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균열의 틈새로
### 1장. 이상한 밤의 서곡
서울 한복판, 고층 빌딩 숲 사이에 박힌 듯 자리 잡은 오피스텔 ‘푸른빛 스카이뷰’. 그곳 203호에 사는 이현우(29)는 오늘도 어김없이 밤늦도록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프리랜서 그래픽 디자이너인 그는 고된 낮의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금 모니터 앞에서 자신만의 세계에 몰두하는 것이 익숙했다. 그의 방은 필요한 가구 몇 개만 놓인 간결하고 모던한 공간이었다. 정돈된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듀얼 모니터, 그리고 작은 스탠드가 전부였다. 딱딱한 도시의 규칙에 맞춰 살아가는 그의 삶만큼이나, 그의 공간 역시 효율성과 최소한의 미학을 추구했다.
밤 11시, 쨍한 모니터 불빛이 방 안을 유일하게 밝히고 있었다. 이어폰에서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고, 현우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태블릿 펜을 움직여가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작업은 순조로웠고, 마감 시간도 아직 넉넉했다. 완벽한 밤이었다.
그때였다. 쿵.
아주 작게, 하지만 분명하게. 주방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현우는 이어폰을 벗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윗집인가?” 워낙 층간 소음에 익숙한 터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이 오래된 오피스텔은 지은 지 십 년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틈만 나면 삐걱거리고 쿵쾅거렸다. 건물 자체의 문제인지, 아니면 이웃들의 발소리 하나하나가 이토록 선명하게 들리는 것인지, 그는 늘 궁금했지만 딱히 답을 찾아볼 생각은 없었다.
다시 이어폰을 끼고 작업에 집중하려던 찰나, 시선이 책상 위 작은 액자에 닿았다. 대학 졸업식 때 친구들과 찍은 사진이 담긴 액자가, 왠지 모르게 평소보다 조금 기울어져 있었다. “바람이 불었나.” 창문은 닫혀 있었다. 현우는 어깨를 으쓱하며 액자를 똑바로 세웠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싶었다.
그로부터 며칠이 더 흘렀다.
현우는 점점 이상한 기시감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분명 어젯밤에 소파 위에 던져두었던 리모컨이 아침에는 식탁 위에서 발견되거나, 현관 옆 신발장 위에 올려둔 차 키가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는데도 다음 날이면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뒀다가 깜빡했나?’ 하고 자신의 건망증을 탓했다. 하지만 비슷한 일이 반복될수록 단순한 건망증이라기엔 뭔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어느 밤에는 더 섬뜩한 경험을 했다. 잠자리에 들기 전, 거실등을 끄려는 순간 스위치 옆에 놓인 작은 조각상이 저절로 떨어진 것이다. 현우는 깜짝 놀라 조각상을 주웠다. 딱히 정교하거나 값비싼 것은 아니었다. 여행지에서 기념으로 산 나무 조각상이었는데, 손에서 미끄러진 것도 아니고 누가 밀어 떨어뜨린 것처럼 톡, 하고 떨어졌다. “뭐야, 깜짝이야.” 그는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끼며 조각상을 다시 제자리에 올려두었다.
잠을 청하려 누웠을 때였다. 벽 속에서 희미하게, 무언가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각, 사각. 마치 손톱으로 벽을 긁는 것 같기도 하고, 작은 동물이 갉아먹는 소리 같기도 했다. 쥐인가? 낡은 오피스텔이니 쥐가 나올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는 베개로 귀를 막고 애써 잠을 청했다. 하지만 그 사각거리는 소리는 새벽이 깊어질수록 더욱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현우는 이제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피곤함은 극에 달했고, 밤마다 알 수 없는 소리와 시야 끝에 스치는 흐릿한 그림자 때문에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잠을 자다 문득 눈을 뜨면, 거실 쪽에서 뭔가 스쳐 지나가는 듯한 착시 현상이 일어나곤 했다. 아니, 착시일까? 흐린 불빛 아래 희미하게 일렁이는 그림자는 너무나도 생생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한밤중에 터졌다.
그날은 유난히 고요했다. 창밖으로 도시의 불빛은 반짝였지만, 오피스텔 복도는 쥐죽은 듯 조용했다. 현우는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어폰은 끼지 않았다. 오늘은 왠지 모르게 이어폰을 끼기가 꺼림칙했다.
쿵! 쾅!
갑작스럽고 끔찍한 굉음이 주방에서 터져 나왔다. 현우는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몸을 흠칫 떨었다. 동시에 숨을 들이켜며 주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새하얀 파편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어제 설거지를 마치고 식기 건조대에 가지런히 쌓아두었던 세라믹 접시들이 산산조각이 나 있었다. 마치 누군가 높은 곳에서 힘껏 내던진 것처럼, 부서진 조각들은 넓게 퍼져 있었다.
현우는 멍한 얼굴로 그 광경을 응시했다. 지진이 난 것도 아니었다.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밑에 깨진 접시 조각들이 밟힐까 조심하며 주방으로 다가갔다.
차가운 공기가 그를 감쌌다. 에어컨을 켠 것도, 창문을 연 것도 아니었다. 마치 냉동고 문을 열어젖힌 듯, 섬뜩한 한기가 뼈 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때, 현우의 귓가에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음… 으음…
아주 낮은 음으로,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 마치 사람이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간절하게 속삭이는 것 같기도 했다. 소리는 벽 속에서, 아니, 벽 자체가 울리는 듯했다. 파이프 소리와는 전혀 달랐다. 너무나도 뚜렷하고, 너무나도… 살아있는 것 같은 소리였다.
현우의 등골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눈은 접시 파편에서 벽으로, 그리고 다시 방 안을 불안하게 훑었다.
그리고 그때, 그의 시선이 거실 한쪽 벽에 걸린 작은 선반에 닿았다. 지난번 여행에서 사 온, 고풍스러운 문양이 섬세하게 새겨진 작은 목각 인형이었다. 제자리에 있어야 할 그 인형이,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밀린 듯이, 선반 끝으로 스르륵 밀려나더니…
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깨지지 않았다. 조용히, 현우의 발치에 놓였다. 마치 그를 향해 무언가를 내밀듯이.
현우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눈앞에서 벌어진 일은 어떤 합리적인 설명으로도 납득할 수 없었다. 건망증? 피로? 착시? 그 모든 의심과 자기 합리화가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그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깨진 접시 파편, 바닥에 놓인 목각 인형, 그리고 여전히 벽 속에서 울려 퍼지는 섬뜩한 웅얼거림.
이건 꿈이 아니었다. 환영도 아니었다.
이곳에, 이 아파트 203호에, 그와 함께… 무언가 있었다.
현우는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누구에게 전화를 걸어야 할까? 아니, 대체 누가 그의 말을 믿어줄까?
그는 아무것도 누르지 못한 채, 숨죽인 채, 눈앞의 미스터리한 존재를 마주하고 서 있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낡은 흙냄새와 종이 냄새가 희미하게 그의 코를 스쳤다.
현우의 삶은, 그날 밤 완전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