있던 영사기가, 미세하게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딱딱한 황동 바닥에 떨어진 것은, 영사기의 작은 렌즈 캡이었다.

미나는 캡을 주워 올렸다. 차가웠다. 누가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뭐야…?”

그녀는 중얼거렸다. 바람이 불 리 없는 27층 아파트 안에서.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기용 증기 배관이 지나가는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미나는 영사기 렌즈 캡을 다시 제자리에 끼우고, 기울어진 영사기를 똑바로 세웠다. 그리고 그날 밤, 그녀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

다음 날부터 기묘한 현상은 더욱 노골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방에서는 황동 수도꼭지가 저절로 돌아가 증기를 뿜어냈고, 아침에는 식탁 위에 놓아두었던 잉크병이 넘어져 귀한 만년필 심지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한 번은 미나가 샤워를 하던 중, 증기압 조절기가 최대치로 올라가 뜨거운 증기가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지훈아, 나 진짜 미칠 것 같아.”

미나는 에테르파 전화기로 친구 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너머로 지훈의 목소리가 복잡한 기계음과 섞여 들려왔다.

“미나, 피곤해서 그래. 작업실에 태엽 수리공 부르는 거 깜빡한 거 아니야? 아니면 증기 압력 조절기가 낡았거나.”

지훈은 건축학 연구소에서 일하는 친구였다. 늘 모든 현상을 이성적이고 공학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는 그에게, 미나의 이야기는 그저 피로에서 오는 착각일 뿐이었다.

“아니야! 오늘은 내 고글이 서재 책상에서 거실 바닥으로 떨어졌다니까! 심지어 안경알에 금이 갔어! 내가 아무리 물건을 막 쓰는 편이어도, 그렇게 높은 데서 떨어뜨릴 리가 없잖아!”

미나는 자신의 황동 고글을 흔적기관처럼 소중히 여겼다. 시력이 좋지 않아 늘 착용하고 다녔고, 복잡한 증기 도시에서 날아오는 매연과 먼지로부터 눈을 보호해 주는 필수품이었다.

“흠… 혹시, 그 새로 들인 자동 태엽 감는 장치 말이야, 그거 작동 방식이 좀 불안정하다던데? 자기장 같은 거에 영향을 받으면 오작동할 수도 있어.”

“그게 고글이랑 무슨 상관인데? 그리고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리고 닫히는 것도 자기장 때문이라고 할 거야?”

지훈은 잠시 침묵했다. “글쎄, 그렇게 말하니 좀 이상하긴 하네. 혹시 집에 이상한 물건이라도 들인 거 없어? 아니면 오래된 물건이라던가.”

미나는 잠시 생각했다. 오래된 물건? 그녀의 아파트에는 거의 모든 것이 태엽이나 증기, 또는 에테르파로 움직이는 현대적 기기였다. 하지만 딱 한 가지.

“아… 서재에 있는 그 오래된 태엽식 필름 영사기. 할아버지가 쓰시던 건데, 요즘 다시 손봐서 쓰기 시작했거든.”

“그거 말이야? 그거 요즘 시대에 부품 구하기도 힘들어서 쓰는 사람도 없지 않나. 혹시 거기서 미세한 진동이라도 발생하는 거 아니야? 태엽이 풀릴 때 발생하는 에너지 같은 거 말이야.”

“그럴 리가. 진동이라기엔 너무… 의도적이야.”

미나는 전화를 끊었다. 지훈은 늘 현실적인 해결책만 내놓았다. 하지만 미나가 겪는 일은 현실의 영역을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

그날 밤.
미나는 간신히 잠이 들었지만, 한밤중에 싸늘한 기운에 눈을 떴다.
온몸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방 안은 희미한 에테르-전류등의 빛 아래에서 낯선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침대 옆, 태엽식 탁상시계의 시계추가 맹렬한 속도로 좌우로 움직이고 있었다.
‘칙, 칙, 칙, 칙!’
보통의 두 배는 되는 속도였다. 그리고 시계 바늘은… 거꾸로 돌고 있었다.
분명 새벽 3시 27분이었는데, 시계는 1시 1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미나는 공포에 질려 숨을 멈췄다. 그때, 방문이 삐걱이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열렸다.
방문 너머의 복도는 칠흑 같았다. 그 어둠 속에서, 마치 누군가의 숨결처럼, 미세한 증기 흐름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흐름을 따라, 어둠 속에서 희미한 황동빛 윤곽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누구… 누구세요?”

미나의 목소리는 파르르 떨렸다. 복도에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하지만, 황동 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기괴한 속도로 뒤로 빠르게 감기기 시작했다. 틱, 틱, 틱, 틱! 초침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회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과거로 돌아가는 시간처럼.

미나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 순간, 거실에서 ‘우웅…’ 하는 낮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미나는 공포에 질린 채 조심스럽게 방 밖으로 나섰다. 복도는 여전히 어두웠지만, 거실에서 새어 나오는 에테르-전류등의 푸른빛이 희미하게 길을 비추고 있었다.

거실은 아수라장이었다.
황동으로 만든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고풍스러운 다구들이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에테르-전류등은 미친 듯이 깜빡이며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벽에 걸려 있던 거대한 기어식 벽시계였다.
시계의 복잡한 톱니바퀴들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불규칙적인 속도로 돌고 있었다. 톱니바퀴들이 서로 엇물리며 긁히는 끔찍한 소리가 온 아파트를 채웠다.
‘끼이이익- 텅! 칙칙칙…’
마치 시계 자체가 고통받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미나의 시선이 멈춘 곳은, 벽시계의 중심부에 박혀 있던 낡은 놋쇠 사진 액자였다.
그 액자 속에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젊었을 적,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흑백 사진이 담겨 있었다.
액자 전체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진 속 할아버지의 시선이, 미나를 향해 있는 듯한 착각에 빠졌다.

갑자기, 황동제 수도꼭지가 저절로 열리며 부엌 싱크대에서 거친 증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증기압 냉장고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가 닫히기를 반복했다.
미나는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서재 문 앞에서 희미하게 흔들리는, 무언가였다.
마치 얇은 안개처럼 흐릿했지만, 그 안개 속에서 복잡한 기계장치의 윤곽이 비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윤곽이, 천천히 서재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미나는 온몸의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서재 문을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서재 안은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와 있었다.
단 한 가지, 태엽식 필름 영사기의 영사 화면에, 희미한 잔상이 떠오르고 있었다.
오래된 필름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지지직거리는 노이즈 속에서, 검고 희미한 형체가 빠르게 움직이는 영상이 몇 초간 깜빡였다.
마치 누군가가 급하게 필름을 돌려본 것처럼.
그리고 그 영상이 멈춘 곳에는, 낯선 여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창백하고 슬픈 눈빛. 그녀의 머리에는 낡은 고글이 씌워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움직였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미나는 왠지 모르게 그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기억해.’

***

다음 날, 지훈은 미나의 전화를 받고 당장 아파트로 달려왔다. 거실의 파편들과 부엌의 난장판을 본 그의 얼굴은 경악으로 물들었다.

“미나, 이건… 이건 단순한 오작동이 아니잖아. 누가 들어왔던 거야? 아니면… 아니면…”

“아니야. 아무도 안 들어왔어. 문은 잠겨 있었고… 이건… 유령이야. 우리 아파트에 유령이 있어, 지훈아.”

미나는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밤새도록 잠들지 못한 그녀의 얼굴은 핏기 없이 창백했다.

지훈은 주변을 둘러봤다. 바닥에 떨어진 황동 다구들, 망가진 에테르-전류등, 그리고 톱니바퀴가 엉망이 된 벽시계. 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내 서재 문에 멈췄다.

“어제 밤에… 서재에서 뭐가 보였어.”

미나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필름 영사기 화면에… 한 여자가 나왔어. 고글을 쓴 여자.”

지훈은 서재로 들어갔다. 태엽식 영사기는 조용히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그는 영사기를 유심히 살폈다. 복잡한 황동 기어들과 낡은 가죽 벨트, 먼지 쌓인 렌즈.

“이거, 네 할아버지 거라 했지?”

“응. 할아버지가 생전에 아끼셨던 물건이야. 옛날 필름들을 자주 돌려보셨어.”

지훈은 영사기 옆에 놓인 작은 황동 케이스를 발견했다. 케이스를 열자, 수십 개의 낡은 필름 릴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는 무심코 가장 위에 있는 릴 하나를 집어 들었다. 릴에는 아무런 제목도 쓰여 있지 않았다.

“혹시, 이 필름들 중에… 할아버지가 자주 보시던 게 있었어?”

미나는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르겠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내가 정리한 건데, 이 영사기는 작동이 너무 복잡해서 몇 번 돌려보다가 말았거든. 최근에야 겨우 다시 손봤지.”

지훈은 필름 릴을 영사기에 조심스럽게 걸었다. 그리고 영사기의 태엽을 감았다. 칙칙거리는 소리와 함께 영사기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흐릿한 영상이 비쳤다.

처음에는 흐릿한 풍경이었다. 오래된 도시의 거리, 증기를 뿜는 자동차들, 앤티크한 옷차림의 사람들. 그리고 이내 한 여인의 모습이 화면 가득 클로즈업되었다.
어제 밤 미나가 본 바로 그 여자였다.
고글을 이마에 올린 채, 어딘가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
그녀는 황동으로 장식된 낡은 아파트의 거실에 서 있었다. 그 아파트는 놀랍게도 미나의 아파트와 똑같은 구조였다. 아니, 거실 벽에 걸린 벽시계가, 정확히 지금 미나의 아파트 거실에 걸려 있는 그 시계였다.

“이게… 우리 아파트야. 아니, 이 아파트였던 곳이야.” 미나가 속삭였다.

필름 속 여인은 천천히 거실을 거닐었다. 그녀의 손이 벽시계의 놋쇠 사진 액자에 닿았다. 그리고 그녀가 액자 속 사진을 바라보는 순간, 미나와 지훈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액자 속 사진은, 미나의 할아버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필름 속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액자 속 자신의 사진을 바라볼 때, 그녀의 눈에서 한 방울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필름 속 여인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기억해… 당신을… 영원히…’

갑자기 영사기가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멈춰 섰다. 필름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지훈은 급하게 영사기의 전원을 내렸다.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게… 무슨…” 지훈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미나는 영사기에서 타버린 필름 조각을 주워 올렸다. 그 조각에는 흐릿하게 여인의 얼굴이 남아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이 여인을 영사기에 담으셨던 거야. 계속… 계속 이 필름만 돌려보셨던 거야.”

지훈은 벽시계의 놋쇠 액자를 다시 바라봤다. 이제야 모든 것이 납득이 갔다.
액자 속 사진은, 할아버지가 사랑했던 여인. 그리고 그 여인은, 필름 속에 봉인된 채 이 아파트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니, 깃들어 있던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태엽식 영사기가 끊임없이 그녀를 ‘재생’시키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의 그리움이, 이 아파트의 에테르 흐름과 기계장치에 잔상처럼 남았던 것이다.

“이건… 기억의 잔상이야.” 지훈이 낮게 중얼거렸다. “태엽 영사기가 그녀의 기억을 계속 돌려 재생시키면서, 이 아파트의 에테르 흐름에 영향을 준 거야. 그래서 이 공간에… 그녀의 감정과 존재가 덧씌워진 거지.”

미나는 서재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의 거대한 증기 파이프들이 여전히 희뿌연 증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 복잡한 기계 도시의 지하에는, 수많은 에테르-전류의 맥박이 흐르고 있었다. 그 맥박 위에서, 인간의 감정과 기억이 기계와 얽혀 이런 기묘한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 소름끼쳤다.

미나는 타버린 필름 조각을 꽉 쥐었다. 이 아파트는 이제 더 이상 단순한 주거 공간이 아니었다. 사랑과 그리움, 그리고 과거의 망령이 기계의 심장 속에서 영원히 춤추는, 살아있는 유기체였다.
그날 이후, 미나는 필름 영사기를 다시는 작동시키지 않았다. 하지만 밤이 되면 여전히 태엽 시계의 칙칙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고, 거실 벽시계의 놋쇠 액자 속 여인의 눈빛은, 미나를 향해 영원히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미나는 알았다. 그 여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이 아파트의 황동 기어와 증기 파이프를 따라 영원히 유영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의 기억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아니, 어쩌면 그 기억조차 기계 속에 영원히 박제되어 버린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