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슬립 (시간여행) 독립적인 단편 소설

강민은 눈을 떴다.

첫 순간, 혼란이 몰려왔다. 코끝을 스치는 냄새는 폐허의 먼지나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아니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향기.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그가 마지막으로 본 잿빛 도시와 너무나도 달랐다. 원색의 간판들이 번쩍이고, 높다란 건물들은 마치 어제 지어진 것처럼 깨끗했다.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

그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과거였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 거라 믿었던, 대붕괴 이전의 세상.

“젠장, 진짜로 돌아왔나.”

강민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그의 온몸은 생존에 최적화된 채로 굳어 있었다. 주변을 스캔하는 시선은 끊임없이 위험을 찾았다. 허물어진 벽, 무너진 지붕, 숨을 곳. 하지만 여기엔 그런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무해했다. 오히려 그 완벽함이 그에게는 가장 큰 위협처럼 느껴졌다.

그의 옷은 낡은 작업복이었다. 흙먼지와 기름때로 절어있던 평소와 달리, 지금은 깨끗하게 빨린 상태였다. 하지만 닳아빠진 부츠와 곳곳이 해진 옷자락은 주변의 말끔한 사람들과는 확연히 대비되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향하는 것 같았다. 그들이 비웃는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기도 했다. 미래에서 온 강민에게는 모든 시선이 잠재적인 위협으로 느껴졌다.

“배고파…”

속에서부터 치미는 허기는 그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미래에서는 매일같이 겪는 일이었지만, 이곳에서는 이런 본능적인 고통 자체가 사치처럼 느껴졌다. 길거리 노점상에서 풍기는 빵 굽는 냄새가 그의 식욕을 미친 듯이 자극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신선한 빵을 먹은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틈에 섞여 조용히 움직였다. 발걸음은 빠르고 민첩했지만, 최대한 눈에 띄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의 시선은 바닥을 향했다. 혹시라도 버려진 음식물, 쓸모 있는 물건이 있을까 해서. 하지만 여기선 그런 것조차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먹을 것을 버렸다. 반쯤 먹다 버린 햄버거, 봉투째 버려진 과자. 그의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저런 낭비라니. 곧 이 모든 것이 사라질 텐데.

한참을 걷다 한적한 뒷골목으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그나마 익숙했다. 오래된 건물들, 낡은 담벼락, 쓰레기가 쌓여있는 구석. 이곳이라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쭈그려 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번에 새로 나온 게임 봤어? 그래픽 진짜 미쳤더라!”
“주말에 백화점에서 세일한대. 명품 가방 하나 질러야지!”
“세상 참 살기 좋다니까. 이런 시절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강민은 비웃음을 참지 못했다. 살기 좋다니. 미친 소리였다. 이 모든 평화가 얼마나 허약한 유리 위에 놓여 있는지, 그들은 알지도 못했다. 그는 낡은 벽돌을 뜯어내며 손톱으로 긁었다.

그때였다. 깡통이 굴러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강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낡은 상자들이 쌓여있는 틈새에서 작은 그림자가 튀어나왔다. 소녀였다. 낡고 해진 옷차림, 지저분한 머리카락.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녀의 모습은 강민의 세상과 더 닮아 있었다.

소녀는 그를 발견하고는 놀란 듯 멈춰 섰다. 그녀의 눈은 경계심과 동시에 호기심으로 가득했다.

“누구세요?” 소녀가 웅크린 채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과거의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은 그의 계획에 없었다. 그의 계획은 오직 생존이었다. 하지만 소녀의 눈빛에서 자신과 비슷한,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홀로 버텨내야 하는 생존자의 고독을 읽어냈다.

“길을 잃었다.” 강민이 겨우 그 말을 내뱉었다. 가장 무해한 거짓말이었다.

소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길을 잃을 데가 어디 있다고… 아저씨 옷은 왜 그래요? 꼭 산에서 막 내려온 사람 같아요.”

“오랜 여행 중이라 그렇다.”

“여행? 어디서 왔는데요?” 소녀는 순수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강민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폐허에서, 굶주림에서, 모든 것이 무너진 종말의 끝에서 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하며 피할 것이다.

그가 대답하지 않자 소녀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고는 낡은 비닐봉투에서 뭘 꺼냈다. 빵 조각이었다. 이미 한입 베어 물었는지 가장자리가 뜯겨 있었다.

“배고파 보여서요.” 소녀가 빵을 내밀었다. “이거라도 드실래요? 방금 얻은 거예요.”

강민은 움직이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그는 미래에서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서 음식을 건네받은 적이 없었다. 음식은 곧 생명이었고, 나누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빵을 받아들었다. 차갑고 딱딱한 빵이었지만, 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처럼 느껴졌다.

“고맙다.” 강민은 겨우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전 지아예요. 아저씨는요?”

“강민.”

“강민 아저씨. 왜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어요?” 지아가 물었다.

강민은 피식 웃었다. 무서운 얼굴이라니. 그저 살아남기 위한 표정일 뿐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 소녀는 이해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이 곧 무너질 걸 아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는 무심코 내뱉었다.

지아는 눈을 크게 떴다. “네? 무너져요? 왜요?”

“자원 때문에 싸우고, 환경은 망가지고, 결국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니까.” 강민의 목소리에는 그가 겪었던 미래의 고통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지아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에이,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지금 얼마나 살기 좋은데. TV에서는 다들 앞으로 더 잘 살 거래요.”

강민은 주변을 둘러봤다. 저 화려한 건물들, 넘쳐나는 자동차, 사람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것이 마치 얇은 유리막처럼 느껴졌다. 언제 깨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는 다시 지아를 보았다.

“너는… 여기서 뭘 하니?” 강민이 물었다.

“저는… 원래 집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서 지내요.” 지아는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버린 물건들 주워서 팔거나, 가끔 식당에서 일하고 그래요. 오늘 이 빵도 식당 아줌마가 주신 거예요.”

강민은 지아에게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생존자의 냄새. 풍요로운 이 세상에서도 구석에서 버텨내고 있는 또 다른 생존자였다. 그녀의 눈은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이곳은… 언제쯤 무너질까.” 강민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가 온 미래는 대붕괴 이후 30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대붕괴 전 얼마의 시간이 남은 걸까? 5년? 10년? 그 시간을 알 수 있다면…

“무너진다니요… 아저씨, 정말 이상해요.” 지아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저도 가끔 그런 생각해요. 이렇게 계속 괜찮을까? 언젠가 다 사라져버리는 건 아닐까?”

그 순간, 강민은 지아에게서 일말의 희망을 보았다. 이 소녀는 본능적으로 미래를,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는 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가 온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통찰력을 이 소녀는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여줄 수 있는 건 없다. 내가 미래에서 왔다는 증거도, 곧 세상이 망할 거라는 증거도.” 강민이 말했다. “하지만 내가 겪은 건 말해줄 수 있다. 만약 네가 믿는다면, 나는 네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아는 그의 눈을 깊이 들여다봤다. 장난기나 거짓말이 아닌, 절박함과 진실만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아니, 자신보다 더 깊은 절망을 겪었을지도 모르는 사람의 눈빛이었다.

“뭘 도와주는데요?”

“준비하는 거다. 모든 것이 무너지기 전에, 살아남을 공간을 만들고, 방법을 배우는 것.” 강민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단호했다. “이곳의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산다. 불이 없으면 어떻게 먹을 걸 만들지, 물이 없으면 어떻게 마실지, 추우면 어떻게 몸을 녹일지. 가장 기본적인 것들 말이다. 미래에서, 그 기본적인 것들이 목숨이 됐다.”

지아는 빵 조각을 마저 먹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삶은 이미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고민하며 흘러가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의 풍요 속에서 자신만은 언제나 다음 끼니를, 다음 잠자리를 걱정했다. 그의 말이 완전히 허황된 소리로 들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속에 숨겨진 불안을 건드리는 말이었다.

“그럼… 아저씨는 뭘 준비하고 싶은데요?” 지아가 물었다.

강민은 고개를 들어 낡은 건물들이 즐비한 뒷골목을 응시했다. 그는 그곳에서 희망을 찾았다. 버려지고 잊힌 공간들, 미래의 생존자들이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바로 그 장소들.

“나는 이곳에서 가장 안전한 곳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요새로 만들 거다.” 강민의 눈빛에 다시 한번 생존자의 불꽃이 타올랐다. 그의 눈은 빛나고 있었다. “너는 이곳의 사람들을 안다. 나는 미래의 지식을 안다. 우리 둘이 힘을 합치면, 어쩌면… 어쩌면 이 비극을 피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우리 자신만이라도.”

지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작은 손이 강민이 던져준 빵 조각을 쥐고 있었다. 빵은 이미 다 먹었지만, 그 온기는 여전히 남아있는 듯했다.

“좋아요, 강민 아저씨. 제가 아저씨를 도울게요. 저도… 무너지는 건 싫어요. 그리고… 왠지 아저씨 말이 진짜 같아요.”

그렇게, 두 명의 이방인. 한 명은 미래에서 왔고 다른 한 명은 현재의 변두리에서 살아가던 두 사람은 황폐해질 세계에 맞서기 위한 아주 작은 첫걸음을 내디뎠다. 어제의 낙원 속에서, 그들은 내일의 생존을 꿈꾸기 시작했다. 강민은 지아의 눈에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작은 희망의 불씨를 보았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이 시대로 돌아온 진짜 이유일지도 몰랐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