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 오페라 독립적인 단편 소설

김민준은 퇴근 후 1207호 현관문을 열 때마다 늘 똑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낡았지만 내 집이었고, 비록 대출금은 상당했지만 온전히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고층 아파트의 12층, 한강이 멀리 보이는 동향 창문은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했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에 돌아와 배달 음식을 시키거나 간단히 요리하고, TV를 보거나 스마트폰을 뒤적이다 잠드는 것. 그의 세계는 딱 이 1207호와 회사, 그리고 퇴근길 번화가가 전부였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았다. 주말 아침, 막 내린 커피를 마시려는데 탁자 위에 놓아두었던 리모컨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제 분명 여기 뒀는데…” 중얼거리며 한참을 찾았다. 소파 쿠션 밑, 책상 서랍, 심지어 냉장고 안까지 뒤진 후에야 침대 맡 협탁에서 발견했다. 고개를 갸웃했지만, ‘내가 깜빡했겠지’ 하고 넘겼다.

이후에도 그런 일은 반복됐다. 욕실 선반에 있던 칫솔이 어느 날 갑자기 바닥에 떨어져 있거나, 충전 중이던 휴대폰이 콘센트에서 뽑혀 있거나, 분명 잠갔던 현관문이 살짝 열려 있는 식이었다. 처음엔 건망증이 심해졌나 싶어 메모를 하거나 CCTV를 설치할까 고민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이건 단순한 건망증이 아니었다.

어느 비 오는 밤이었다. 민준은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영화를 보고 있었다. 키보드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영화를 일시정지하려는데, 키보드가 툭,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무릎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깜짝 놀라 주워 올리려는 순간, 키보드가 바닥에 닿기 직전 공중에 멈췄다. 정확히 3초. 그 짧은 시간 동안, 민준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키보드는 마치 투명한 손에 들린 것처럼 허공에 매달려 있다가, 이내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젠장… 뭐야?”

민준은 등골에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영화는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그는 키보드를 집어 들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날 밤, 민준은 잠들지 못했다. 거실 소파에 앉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창밖으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들은 그를 더욱 고독하고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후 현상은 더욱 노골적이고 기괴해졌다.
컵은 저절로 떨어져 깨지고, 냉장고 문은 밤마다 스르륵 열렸다 닫혔다. 가장 소름 끼치는 것은 소리였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낮은 속삭임이나, 금속이 긁히는 듯한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이웃집 소리라고 생각했지만, 소리는 언제나 그의 아파트 안에서, 심지어 그의 등 뒤에서 들렸다.

민준은 휴대폰으로 녹음을 시작했다. 밤마다 녹음기를 켜놓고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재생되는 음성 파일에는 그의 숨소리 외에도 설명할 수 없는 기계음과 노이즈, 그리고 정체불명의 저음이 담겨 있었다. 마치 오래된 라디오에서 잡음 섞인 외계 언어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미쳐가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이 집에 무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친구나 가족에게 이야기해 봤자 정신병원에 가보라는 소리만 들을 게 뻔했다.

그러다 어느 날,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했다. 모든 현상은 밤 10시부터 새벽 3시 사이에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그리고 항상 같은 장소, 거실 한가운데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마치 그곳이 어떤 에너지의 진원지라도 되는 것처럼.

민준은 더 이상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은 피곤에 절어 있었고, 신경은 극도로 날카로워져 있었다. 퇴근 후 집에 들어서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도망칠 수도 없었다. 이 집은 그의 유일한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어느 금요일 밤, 민준은 거실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운 채였다. 불은 켜지 않았다. 오로지 스마트폰 액정에서 새어 나오는 푸른빛만이 그의 얼굴을 비췄다. 그의 앞에는 삼각대에 고정된 캠코더가 거실을 비추고 있었다. 그는 혹시 모를 상황을 모두 기록하기로 결심했다.

밤 11시 30분.
갑자기 실내 온도가 뚝 떨어졌다. 민준의 입김이 뿌옇게 변해 공중에 흩어졌다.
“뭐야…”
그의 눈앞에 놓인 커피 테이블 위, 그가 방금 마시다 둔 머그컵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컵은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멈칫하더니, 그대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 컵을 들어 올리는 것처럼.

민준은 숨을 멈췄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컵은 그의 눈높이까지 떠올랐다가, 이내 거실 한가운데로 움직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컵은 갑자기 팽이처럼 회전하기 시작했다. 컵 안의 남은 커피 방울들이 원심력에 의해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이어서 그의 등 뒤에 있던 장식장의 작은 도자기 인형, 벽에 걸린 액자, 심지어 천장의 조명까지도 덜덜 떨리며 공중으로 떠올랐다.

마치 중력이 제멋대로 노는 듯한 광경이었다.
“안 돼… 이건 아니야…”
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의 눈에는 공포와 함께 알 수 없는 경외심마저 서렸다.

그때였다.
거실 한가운데, 허공에 떠 있는 물체들 아래, 바닥에서부터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빛은 점점 강렬해지며 형태를 갖췄다. 불규칙한 삼각형과 사각형이 기하학적으로 뒤섞인 문양이었다. 그것은 바닥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마치 허공에 떠 있는 홀로그램처럼 실체를 가진 빛의 문양이었다.

문양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그 문양의 한가운데, 공간이 일렁였다. 공기가 물결치듯 흔들리더니, 검은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은 아주 작았다가, 삽시간에 커져 민준의 키만 해졌다.

그 균열 너머에는, 밤하늘이었다.
아니, 그가 아는 밤하늘이 아니었다. 서울의 뿌연 하늘이 아니라, 수억 광년 떨어진 우주의 심연이었다.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형형색색의 성운들이 뒤엉켜 있었고, 태양보다 몇십 배는 큰 거대한 별들이 차가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은하수조차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스케일의 우주 풍경이 균열 너머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광활한 우주를 배경으로, 믿을 수 없는 거대한 물체가 떠 있었다.
그것은 마치 도시 전체를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금속성의 외피는 무수한 층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언어로 새겨진 복잡한 문양과 빛을 깜빡이는 수많은 창들이 박혀 있었다. 거대한, 살아있는 듯한 우주선이었다.

민준은 자신이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그의 눈은 균열 너머의 광경에 완전히 사로잡혔다. 아파트 1207호의 거실 벽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우주가 열린 것이다.

그때, 균열에서 약한 파동이 흘러나왔다. 파동은 소리가 아니라, 직접 그의 뇌를 때리는 듯한 감각이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그의 의식 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것은 고통이자 절규였고, 동시에 거대한 지식의 물결이었다.

‘…침식… 차원 붕괴… 구조 장치… 오류… 연결… 고립…’

파편적인 단어들과 함께, 거대한 우주선이 겪고 있는 절박한 상황이 그의 머릿속에 이미지로 그려졌다.
그것은 차원의 틈새를 이동하는 고대 문명의 유물이었다. 시공간을 항해하며 새로운 행성을 찾던 중, 알 수 없는 사고로 인해 현재의 지구와 우연찮게 겹쳐버린 것이다. 정확히는, 이 1207호 아파트의 거실이 그 유물의 ‘비상 착륙 지점’ 혹은 ‘임시 정착점’이 되어 버린 셈이었다. 폴터가이스트 현상은 유물이 이 차원에 안정적으로 정착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산물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파동은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고립된 채, 에너지를 잃고 서서히 이 차원에 갇혀버릴 위기에 처한 채.

민준은 비틀거렸다. 그의 몸은 이 엄청난 정보의 홍수를 감당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다시 균열 너머의 우주선을 바라봤다. 이제는 공포가 아니었다. 멍한 경이로움과 함께, 자신의 평범했던 삶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진실과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살고 있는 아파트 1207호는 더 이상 단순한 집이 아니었다.
그것은 한때 평범한 인간이었던 김민준이 거대한 우주 문명의 조난 신호를 처음으로 수신한, 우주와 지구를 잇는 불완전한 다리였다.

균열 너머의 우주선은 마치 그를 기다리는 것처럼 고요하게 떠 있었다.
빛의 문양이 깜빡였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차원 균열의 가장자리에 닿았다.
그 순간, 아파트 전체가 거대한 엔진처럼 웅웅거렸다.
그것은 시작이었다.
평범한 아파트 1207호의 김민준에게, 우주의 서막이 열리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평범한 존재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