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첫 번째 챕터 – 흔들리는 벽
“젠장, 늦었잖아!”
현우는 침대에서 굴러 떨어지듯 몸을 일으켰다. 습관적으로 팔을 뻗어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폰을 더듬었다. 오전 8시 47분. 알람은 분명 7시에 맞춰두었는데, 어째서? 설정을 잘못했나? 하지만 지난 3년간 단 한 번도 알람이 울리지 않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폰 화면은 평소와 달리 왠지 모르게 흐릿했다. 지문 인식이 몇 번이나 실패하고 나서야 간신히 잠금화면이 풀렸다.
“하아… 오늘 제출할 기획안인데.”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퉁퉁 부어있었고, 눈가에는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어제 밤샘 작업의 여파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지만, 왠지 모르게 몸이 축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마치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게 아니라, 억지로 수면 상태에서 끌려 나온 것 같은 불쾌감.
아파트 거실은 여전히 어둑했다. 두툼한 암막 커튼 탓에 아침 해가 제대로 들어오지 못해서였다. 현우는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텅 빈 위장이 차가운 물로 채워지자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물컵을 들고 식탁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쨍그랑!
손에 쥐고 있던 유리컵이 그의 손에서 미끄러져 떨어졌다. 정확히는, 미끄러졌다기보다는… 누군가 뒤에서 팔을 툭 친 것처럼, 컵이 갑자기 손아귀에서 튕겨 나가 바닥에 부딪혔다.
“악!”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현우는 순간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 쳤다. 발가락 끝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쳤다.
“뭐야, 왜 이래?”
당황스러움이 온몸을 지배했다. 피곤해서 헛것이 보였나? 분명 컵을 꽉 쥐고 있었다. 식탁에 놓으려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힘이 빠져서 놓친 것도 아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이 그의 팔을 밀어낸 것처럼.
피곤하면 별의별 착각을 다 한다고, 현우는 애써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어제 밤샘 작업 때문에 몸이 많이 지쳐있었다. 이런 어이없는 실수는 처음이었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충 파편을 치우고, 현우는 다시 노트북 앞으로 돌아왔다. 마감 시간이 임박한 기획안을 손봐야 했다. 키보드 위로 손가락이 빠르게 움직였다. 타닥타닥, 타닥타닥. 그의 집중은 온전히 화면 속 글자들에 쏠려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싸늘한 한기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분명 에어컨은 꺼져 있었다. 보일러도 작동하지 않는 한여름이었다. 몸살이라도 오려나? 현우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책상 한쪽에 놓여 있던 액자 하나가 스르륵 움직였다.
정확히는, 액자가 천천히 옆으로 밀렸다. 마치 누군가 그 액자를 만진 것처럼.
현우는 굳었다. 움직인 액자는 몇 년 전 부모님과 함께 여행 가서 찍은 사진이 담긴 것이었다. 그 액자는 늘 그 자리에 완벽하게 놓여 있었다. 그는 숨을 죽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비볐지만, 액자는 여전히 살짝 기울어진 채 놓여 있었다.
“어… 내가 움직였나?”
아니다. 절대로 아니었다. 그는 액자를 만진 적이 없었다. 최소한 어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는. 설마 고양이라도 들어왔나? 현우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아니, 그럴 리가. 이 아파트엔 외부인이 들어올 수 없게 보안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 게다가 그는 혼자 살았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괜히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애써 무시하고 액자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오직 기울어진 액자의 잔상만이 맴돌았다.
똑. 똑. 똑.
이번에는 명확한 소리였다. 마치 누군가 망치로 벽을 두드리는 듯한 소리. 거실 벽에서 울려 퍼졌다. 현우는 귀를 기울였다. 분명 그가 사는 아파트의 벽에서 나는 소리였다.
“누구세요?”
현우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물론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아파트는 최상층이었다. 위층에 사람이 살 수 없는 구조였다. 옆집과의 간격도 꽤 떨어져 있어서 이런 식의 소음은 들리지 않는 게 정상이었다.
다시 한번 똑. 똑. 똑.
소리는 아까보다 더 또렷해졌다. 현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발소리를 죽인 채 벽 쪽으로 다가갔다. 귀를 바싹 대었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가 벽에 귀를 떼는 순간, 다시 소리가 울렸다.
똑!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그리고 아주 가까이에서. 마치 벽 안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현우는 소름이 돋았다. 등골을 타고 오르는 오싹함에 털이 쭈뼛 섰다. 그는 황급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김민준! 너 지금 뭐하냐?”
“뭐야, 이 시간에 웬일이냐? 나 지금 한창 게임 중인데. 설마 또 마감 전 급한 불 끌 일 생겼냐?”
수화기 너머 민준의 목소리는 평화로웠다. 그 평화로움이 오히려 현우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야, 너… 혹시 집에 이상한 일 생긴 적 없어?”
“이상한 일? 뭔데? 갑자기 왜?”
“아니, 그게… 우리 집이 좀 이상해. 방금 전에도 유리컵이 저절로 떨어지고, 액자가 움직이고, 지금은 벽에서 소리가 나.”
현우는 최대한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려 애썼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하하! 야, 너 어제 또 밤새워 일했지? 피곤해서 헛것 보는 거 아니냐? 유리컵 떨어뜨린 건 네가 졸려서 놓친 거고, 액자는 잠결에 건드렸겠지. 벽 소리는 뭐, 윗집에서 인테리어 공사하는 소리겠지.”
민준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니라니까! 우리 집 최상층이잖아. 윗집 없어. 그리고 내가 진짜 똑똑히 봤다고!”
“야, 현우야, 그만 좀 해라. 귀신이라도 봤냐? 미쳤냐? 아니면 여자친구라도 사귀어서 밤잠 설친 티 내냐?”
민준의 놀림 섞인 말이 그의 짜증을 돋웠다. 그래, 민준이라면 이렇게 반응할 것이었다. 현실적이고, 미신을 믿지 않는 녀석. 하지만 현우는 지금 자신이 겪는 일이 단순한 피곤 때문이 아니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꼈다.
“됐다, 됐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하겠지. 전화 끊어.”
현우는 전화를 끊었다. 민준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시 거실 벽을 쳐다봤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더욱 깊은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진짜 내가 피곤해서 그런가?’
현우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여전히 완성되지 못한 기획안이 그를 압박했다. 애써 이상한 일들을 머릿속에서 지우려 노력했다.
그때였다.
쿵!
이번에는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리였다. 마치 천장에서 커다란 짐 덩어리가 떨어진 듯한 묵직한 충격음.
현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천장은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하지만 소리는 분명히 천장에서 났었다. 그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쿵! 쿵! 쿵!
이번에는 세 번 연속으로 울렸다. 마치 누군가 발을 구르며 뛰어다니는 소리 같았다.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누구야…?”
현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이제는 도저히 환청이나 착각으로 치부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을 기댔다. 쿵, 쿵, 쿵. 소리는 계속되었다. 이번에는 그의 머리 위를 넘어, 집 전체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마치 집 자체가 흔들리는 것처럼.
갑자기 거실 조명이 깜빡거렸다. 마치 정전이라도 온 것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 그리고 완전히 꺼져 버렸다.
암흑.
새카만 어둠 속에서 현우는 얼어붙었다. 심장이 발작하듯 미친 듯이 뛰었다.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리고 그 어둠 속에서, 그는 보았다.
희미하게, 아주 잠시였다.
거실 한가운데, 테이블 위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흐릿한 초록빛 섬광. 마치 아주 오래된 필름 사진처럼, 찰나의 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섬광과 함께, 현우의 눈앞에 흐릿한 형상이 스쳐 지나갔다. 낯선 가구들, 바랜 벽지, 그리고… 오래된 옷을 입은 사람의 뒷모습.
“읍…!”
짧은 신음과 함께, 현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거실 조명이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초록빛 섬광도, 낯선 풍경도, 사람의 형상도.
모든 것이 제자리였다. 하지만 현우는 알고 있었다.
방금 일어난 일은 현실이었다.
그의 아파트가, 지금, 이상해졌다. 그리고 그 이상함은 단순한 폴터가이스트 현상을 넘어선 무언가였다.
현우는 숨을 헐떡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그는 더 이상 이 아파트에 혼자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무언가에 쫓기듯 현관문으로 향했다. 문고리를 잡는 순간,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그의 손에 전해졌다.
그때, 현관문이 저절로 안으로 열렸다.
끼이이익-
마치 누군가 문을 잡아당긴 것처럼.
현우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익숙한 아파트 복도가 아니었다.
어둡고 길게 뻗은 복도. 오래된 전등이 희미하게 깜빡거리고 있었다. 벽지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누렇게 바래 있었다. 그리고 복도 끝, 창문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현대 도시의 빌딩 숲이 아니었다.
낡고 허름한 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이름 모를 오래된 동네였다.
현우는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의 심장이 멈춘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파트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의 집은… 더 이상 그의 집이 아니었다.
벽은 곰팡이로 얼룩져 있었고, 가구들은 낡고 해진 채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의 노트북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낡은 나무 책상이 놓여 있었다.
현우는 눈을 비볐다. 다시 눈을 떴지만, 풍경은 바뀌지 않았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마치 시간이 뒤틀린 듯한 낯선 공간이었다.
공포가 그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집어삼켰다.
“여기가… 대체 어디야…?”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가늘게 떨렸다. 마치 꿈속을 헤매는 듯한 비현실적인 감각.
그러나 차가운 복도의 공기가, 그의 피부에 닿는 순간 깨달았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그의 아파트는 사라지고, 그는 알 수 없는 과거의 공간에 놓여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현우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텅 빈 복도를 응시했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그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섬뜩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의 뒤편,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쿵!
그리고 다시, 암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