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협 (신선)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잿빛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푸르렀던 산과 들은 기억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망령이 되었고, 하늘은 늘 흙먼지와 독기로 탁했다. 숨 쉬는 것조차 투쟁인 세상. 련은 그 투쟁의 한가운데서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크으….”

마른 기침과 함께 흙먼지가 목구멍을 긁었다. 사흘째 아무것도 입에 대지 못했다. 가진 거라곤 허리춤에 찬 낡은 검과, 그보다 더 낡아버린 도포 한 벌이 전부였다. 뱃속에선 진작부터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더 큰 문제는 몸속에 흐르는 미미한 진기(眞氣)마저 바닥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굶주림보다 먼저, 혼이 꺼져버릴 터였다.

그의 눈은 희뿌연 시야 속에서도 끈질기게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잔해가 멀리 아스라이 보였다. 한때는 찬란한 문명과 강력한 선문(仙門)이 번성했던 곳. 지금은 그저 거대한 돌무더기요, 괴수들의 안식처일 뿐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직 희미하게나마 생명의 기운이 남아있는 마지막 희망이기도 했다.

끼이이익—!

귓가를 찢는 듯한 금속음이 들렸다. 녹슨 고철 조각들이 바람에 쓸려 서로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련의 신경을 긁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이런 소리는 이미 익숙했다. 오히려 그는 맹수처럼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주변의 무너진 잔해들을 방패 삼아 움직였다. 그의 시선은 고정된 한 점을 향해 있었다.

수백 미터 떨어진 곳. 삐죽삐죽 솟아난 철근과 깨진 콘크리트 더미 사이에서, 희미한 영력(靈力)의 파동이 감지되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저 폐허의 잡음으로 들릴지 몰라도, 련에게는 생존의 신호였다. 그것은 분명 ‘돌심장 이리’였다. 멸망 이후, 대지에 흩어진 영기의 조각들을 흡수하여 몸이 돌처럼 단단해진 변이된 짐승. 그놈의 몸속에는 진기를 갈구하는 련에게는 귀한 영핵(靈核)이 들어있었다.

‘운이 좋군. 이 먼 곳까지.’

련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돌심장 이리는 영리하고 흉포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보통은 무리지어 다니지만, 홀로 떨어져 나온 개체라면 충분히 노려볼 만했다. 물론,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사냥이었지만.

휘이이잉— 바람이 모래를 흩날렸다. 련은 폐허를 따라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발아래 부서진 돌멩이들이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숨소리조차 죽이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뎠다. 그의 온 신경은 돌심장 이리의 움직임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놈은 아마도 폐허 깊숙한 곳, 과거의 거대했던 건물 지하 어딘가에서 나온 것일 터였다. 련은 그 지리에 대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옛 선문이 수련했던 장소였고, 아직도 지하에는 미지의 공간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수십 분의 은밀한 추적 끝에, 련은 돌심장 이리와의 거리를 오십 미터 이내로 좁혔다. 놈은 웅크린 채 고개를 낮추고 있었다. 멀리서는 알아차리기 힘들었으나, 가까이서 보니 온몸을 뒤덮은 회색빛 털이 마치 날카로운 바윗덩이들 같았다. 등줄기를 따라 박힌 뿔 같은 돌기들은 햇빛에 희미하게 반사되며 섬뜩한 광채를 뿜었다. 영력의 파동은 분명 미약했지만, 그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은 굶주린 련의 심장을 거세게 울렸다.

‘…들켰나?’

돌심장 이리가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콧구멍을 벌렁이며 바람의 냄새를 맡는 듯했다. 련은 나무 더미 뒤에 완벽하게 몸을 숨겼지만, 이리들의 후각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했다. 놈의 노란 눈동자가 번뜩이며 련이 숨어있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했다.

크르르르…!

목구멍 깊은 곳에서 뿜어져 나오는 낮고 위협적인 울음소리. 놈은 이미 련의 존재를 눈치챘다. 련은 더 이상 숨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허리춤의 낡은 검을 뽑아 들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녹슬었지만 날카로운 칼날이 햇빛을 받아 섬뜩하게 빛났다.

돌심장 이리는 련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맹렬하게 돌진했다. 거대한 몸집에도 불구하고 놈의 움직임은 놀랍도록 빨랐다. 땅이 울리는 듯한 진동과 함께 육중한 몸뚱이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련은 본능적으로 몸을 옆으로 틀며 칼을 휘둘렀다.

쉬이이익—!

낡은 검이 공기를 가르며 이리의 옆구리를 노렸다. 하지만 놈의 몸은 단단했다. 칼날이 닿는 순간, 마치 바위를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칼날이 미끄러지며, 이리의 옆구리에서 불꽃이 튀었다. 깊은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젠장…!”

련은 급히 뒤로 물러섰다. 이리는 한 번의 공격으로 련을 제압하지 못하자, 더욱 격분한 듯 포효했다. 그 소리에 주변의 낡은 건물 잔해들이 가볍게 진동하는 듯했다. 놈은 련에게 재차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더욱 교활하게, 무너진 벽 뒤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

콰아앙!

련은 간신히 몸을 피했지만, 이리의 발톱이 긁고 지나간 자리에는 거대한 바위 파편들이 흩날렸다. 그의 뺨을 스쳐 지나간 바람에도 흙먼지와 비릿한 짐승 냄새가 진동했다. 위험했다. 이대로는 진기를 소모하기만 할 뿐이었다. 련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오랜 시간 단련해 온 가장 기본적인 검술, ‘단공검결(斷空劍訣)’을 떠올렸다.

‘혼(魂)이여, 검(劍)이 되어라!’

몸속 깊이 잠재된 미미한 진기가 그의 팔로, 그리고 낡은 검으로 흘러들었다. 검날에서 희미하게 푸른빛이 감돌았다. 한순간, 련의 움직임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였다. 짐승처럼 달려드는 이리의 움직임을 읽어내고, 그 맹렬한 공격의 틈을 노렸다.

촤악—!

이리가 몸을 돌려 발톱으로 련의 머리를 노리는 순간, 련은 몸을 낮춰 놈의 복부 아래를 파고들었다. 검끝은 정확히 놈의 심장이 있을 법한 자리를 향했다. 일격필살. 이리의 단단한 외피를 뚫을 수 있는 유일한 약점.

크어어어억—!

처음으로 돌심장 이리에게서 고통에 찬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련의 검이 놈의 복부를 깊이 파고들었다. 검날이 놈의 심장부를 관통하자, 푸른빛 영기가 스며들며 짐승의 몸에 경련이 일어났다. 돌처럼 단단하던 몸이 파르르 떨리더니, 이내 거대한 몸뚱이가 털썩, 하고 땅으로 쓰러졌다. 주변의 흙먼지가 다시 한 번 공중으로 치솟았다.

련은 숨을 헐떡이며 주저앉았다. 온몸에 진이 다 빠진 듯했다. 팔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웠고,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쓰러진 이리에게 다가갔다. 심장이 관통된 놈은 이미 숨을 거둔 듯했다. 그의 목적은 단순히 놈을 죽이는 것이 아니었다.

낡은 검으로 이리의 심장 부근을 다시 한 번 갈랐다. 단단한 껍질을 헤치고 들어가자, 이내 검끝에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작은 주먹만 한 크기의 돌멩이 같았지만, 은은하게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영핵. 이리가 흡수했던 영기 조각들이 뭉쳐진 결정체. 련은 조심스럽게 그것을 꺼내 들었다.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을 통해 몸으로 스며들었다.

“하아… 하아….”

련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영핵을 움켜쥐었다. 이제 이걸 흡수하면, 잠시나마 진기를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생존의 한 조각. 그는 주변을 경계하며, 영핵을 흡수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폐허가 된 도시의 정적은 다시 찾아왔고, 오직 바람 소리만이 귓가를 스쳤다.

그 순간이었다.

우웅—!

대지가 저 깊은 곳에서부터 울리는 듯한, 둔탁하고 거대한 진동이 느껴졌다. 련의 몸이 저절로 휘청거렸다. 바닥에 놓여 있던 돌멩이들이 약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 진동은 점차 강해지더니, 이내 폐허 건너편, 거대하게 무너진 옛 선문의 중심부에서 시작된 듯했다.

크르르르르릉—!

이리보다 훨씬 깊고,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는 짐승의 울음소리가 련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단순한 짐승의 울음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대지 자체가 내는 소리 같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포효였다.

련은 고개를 들었다. 희뿌연 하늘 아래, 멀리 폐허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압도적인 크기. 그 존재는 지금까지 련이 상대했던 어떤 변이 괴수보다도 거대하고 강력해 보였다. 영핵을 쥔 련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맺혔다.

‘…뭐지?’

그것은 이리가 아니었다. 이리들의 왕? 아니, 그보다 훨씬 오래되고 강력한 존재였다. 마치 폐허 그 자체의 일부인 듯, 거대한 몸을 이끌고 련의 방향으로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방금 얻은 영핵의 기운을 흡수할 틈도 없이, 련은 더욱 거대한 위협에 직면한 것이다.

쿵. 쿵. 쿵.

거대한 발소리가 대지를 울리며 점차 가까워졌다. 살벌한 기운이 련을 덮쳐왔다. 저 존재는 분명 련이 방금 사냥한 돌심장 이리의 싸움을 감지하고 온 것이 분명했다. 혹은… 영핵의 기운을?

련은 본능적으로 영핵을 쥔 손을 꽉 쥐었다. 그리고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저 괴물과 맞서 싸울 힘은 지금의 련에게는 남아있지 않았다. 살아남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폐허는 도망칠 곳도, 숨을 곳도 마땅치 않은 거대한 죽음의 미로였다.

새로운 절망이 련의 목을 조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