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돌바닥이 등허리를 집어삼킬 듯 끈적였다. 지독한 피비린내와 습기, 그리고 저 멀리서 들려오는 기분 나쁜 괴물의 울음소리만이 내가 아직 지하 깊은 곳, 이 지옥 같은 ‘나락의 심장’에 처박혀 있음을 알렸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턱에서 흘러내린 피가 핏자국으로 얼룩진 시야를 더욱 가렸다. 온몸의 뼈가 삐걱거리는 듯한 통증은 이미 익숙한 경지에 다다랐고, 차라리 고통이 없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래야 아무 생각 없이, 고통조차 잊고 편안히 죽을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고통은 나를 채찍질했다. 죽지 말라고, 아직은 안 된다고.
나는 강하준이었다. 한때는 ‘미친 불꽃’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던전을 휩쓸던 헌터. 그리고 지금은… 버려진 개.
“크윽….”
간신히 손을 뻗어 옆구리에 박힌 단검의 손잡이를 붙잡았다. 차가운 쇳덩이의 감촉이 오히려 정신을 또렷하게 했다. 이 단검… 익숙한 문양이다. 내가 직접 골라 지한에게 선물했던 단검. 그 단검이 지금 내 심장을 비껴, 옆구리를 관통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그날의 악몽이 재생되었다.
* * *
“하준아, 드디어 해냈어! 심연의 수호자를 잡았다고!”
이지한은 흥분으로 상기된 얼굴로 내 어깨를 흔들었다. 우리는 나란히, 방금 쓰러뜨린 거대한 괴물의 시체 앞에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놈은 날카로운 촉수와 비늘 갑옷을 두른 끔찍한 존재였지만, 우리 둘의 완벽한 호흡 앞에서는 결국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나는 미소 지었다. 지한은 나와 함께 던전을 개척해온, 유일한 파트너이자 친구였다. 스무 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부터 오직 둘이서 수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겨왔다. 내가 공격을 맡으면 지한은 날카로운 눈으로 적의 약점을 찾아내고, 신속하게 치유 마법을 걸어주거나 보조 마법으로 날 강화했다. 우리는 서로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게. 이번에도 네 치유가 없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 내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지한은 특유의 해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천만에! ‘미친 불꽃’ 네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지! 자, 이제 전리품을 찾아보자!”
우리는 거대한 괴물의 시체를 뒤져 동굴 안쪽으로 향했다. 습한 동굴은 점점 더 깊어지고, 마침내 우리는 신비로운 빛을 내는 제단을 발견했다. 제단 중앙에는 검은빛이 감도는 돌멩이가 놓여 있었다.
“이게… 설마?” 지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숨을 들이켰다. 전설로만 전해지던 ‘검은 심장석’. 던전의 마력을 응축시킨 보물 중의 보물. 이걸 손에 넣으면, 우리 둘 모두 차원이 다른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래. 심장석이 분명해.”
내가 감격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마주 보고 환하게 웃었다. 이제는 더 이상 지하의 쥐구멍을 전전하며 목숨을 걸 필요가 없을 터였다. 우리의 꿈, 던전을 완전히 정복하고 지상으로 돌아가 평범한 삶을 사는 것. 그 꿈이 드디어 눈앞에 펼쳐지는 듯했다.
“하준아, 이건… 우리가 함께 이룬 거야.” 지한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네가 없었으면 불가능했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너도 마찬가지야, 지한아.”
그때였다. 내 눈에 비친 지한의 얼굴에, 아주 섬뜩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가 스쳤다. 짧은 찰나였지만, 그 미소는 내 몸의 모든 세포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의심할 틈도 없이, 단지 의아함만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번개처럼 빠른 움직임이었다. 내 옆구리에 꽂힌 날카로운 칼날이 심장을 노렸다.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는 고통에 신음하며 뒤로 휘청거렸다.
“크윽…! 지…한…?”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피로 물든 시야 너머로 지한은 여전히 차가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내가 선물했던, 익숙한 문양의 단검이 들려 있었다.
“미안해, 하준아.” 그의 목소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싸늘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이 ‘검은 심장석’은 너무나 강력해. 이걸 둘이서 나눠 가질 수는 없어.”
“무… 무슨 소리야…?” 나는 정신없이 옆구리의 단검을 붙잡으려 했다. 통증이 온몸을 휘감아왔다.
“이해해 줘. 나는 최고의 헌터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네 옆에서는 항상 2인자였지. ‘미친 불꽃’ 강하준의 그림자. 늘 네 뒤만 쫓아다니는 치유사 이지한.”
그의 눈빛은 내가 알던 지한의 것이 아니었다. 탐욕과 질투, 그리고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네가 죽어야만, 나는 온전히 이 심장석을 흡수하고 진정한 강자가 될 수 있어. 그리고 네 모든 전리품과 명성도 내 것이 되겠지. 아무도 네 죽음을 의심하지 않을 거야. 심연의 수호자에게 희생당했다고 믿겠지.”
“너… 이 개자식…!” 나는 이를 악물었다.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데도, 나의 분노는 활활 타올랐다.
“편하게 가, 친구. 우리가 함께 이룬 건 맞아. 그러니 내가 널 기억해 줄게. 네 몫까지.”
지한은 차갑게 중얼거리고는 내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비틀었다. 칼날이 살을 찢고 뼈를 긁는 소름 끼치는 감각이 온몸을 관통했다. 내 몸은 힘없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시야가 새빨갛게 물들고,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한은 아무렇지도 않게 심장석을 집어 들고는 뒤돌아섰다.
“잘 가, 강하준.”
그의 마지막 목소리는 멀리 사라지는 메아리처럼 들렸다.
* * *
차가운 바닥에 누워 그날의 기억을 되새기던 나는 피 묻은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손톱이 부러지고 살이 찢겨도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 내 안의 고통은 이미 육신의 한계를 넘어섰으니까.
옆구리에 박힌 단검을 뽑아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뽑아내는 순간 피가 솟구쳐 그대로 끝장날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하지만 이대로 죽을 수는 없었다. 절대로.
숨을 쉴 때마다 폐에서 피 거품이 올라왔다. 온몸이 저려오고, 시야가 흐려졌다. 내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내 영혼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강하준.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이지한. 이 빌어먹을 배신자. 네놈에게 받은 치욕과 고통을 그대로 되갚아주기 전에는, 절대로 눈을 감을 수 없어.
죽어가는 내 눈에, 흐릿한 어둠 속에서 빛나는 무언가가 보였다. 내가 쓰러진 곳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 지한이 황급히 떠나느라 미처 챙기지 못한 듯한, 심연의 수호자가 마지막으로 남긴 전리품 중 하나.
작고 낡은 가죽 주머니였다.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저 허망한 희망일 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작은 희망이라도 붙잡아야만 했다. 이대로 죽는 건,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다.
“이지한….”
내 입술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드시… 반드시… 돌아올 거야. 네가 내게 준 모든 것을… 천 배, 만 배로… 되돌려 줄 거야….”
의식이 완전히 멀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내 머릿속에는 오직 이지한의 싸늘한 미소와, 그에게 내 삶을 송두리째 빼앗긴 내 절망적인 얼굴만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지독한 복수의 불꽃.
나는 그 불꽃을 연료 삼아,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