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저무는 서쪽 하늘은 언제나 그렇듯 피를 토한 듯 붉었다. 그러나 노을이 아무리 찬란한들, 잿빛으로 물든 마을의 지붕과 허리 굽은 사람들의 그림자마저 물들이지는 못했다. 신성 제국 아르카나의 깃발이 바람에 찢긴 채 매달린 망루 아래, 아린은 텃밭의 마른 흙을 파내려가는 어머니의 등짝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엄마, 오늘은 제가 할게요.”
“괜찮아, 아린아. 너는 가서 물이라도 한 모금 더 마셔라. 제국 놈들이 식수를 반으로 줄여버린 뒤로 애들이 더 목말라 하는구나.”
어머니는 앙상한 손으로 땅을 긁어내며 겨우 찾아낸 시들한 뿌리 하나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마저도 제국군이 며칠 전 들이닥쳐 마을의 양식을 싸그리 털어간 후 남은 마지막 희망 같은 것이었다. 아린은 퉁퉁 부은 어머니의 손을 보며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물도, 양식도, 희망마저도 제국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둔탁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먼지가 길게 피어올랐다. 마을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제국군이었다. 철갑을 두른 병사들이 시커먼 그림자를 드리우며 마을 어귀로 들이닥쳤다. 그들의 선두에는 비웃음을 머금은 듯한 표정의 사내가 서 있었다. 탐욕스럽게 번들거리는 눈빛, 번지르르한 군복. 제국의 세금 징수관, ‘탐식의 마법사’라는 악명 높은 자였다.
“이봐, 촌장! 아직도 덜 걷은 세금이 있는 모양이군. 황제 폐하께 바칠 조공이 고작 이딴 지푸라기들이라니, 감히 천명을 거역하려는 것이냐?”
마법사는 낡은 지팡이를 쾅 소리 나게 땅에 찍었다. 동시에 지팡이 끝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며 땅을 태웠다. 겁에 질린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어른들은 고개를 숙였다. 촌장은 비쩍 마른 몸을 떨며 앞으로 나섰다.
“저, 저기… 징수관님. 이미 저희 마을은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더 이상 드릴 것이… 아무것도….”
“뭣이? 아무것도 없다고? 감히 제국을 기만하려 드느냐!”
마법사는 촌장의 멱살을 잡고 번쩍 들어 올렸다. 촌장의 얼굴은 시퍼렇게 질려갔다. 그때, 아린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고통, 마을 사람들의 절망, 아이들의 울음소리… 이 모든 것이 폭탄처럼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그만둬요! 아무것도 없다는 걸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잖아요!”
아린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모든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탐식의 마법사는 촌장을 내던지고는 흥미롭다는 듯 아린을 바라봤다.
“오호라? 이 작은 촌락에 이런 암탉이 있었군. 감히 제국의 위엄에 도전하려 드는가?”
“당신들이 하는 짓이… 인간의 짓입니까!”
아린의 목소리에는 분노와 떨림이 뒤섞여 있었다. 마법사는 코웃음을 쳤다.
“건방진 것. 네년의 그 입을 영원히 다물게 해주마!”
그가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이번에는 검은 연기가 거대한 뱀처럼 아린에게 달려들었다. 마을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죽음의 공포가 온몸을 덮쳐왔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뜨거운 기운이 심장에서부터 솟구쳐 올랐다.
그 순간, 아린의 몸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져 나왔다. 손목에 차고 있던 낡은 은색 팔찌가 강렬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빛은 그녀의 몸을 감쌌고, 낡은 옷은 순식간에 환한 푸른색과 은색으로 반짝이는 갑옷으로 변했다. 머리에는 작은 은빛 왕관이 돋아났고, 등 뒤에는 투명한 날개가 마치 별가루처럼 흩날렸다. 손에는 별빛이 스며든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주변의 검은 연기가 빛에 의해 산산이 부서졌다. 모두가 경악한 얼굴로 아린을 바라봤다. 아린 자신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변한 모습을 내려다봤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힘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이것이… 대체…
“마, 마법소녀…?”
탐식의 마법사는 잔뜩 겁먹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국에 복종하지 않는 이단적인 마법의 존재.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던 존재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아린은 솟구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은빛 마력이 파도처럼 뿜어져 나가 제국군을 덮쳤다. 철갑을 두른 병사들이 속절없이 나가떨어졌다. 그들은 마법이 아니라 물리적인 충격에 맞아 쓰러지는 것 같았다.
“이런… 이런 미친… 감히 제국에 저항하려 들다니! 네년의 목을 베어 황제 폐하께 바칠 것이다!”
탐식의 마법사가 최후의 발악처럼 검은 연기를 더욱 거대하게 모아 아린에게 날렸다. 아린은 눈앞의 거대한 그림자에 잠시 주춤했지만, 이내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맞섰다. 그녀의 가슴에는 분노가 아닌, 이젠 더 이상 누구도 고통받지 않게 하겠다는 결의가 가득했다.
“더 이상… 빼앗기지 않을 거예요! 누구도 고통받게 두지 않을 거예요!”
그녀의 외침과 함께 은빛 지팡이에서 찬란한 별빛이 뿜어져 나왔다. 별빛은 검은 연기를 뚫고 나아가 탐식의 마법사의 가슴을 강타했다. 마법사는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재가 되어 흩어졌다.
마을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그리고 이내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아린은 떨리는 손으로 지팡이를 잡고 있었다. 그녀의 변신은 서서히 풀려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녀의 눈빛은 더 이상 이전의 나약한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
그날 이후, 아린은 ‘새벽별의 수호자’로 불리게 되었다. 제국에 짓밟히던 변방 마을들에 소문이 빠르게 퍼져나갔고, 절망에 빠져 있던 사람들은 다시 희망을 품기 시작했다.
며칠 후, 아린은 마을을 떠났다. 그녀의 뒤에는 몇 명의 젊은이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그들을 배웅했다. 아린은 이제 더 이상 한 개인의 고통을 짊어진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는 수많은 이들의 희망을 짊어진 존재가 된 것이었다.
“아린아, 조심해라. 제국은 결코 너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아요, 엄마. 하지만 이대로는 안 돼요. 더 이상은… 당하고만 있을 수 없어요.”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녀의 발걸음은 굳건했다.
새벽별단. 그들이 모이는 비밀 아지트는 폐광 깊은 곳에 있었다. 어둠과 습기가 가득한 곳이었지만, 그들의 눈빛에는 어둠을 뚫고 나아가려는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왔군, 새벽별의 수호자.”
낡은 망토를 두른 노인이 아린을 맞았다. 그의 이름은 지한. 한때 제국의 영웅이었으나, 제국의 타락을 보고 등을 돌린 전설적인 검사였다. 그는 새벽별단의 정신적 지주였다.
“지한님. 소문 듣고 찾아왔습니다. 저의 힘이… 도움이 될 수 있을까요?”
“네가 일으킨 희망의 불꽃은 이미 수만 명의 마음을 움직였다. 도움이 되다마다. 하지만, 네 힘은 칼날과 같아서, 현명하게 다루지 않으면 너 자신마저 베어버릴 수 있다.”
지한의 말에 아린은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아직 자신의 힘이 무엇인지, 어디에서 왔는지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린님, 저희가 제국의 물자 수송선을 습격할 계획입니다. 혹시… 함께 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전략가인 루시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녀는 아린의 마법을 직접 본 유일한 사람이었고, 그 힘의 잠재력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네, 물론이죠. 제국의 탐욕을 막는 데라면… 어떤 일이라도 할 거예요.”
아린의 눈빛은 흔들림 없었다.
밤이 깊었다. 제국의 물자 수송선은 어둠 속을 조용히 이동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감히 제국의 운송선에 도전할 자는 없으리라 확신하는 듯 태만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눈앞에 갑자기 환한 푸른빛이 번쩍였다.
“누구냐!”
병사들의 외침이 채 끝나기도 전에, 새벽별의 수호자가 홀연히 나타났다. 그녀의 은빛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마법은 순식간에 수송선을 지키던 병사들을 제압했다. 그녀는 최대한 살상을 피하려 노력했다. 마법은 강력한 충격파를 일으키거나, 병사들을 기절시키는 데 쓰였다.
“빨리! 물자를 확보해라!”
루시아의 지시에 따라 새벽별단원들이 재빨리 수송선에 올라타 물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식량과 약품, 심지어 제국이 마을에서 빼앗아간 곡물 자루까지 있었다. 아린은 그 물건들을 보며 이를 악물었다.
“이게 다… 우리 백성들의 것이었어…”
그때, 하늘에서 기분 나쁜 기척이 느껴졌다. 거대한 그림자가 달빛을 가렸다.
“겨우 저런 하찮은 반란군 따위가 감히 제국의 보급선을 습격하다니… 웃음밖에 나오지 않는군.”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제국의 정예 부대, ‘어둠의 기사단’의 대장, ‘그림자 기사’ 카를로스였다. 그는 전신을 검은 갑옷으로 감싸고 있었으며, 그의 검에서는 음습한 어둠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의 등장에 새벽별단원들은 공포에 질려 뒷걸음질 쳤다.
“이것이… 제국의 심판이다!”
카를로스가 검을 휘두르자 검은 파동이 아린에게 날아들었다. 아린은 지팡이를 들어 방어막을 형성했지만, 카를로스의 공격은 훨씬 강력했다. 방어막이 깨지며 아린은 뒤로 밀려났다.
“크윽…!”
“겨우 이 정도인가? 꼬맹이 마법사 주제에 감히 제국에 맞서려 들다니.”
카를로스는 비웃듯이 말했다. 그의 검이 다시 한번 번쩍였다. 이번에는 더욱 거대한 어둠의 기운이 아린을 덮쳤다. 아린은 숨을 헐떡이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그녀의 몸은 이미 곳곳에 타박상을 입어 아려왔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할 수 없었다. 뒤에는 그녀를 믿고 따르는 새벽별단원들이 있었고, 그녀가 지켜야 할 무고한 백성들의 희망이 있었다.
“제국이… 백성을 짓밟는 한…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을 거예요!”
아린은 이를 악물었다. 가슴 속에서 다시 한번 뜨거운 불꽃이 솟아올랐다. 그녀의 몸에서 더욱 강렬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단순히 힘을 쓰는 것이 아닌, 무언가 각성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은빛 지팡이 끝에서 별빛이 회오리쳤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염원! 새벽을 알리는 별의 이름으로!”
아린이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그녀의 외침과 함께 하늘에서 수많은 별똥별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장관이 펼쳐졌다. 별똥별은 카를로스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카를로스는 당황한 얼굴로 검은 방어막을 형성했지만, 아린의 별빛 마법은 방어막을 뚫고 그를 덮쳤다.
“말도 안 돼…! 이딴… 하찮은 힘이…!”
카를로스의 절규와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어둠의 기운이 흩어지고, 카를로스는 땅에 고꾸라졌다. 그는 살아 있었지만, 온몸이 마비된 듯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이다! 빨리 물자를 옮겨라!”
지한의 외침에 새벽별단원들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린은 휘청거리는 몸을 지탱하며 카를로스를 내려다봤다.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그녀의 눈빛은 승리의 빛으로 반짝였다.
“우리는… 당신들이 생각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에요. 우리는… 새벽을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고통 속에서도 미소를 지어 보였다. 비록 제국과의 싸움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지만, 작은 승리는 그들에게 더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 수송선에 실린 물자들은 이제 굶주린 백성들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고, 새벽별의 수호자의 이야기는 더욱 많은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을 터였다.
어둠이 걷히고, 멀리 동쪽 하늘에서 희미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아린은 그 빛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어깨에는 수많은 백성들의 염원이 별빛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 빛은 결코 꺼지지 않을 희망의 증거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