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주저앉았다. 희뿌연 먼지가 목울대를 스쳐 지나갔지만, 뱉어낼 기력조차 없었다. 사방은 무너진 콘크리트 잔해와 녹슨 철근들이 뼈대처럼 뒹굴고 있었다. 한때 번화했을 거리는 이제 거대한 괴물의 뱃속처럼 음울했고, 어디선가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만이 그 고요를 뒤흔들었다. 배는 이미 며칠째 비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먹었던 딱딱한 건빵 조각은 이제 아득한 기억처럼 멀게 느껴졌다.
강우는 낡은 배낭을 고쳐 메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살아야 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서, 미친 듯이 살아남아야 했다.
오래된 백화점 잔해를 지나던 중이었다. 지진으로 한쪽 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건물 지하에서 묘한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희미한 ‘틈’이 보였다. 단순한 틈이 아니었다. 주위의 다른 폐허와는 확연히 다른, 어딘가 이질적인 기운이 감돌았다.
‘설마, 던전인가…?’
강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던전은 위험했지만, 동시에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의 보고였다. 물, 식량, 때로는 아주 값비싼 고대 유물까지. 그는 더 이상 주저할 수 없었다. 목마름과 허기는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녹슨 철문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안은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휴대용 손전등을 켰지만, 빛은 겨우 몇 걸음 앞만을 비출 뿐이었다. 벽은 습기로 축축했고, 코끝을 찌르는 곰팡이 냄새와 흙먼지 냄새가 섞여 역겨웠다. 천장에서는 불규칙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젠장… 이건 뭐… 동굴도 아니고.”
그의 목소리는 어둠 속에서 힘없이 흩어졌다. 바닥에는 부서진 집기류와 알 수 없는 끈적이는 자국들이 널려 있었다.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야 했다. 이곳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었다.
몇 걸음 더 깊이 들어갔을 때였다.
삑! 삑!
어둠 속에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낡은 쇠 파이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낡았지만, 그의 생명을 수없이 지켜준 유일한 무기였다.
희미한 손전등 불빛 아래, 움직이는 그림자가 포착됐다. 바퀴벌레를 닮았지만, 크기는 강아지만큼 거대한 변이체였다. 녀석의 등껍질은 기름처럼 번들거렸고, 뾰족한 다리들은 끊임없이 바닥을 긁어댔다.
“망할… 이런 곳까지 기어들어왔군.”
변이체는 강우를 발견했는지,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강우는 이를 악물었다. 피할 곳은 없었다. 쇠 파이프를 휘둘렀다. 쾅! 단단한 등껍질에 부딪힌 파이프가 튕겨 나갔다. 녀석은 멈추지 않고 그의 다리를 물어뜯으려 했다. 강우는 간발의 차이로 뒤로 물러나며, 파이프 끝으로 녀석의 다리를 찍어 눌렀다. 끽! 녀석이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곧바로 균형을 잡고 다시 달려들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녀석은 약점이 있었다.’
강우는 녀석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돌진 직전, 녀석의 머리 위에서 짧게 빛나는 붉은색 점을 보았다. 감각이 외쳤다. 저곳이다!
변이체가 다시 덤벼드는 순간, 강우는 몸을 낮춰 녀석의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온몸의 힘을 실어 파이프를 위로 찔러 올렸다. 콰직! 둔탁한 소리와 함께 녀석의 붉은 점이 터져 나갔다. 역겨운 푸른색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고, 녀석은 경련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내 모든 움직임을 멈추었다.
강우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살았군….”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 뻔했지만, 그는 겨우 자세를 바로잡았다. 죽은 변이체를 발로 뒤집었다. 녀석의 몸체 아래에는 끈적이는 거미줄 같은 것이 얽혀 있었고, 그 안에 작은 배낭 하나가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서 싸우다 죽은 흔적이었다.
배낭 안에는 낡은 구급상자와, 플라스틱 물병, 그리고 바싹 마른 육포 몇 조각이 들어 있었다. 물병 안에는 깨끗한 물이 절반쯤 남아 있었다. 강우는 망설임 없이 물을 벌컥벌컥 마셨다. 며칠간 쌓였던 갈증이 한순간에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육포를 뜯어 입에 넣었다. 질겼지만, 그 어떤 산해진미보다 달콤했다.
“이 정도면… 살았어.”
그는 잠시나마 허기와 갈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하지만 안도감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다시, 이번에는 훨씬 더 크고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쿵… 쿵… 쿵….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듯한 둔탁한 진동이었다. 바닥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강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이것은 방금 쓰러뜨린 작은 변이체와는 차원이 다른 존재였다.
“젠장… 벌써부터….”
그는 손전등을 소리의 근원지를 향해 비췄다. 빛이 미치지 못하는 깊은 어둠 속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섬뜩한 붉은 눈이 어둠 속에서 번뜩였다. 녀석의 압도적인 크기와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강우의 온몸을 짓눌렀다. 본능이 경고했다. 도망쳐야 한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듯했다.
거대한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한 발짝, 강우 쪽으로 움직였다. 그 순간, 던전 전체가 뒤흔들리는 듯한 진동이 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