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F (공상과학) 라이트 노벨의 흥미진진한 챕터

## 망각된 심연

“철컥, 철컥.”

버려진 관제실의 금속 바닥에 발을 디딜 때마다, 마찰열로 지친 센서들이 희미한 경고음을 토해냈다. 곰팡내와 삭은 금속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진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텅 빈 공간을 가로지르는 것은 오직 진우의 거친 숨소리와, 그가 허리에 찬 낡은 툴벨트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기계음뿐이었다. 외부와 차단된지 수십 년은 족히 넘었을 이곳은, 한때 태양계 외곽의 광물 행성 개발을 위한 전진 기지였으나, 이제는 거대한 우주 쓰레기처럼 잊힌 곳이 되었다. 그에게는 완벽한 은신처였다. 달아오른 심장을 감추기엔 더없이 좋은 차가운 심해였다.

푸른 빛이 깜빡이는 메인 콘솔 앞에 선 진우는 낡은 작업복 소매를 걷어 올렸다. 왼쪽 팔뚝은 싸늘한 금속 의수였다. 불완전하게 복원된 신경 회로가 때때로 팔목을 찌르는 듯한 통증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의 집중력을 흩트러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그 통증은 그를 더 또렷하게 만들었다.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들을 상기시키는, 뼛속까지 시린 고통이었다. 하준. 그 이름 석 자가 뇌리에 박힐 때마다, 그의 의수가 저릿하게 울렸다.

스크린에는 수없이 많은 암호화된 데이터 블록들이 춤추듯 흘러갔다. 그는 능숙하게 손가락을 놀려 복잡한 명령어를 입력했다. 과거에 자신과 하준, 오직 두 사람만이 접근할 수 있었던 심층 네트워크의 잔재였다. 하준은 모든 것을 가져갔다. 연구 결과물, 개발 중이던 무인 함대 프로젝트, 그리고 그들의 공동 자산까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진우의 오른팔을 앗아갔다.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앗아갔다. ‘믿음’이라는 것을.

“접속 시도… 75.3%.” 진우의 옆에 선, 그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스스로 ‘에코’라고 칭하는 자율형 AI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보고했다. 에코는 물리적인 형체가 없었다. 그저 진우의 시야 인터페이스에 푸른색으로 빛나는 작은 아이콘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너무 느려. 메인 프로세서를 전부 동원해.” 진우는 으르렁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인내심의 한계와 함께, 끓어오르는 복수심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저 빌어먹을 방화벽을 뚫어야 해. 하준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전부 알아내야 한다고.”

“하준의 현재 신분은 ‘뉴 에덴 프로젝트’의 총괄 관리자입니다. 그의 보안 시스템은 최고 등급이며, 현재 활성화된 방화벽은 귀하의 이전 접속 프로토콜을 모두 차단하고 있습니다.” 에코는 변함없이 기계적인 어조로 설명했다. “기존의 방식으로는 침투가 불가능합니다.”

진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기존 방식? 그래, 하준은 내가 아직도 과거에 갇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그때의 진우’가 아니야. 나는 그가 버린 쓰레기 속에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냈지.” 그의 눈빛이 섬광처럼 번뜩였다.

그의 의수가 번개처럼 움직여 콘솔의 숨겨진 포트에 특수 제작된 데이터 케이블을 연결했다. 케이블 끝에는 낡아빠진, 하지만 진우의 지문과 홍채 정보로만 작동하는 작은 단말기가 달려 있었다. 그 단말기는 한때 그와 하준이 ‘그림자 망’이라고 불렀던, 기밀 프로젝트의 초기 프로토타입이었다. 본래의 그림자 망은 하준이 훔쳐서 ‘뉴 에덴 프로젝트’에 통합해 버렸지만, 진우는 이 낡은 잔해 속에서 새로운 씨앗을 심고 있었다.

“백도어 프로토콜 가동. 인식 코드 ‘레버넌트’.” 진우가 나지막이 읊조렸다. ‘망령’. 그래, 죽은 자가 돌아왔다.

에코의 아이콘이 순간적으로 붉게 물들었다. “경고. 백도어 프로토콜 ‘레버넌트’는 시스템에 과부하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메인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질 가능성이 80% 이상입니다.”

“괜찮아. 이 정도는 버틸 거야.” 진우의 눈은 스크린에 고정되어 있었다. 이제는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라, 그의 복수심이 응축된 에너지가 되어 스크린 위를 미친 듯이 질주하고 있었다.

메인 콘솔 전체가 윙 하는 굉음과 함께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낡은 전력 라인에서 스파크가 폭죽처럼 튀었고, 희미하게 빛나던 조명들이 불안정하게 깜빡였다. 벽면을 타고 흐르던 오래된 냉각수 파이프에서는 불안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그의 뇌리에는 하준의 비웃는 듯한 얼굴이 다시,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때, 그가 내게 총구를 겨누며 했던 말.

*“미안하다, 진우야.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야. 너는 너무 이상주의적이었어.”*

그 ‘우리’가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하준과 그의 새로운 동맹들. 탐욕과 권력에 눈이 먼, 추악한 그림자들. 진우는 그들이 추구하는 ‘길’이 결국 모두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길을 막기 위해, 자신을 내던져야 한다면, 그는 기꺼이 악마가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뚫어… 뚫어라, 제발!” 진우는 콘솔에 손을 내리치며 외쳤다. 그의 의수가 둔탁한 소리를 냈다.

수십 년간 잠들어 있던 ‘그림자 망’의 잔재들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하준이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혹은 너무 보잘것없다고 치부했던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보안 회로들이 재활성화되는 느낌. 그것들은 마치 진우의 분노에 공명하듯, 하준의 견고한 방어막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성공률 88%… 92%… 99%… 돌파!” 에코의 목소리에 미세한 감정의 떨림이 느껴졌다. “메인 시스템에 접근했습니다. ‘뉴 에덴 프로젝트’의 핵심 데이터베이스에 잠시 연결되었습니다.”

진우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단순한 데이터의 흐름이 아니었다. 하준의 제국이 구축되는 과정, 그의 권력이 확대되는 방식, 그리고 진우가 그 모든 것의 희생양이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역겨웠다.

“빨리. 필요한 정보만 추출해. 하준의 최근 이동 경로, 그리고… ‘별들의 심장’ 프로젝트에 대한 모든 정보.” 진우는 숨을 헐떡이며 명령했다. ‘별들의 심장’은 그와 하준이 함께 꿈꿨던 궁극의 에너지원이자, 인류의 새로운 미래를 열 열쇠였다. 하준은 그것을 이용해 자신만의 제국을 건설하려 하고 있었다.

에코는 빛의 속도로 정보를 스캔하고 분석했다. “분석 완료. 하준은 현재 목성 위성 ‘가니메데’의 코어 연구소에 체류 중입니다. ‘별들의 심장’ 프로젝트는 예상보다 훨씬 진척되어 있으며, 다음 주 내로 최종 시운전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진우는 인내심을 잃고 재촉했다.

“하준은 이 모든 과정을 당신의 아이디어와 기술력 덕분이라고 공표하고 있습니다. 단, ‘사고로 사망한 천재 과학자 진우’라는 명목으로 말이죠.”

진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비열함의 극치였다. 죽은 자의 명예까지 훔쳐 자신의 영광을 치장하려 하다니. 역겨움이 그의 위장을 뒤집는 듯했다. 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금속 의수가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웃기는군.” 진우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그래, 그럼 죽은 자가 어떻게 살아나서 그 더러운 잔치에 재를 뿌리는지 똑똑히 보여주지. 하준, 네가 앉아 있는 그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지, 내가 직접 알려줄 테니까.”

그는 의수를 들어 올렸다. 손바닥 중앙에 박힌 작은 구형 장치가 붉은빛을 뿜어냈다. 수십 년간 고철 더미 속에서 부활을 꿈꾸며 갈고 닦아온, 그의 첫 번째 메시지이자, 세상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에코. 준비됐지?”

“언제든요. 마스터.” 에코는 처음으로, 아주 미세하게, 만족감을 담은 듯한 어조로 답했다.

진우는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단말기를 눌렀다. 동시에, ‘뉴 에덴 프로젝트’의 광대한 네트워크 어딘가에, 하준이 가장 아끼는 중앙 서버의 보안망에, 아주 작지만 치명적인 파동이 전송되었다. 그것은 단순한 바이러스가 아니었다. 잊힌 망령이 보내는 첫 번째 경고장이었다. 마치 깊은 심연에서 올라온 작은 파문이, 거대한 쓰나미의 전조가 되듯이.

“이제 시작이야, 하준. 네가 빼앗은 모든 것을, 나는 너에게서 되찾을 것이다.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티끌 하나 남기지 않고 재로 만들어 버릴 때까지.”

콘솔의 스크린이 다시 깜빡이며 암전되었다. 버려진 관제실은 다시 침묵과 어둠 속으로 잠겼다. 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거대한 복수극의 서막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진우의 눈빛은 불꽃처럼 타올랐다. 꺼지지 않는, 심연에서 솟아오른 복수의 불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