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가웠다. 메마른 대지의 흙먼지가 회색빛 노을과 뒤섞여 시야를 흐렸다. 강한결은 깎아지른 절벽 끝에 위태롭게 서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대한 도시, ‘엘도니아’의 웅장한 성벽이 수평선 너머까지 이어졌다. 성벽 안은 마치 거대한 빛의 향연처럼 반짝였다. 화려한 마법 조명과 인파의 소음이 여기까지 희미하게 들려왔다.
*겨우… 여기까지 왔나.*
한결은 굳게 다문 입술 새로 피 맛이 감도는 것을 느꼈다. 혀로 입술 안쪽을 쓸었다. 까끌거리는 감촉, 메마른 목 안. 이 세계에 떨어진 지 3년. 지옥 같은 시간을 홀로 버텨내며 그는 더 이상 과거의 ‘강한결’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도시 중앙, 가장 높은 탑의 테라스에 꽂혔다. 그곳에는 수많은 인파가 운집해 있었고, 중앙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금빛 갑옷을 입고,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남자.
김진우.
한결의 눈동자가 증오로 번뜩였다. 저 빌어먹을 위선자. 과거의 자신이 가장 믿고 따랐던 친구이자, 가장 잔인하게 등을 찔렀던 배신자. 이세계로 소환될 때, 그 지옥 같은 혼돈 속에서 자신을 밀어 떨어뜨리고 홀로 영웅 대접을 받으러 간 추악한 벌레.
“영웅이시여! 빛나는 칼날이여!”
“저희의 수호자, 진우 님께 영광을!”
아래에서 들려오는 환호성은 한결의 귀에 칼날처럼 박혔다. 역겨운 광경이었다. 저 가증스러운 웃음, 가식적인 손짓 하나하나가 그날의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렸다. 균열이 벌어지고, 차원의 틈새가 열리던 순간, 진우의 뒤틀린 미소와 함께 등 뒤에서 느껴지던 차가운 밀침. 그리고 끝없는 어둠 속으로 추락하던 자신.
*기다려라, 김진우. 네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얼마나 허망한지 곧 알게 될 테니.*
한결은 손을 들어 올렸다. 검은 장갑을 낀 손가락 사이에서 그림자 마나가 춤추듯 일렁였다. 손짓 한 번에 그림자 조각들이 모여들어 정교한 마나 망원경을 형성했다. 그는 망원경을 통해 진우를 더욱 선명하게 응시했다. 진우의 얼굴에 떠오른 오만한 미소, 어깨에 걸린 영웅의 훈장,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찬란한 검. 모두 한결이 이 세계에 오기 전, 진우가 그토록 갈망하던 것들이었다.
“젠장….”
한결의 목구멍에서 낮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억누르려 해도 끓어오르는 분노는 어쩔 수 없었다. 이 순간에도 진우는 자신이 구원한 도시의 영웅인 양 행세하고 있었다. 저 자는 분명 한결이 죽었으리라 확신하고 있을 터였다. 아니, 죽었어야 한다고 믿고 있을 터였다.
그때, 진우의 옆에 서 있던 한 여인이 진우에게 작게 속삭였다. 아름다운 외모의 여인은 이 도시의 공주, 아멜리아였다. 한결은 이미 이세계의 온갖 정보를 꿰뚫고 있었다. 진우가 이세계에서 영웅 행세를 하며 공주의 마음까지 사로잡았다는 사실은 그의 복수심에 기름을 부었다.
진우는 공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주변의 인파를 향해 크게 외쳤다.
“모두, 잠시 주목해주십시오!”
웅성거리던 군중이 순간 조용해졌다. 진우는 승리감에 도취된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다름이 아니라,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저희 엘도니아를 위협하던 마지막 그림자를 처단할 계획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한결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마지막 그림자?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그는 그림자 마나를 더욱 집중시켜 진우의 목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오랜 시간, 저희 도시를 그림자처럼 맴돌며 불안을 조장하던 검은 조직이 있습니다. 그들은 암흑 마법을 사용하고, 사람들의 불신을 부추기며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저는 지난 3년간 그들의 정체를 추적해왔고, 마침내 그들의 본거지를 알아냈습니다!”
진우의 연극 같은 목소리가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군중은 열광하며 환호했다. 한결은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설마….*
“그들은 스스로를 ‘어둠의 그림자’라 칭하며, 이 세계를 파괴하려는 악의 무리입니다! 저는 내일 새벽, 용사단과 함께 그들의 소굴을 급습하여 뿌리 뽑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엘도니아에 완전한 평화를 가져다줄 것입니다!”
진우의 선언에 군중의 환호성은 절정에 달했다. 그들은 진우를 영웅으로 추앙하며 그의 이름과 업적을 외쳤다.
한결의 손에서 그림자 망원경이 스르륵 사라졌다. 그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입술이 경련하듯 떨렸다.
‘어둠의 그림자’.
그것은 이세계에 떨어져 생존을 위해 그가 조직한 그림자 길드의 이름이었다.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이세계에 떨어진 소외된 이들을 모아, 진우처럼 부당하게 영웅 행세를 하는 권력자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약자들을 돕기 위해 만든 길드.
그의 보금자리이자, 복수를 위한 기반이었다.
김진우는 지금, 그 보금자리를 파괴하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결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악의 무리’로 규정되어 있었다.
*이 개자식…! 네 놈이 어디까지 추락할 셈이냐!*
한결의 전신에서 검은 마나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절벽 아래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고, 작은 돌멩이들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그의 눈은 핏발이 서서 붉게 물들었다. 주먹을 쥐자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배어 나왔다.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일 새벽이라….”
그는 나지막이 읊조렸다.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좋다, 김진우. 네 놈이 직접 내 집으로 찾아온다면… 기꺼이 맞이해주지.”
그의 등 뒤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마치 살아있는 존재처럼 움직였다. 그림자는 그의 몸을 감싸 안았고, 이내 그는 어둠 속으로 녹아들 듯 사라졌다.
절벽 위에는 차가운 바람만이 불어왔다. 그리고 어둠이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가운데, 저 아래 도시에서는 여전히 승리감에 도취된 영웅의 환호성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 환호성이 한 남자의 심장에 박힌 칼날을 더 깊이 쑤셔 넣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칼날이, 이제 막 뽑혀 나올 준비를 마쳤다는 것을.
내일 새벽, 엘도니아의 영웅은 피로 물든 새벽을 맞이하게 될 터였다. 그것은 영웅의 승리가 아니라,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의 서곡이 될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