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둑한 숲의 숨결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었다. 고요한 적막 속, 짐승의 기척만이 희미한 바람결에 실려 온다. 진은 바위 위에 웅크린 채, 숨조차 제대로 쉬지 않았다. 눈앞의 수풀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순간, 그의 손아귀에 들린 낡은 활이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크릉…*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 거대한 멧돼지의 형체가 덤불을 헤치고 나타났다. 녀석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고, 송곳니는 닳고 닳아 날카로운 칼날 같았다. 진은 심장이 격렬하게 요동치는 것을 느꼈지만, 그의 시선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오랜 사냥으로 단련된 그의 몸은 이미 다음 동작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냥꾼의 눈.”
작게 읊조리자, 시야가 푸른빛으로 물들며 멧돼지의 급소가 선명하게 강조되었다. 목덜미, 그리고 심장.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진은 숨을 멈추고 활시위를 놓았다.
쉬이이익!
화살은 바람을 가르며 날아가 정확히 멧돼지의 목덜미에 박혔다. 녀석은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을 뒹굴었지만, 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재빨리 두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시스템 메시지: ‘빠른 사격’ 스킬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두 번째 화살이 심장을 꿰뚫자, 멧돼지의 거친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거대한 몸뚱이가 털썩,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진은 잠시 숨을 고르며 떨리는 손으로 활을 내렸다.
*시스템 메시지: ‘거친 숲의 멧돼지’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시스템 메시지: ‘야생 멧돼지 가죽’, ‘멧돼지 이빨(상급)’, ‘신선한 멧돼지 고기(5kg)’를 획득했습니다.*
“휴… 오늘도 겨우 성공했네.”
진은 거친 숨을 내쉬며 멧돼지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매일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에 나서는 건 오직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었다. 잿골. 그가 태어나고 자란, 잿빛 연기만 피어오르는 듯한 작은 마을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거대한 멧돼지의 가죽을 벗기고, 살코기를 정성껏 발라내 주머니에 담는 동안, 진의 머릿속에는 온통 마을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특히, 여동생 아린의 밝은 미소. 그 미소를 지켜주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험난한 사냥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터였다.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숲을 빠져나오자, 저 멀리 잿골 마을의 낡은 지붕들이 보였다. 흙과 나무로 대충 지어진 집들, 밭이라고 하기엔 황량한 메마른 땅. 벨라스트 제국의 수도 아르카디아의 휘황찬란한 첨탑과는 너무나도 다른 풍경이었다. 제국의 눈에는 잿골 같은 외딴 마을은 그저 세금을 뜯어낼 자원, 혹은 귀찮은 벌레떼쯤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마을 어귀에 다다르자, 몇몇 아이들이 진을 발견하고 달려왔다.
“오빠! 오빠 왔다!”
“진 오빠! 오늘은 뭐 잡았어?”
그중 가장 먼저 달려온 이는 아린이었다. 반짝이는 눈으로 진을 올려다보는 아린의 얼굴에는 천진난만한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진은 아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무거운 짐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큼지막한 멧돼지를 잡았다. 고기 좀 나눠줄 테니, 저녁에 맛있게 구워 먹어라.”
아이들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멧돼지 고기는 잿골 사람들에게 귀한 식량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진에게 다가와 그의 사냥감을 보고 감탄사를 연발했다.
“진아, 정말 대단하다! 네 덕분에 오늘 저녁은 포식하겠구나.”
“그래, 진이 없었으면 우리는 다 굶어 죽었을 게다.”
어르신들의 칭찬에 진은 쑥스러운 듯 웃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무거웠다. 언제까지 이렇게 하루하루 사냥에만 의존하며 살아야 할까. 제국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그때였다.
멀리서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는 일단의 무리가 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들의 갑옷은 햇빛에 번쩍였고, 깃발에는 벨라스트 제국의 상징인 검은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다.
“제… 제국군이다!”
누군가의 외침에 마을 사람들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이들은 재빨리 어른들의 뒤로 숨었고, 노인들은 굳은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진의 주먹이 저절로 꽉 쥐어졌다. 올 것이 왔구나.
제국군 기사들이 마을 한복판에 멈춰 섰다. 그들의 말발굽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잿골의 평화로운 오후를 산산조각 냈다. 기사들의 대장인 듯 보이는 자가 말에서 내려 거만한 표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이곳이 잿골인가. 벨라스트 제국의 은혜로운 통치 아래, 무사히 숨 쉬고 있는 고마움을 모르는 벌레떼들의 소굴이렷다.”
그의 비아냥거림에 마을 사람들은 고개를 숙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진은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명령이다. 잿골에 부과된 특별 세금을 징수하러 왔다.” 대장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수도 아르카디아의 보급량을 채워야 할 터. 당장 가구당 은화 50닢, 그리고 사냥꾼들은 사냥감의 절반을 바쳐라.”
은화 50닢. 그건 잿골 사람들에게는 한 달치, 아니 두 달치 식량에 맞먹는 돈이었다. 게다가 사냥감의 절반이라니. 진이 방금 잡아온 멧돼지의 절반을 빼앗아 가겠다는 말이었다.
“대… 대장님! 이건 너무하십니다! 지난달에도 식량세를 내지 않았습니까? 이제는 더 낼 것이 없습니다!”
마을의 최고 어른인 돌쇠 할아버지가 용기를 내어 앞으로 나섰다. 그의 등은 굽어 있었고, 목소리는 떨렸지만, 그의 눈에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닥쳐라, 늙은이.” 대장은 할아버지의 뺨을 거칠게 후려쳤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할아버지는 땅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이것이 제국의 명령에 불복하는 자의 말로다. 어서 바치지 못할까! 바치지 않으면 너희 집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릴 것이다!”
진의 눈앞이 순간 붉게 물들었다. 주먹을 꽉 쥐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가려는 순간, 옆에 서 있던 아린이 그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오빠… 안 돼…”
아린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진은 이를 악물었다. 그가 뛰쳐나간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다. 오히려 더 큰 희생을 불러올 뿐. 그는 무릎을 꿇고 쓰러진 돌쇠 할아버지를 보았다.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노인의 얼굴, 그리고 그 옆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어린 아이들.
“내… 내 멧돼지… 절반을 가져가시오!”
진은 결국 무거운 짐을 다시 들었다. 그의 손에서 땀이 흘렀다. 분노와 무력감이 뒤섞인 감정이 심장을 짓눌렀다. 제국군 기사들은 비웃으며 진의 멧돼지 고기 절반과 가죽을 앗아갔다. 다른 집들의 얼마 남지 않은 곡식 자루도 가차 없이 빼앗겼다.
“흐흐, 좋다. 이 정도면 만족스럽군.” 대장이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다음 달에도 잊지 말고 준비해 두어라. 제국은 너희의 ‘충성’을 언제든 요구할 수 있으니.”
그들은 가져갈 것을 다 챙기자마자, 미련 없이 말에 올라 마을을 떠났다. 뒤편으로는 흙먼지가 자욱하게 일었다.
마을에는 깊은 정적만이 감돌았다. 빼앗긴 재물, 그리고 짓밟힌 자존심.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어른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텅 빈 손을 바라보았다.
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고통스럽게 신음하는 돌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의 얼굴은 여전히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십니까?”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이 나라는… 이 제국은… 우리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구나… 흐읍…”
할아버지의 흐느낌이 진의 가슴을 후벼 팠다. 진은 고개를 들었다. 제국군이 사라진 방향, 흙먼지가 여전히 하늘을 가로막고 있는 그곳을 향해 그의 시선이 향했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무력감에 젖어 있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시스템 메시지: ‘억압받는 자들의 분노’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퀘스트 목표: 벨라스트 제국의 불의에 저항하는 세력을 찾아라.*
*퀘스트 보상: ???*
진은 나직이 읊조렸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어.”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그는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잿빛 연기 가득한 잿골의 풍경이 아닌, 불타오르는 제국의 심장이었다. 이제, 평범한 사냥꾼이었던 진의 삶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