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잿빛 세상에 발을 딛다**
김민준은 익숙한 고철 냄새와 함께 눈을 떴다. 아니, 정확히는 ‘감각’이 깨어났다. 투박한 금속 헬멧이 그의 머리를 감싸고, 어둠 속에 잠겨 있던 시야가 희미한 빛과 함께 점차 선명해졌다. 찌르르륵, 오래된 기계음 같은 이명이 귓가를 맴돌았다. 현실의 차가운 방바닥 대신, 발아래는 거친 흙바닥의 촉감이 생생하게 전해져왔다.
“로그인 완료. 플레이어 ‘망각’님, 파멸 이후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낮고 건조한 기계음이 머릿속에 울렸다. ‘망각’은 그가 이 가상세계에서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현실의 고단한 삶을, 비루한 존재를 잊고 싶어서 지은 이름이었다. 이름만큼이나 모든 것이 잊힌 듯한 풍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잿빛 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폐허.
한때 거대한 도시였을 곳은 이제 뼈대만 남은 건물 잔해와 뒤틀린 철골들이 숲을 이루고 있었다. 부서진 고가도로는 거대한 이무기처럼 땅에 처박혀 있었고,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허공을 할퀴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낡은 금속들이 서로 부딪히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마치 거대한 괴물의 신음 같았다.
텁텁한 흙먼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목구멍이 바싹 마르는 것 같았다. 물이 필요했다. 본능적인 갈증이 게임에 접속하자마자 그를 지배했다. 눈앞에 작은 HUD(헤드업 디스플레이)가 깜빡였다.
[체력: 95/100]
[허기: 25%]
[갈증: 40%]
[피로: 15%]
젠장, 시작부터 이렇다고? 게임이라도 시작 지점은 좀 나은 곳이어야 하는 거 아니었나. 아니, 애초에 ‘생존’에 초점을 맞춘 게임이었지. 이곳은 친절 같은 건 기대할 수 없는 곳이었다. 현실처럼.
민준은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관절마다 삐걱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곧 익숙해졌다. 허리춤에 달린 낡은 칼집에는 녹슨 단검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장비라고 해봤자 이게 전부였다. 온몸을 감싼 칙칙한 색깔의 누더기 옷과 발목까지 오는 작업화. 마치 처음부터 이 폐허에서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폐허가 된 건물 잔해 사이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바닥에는 부서진 유리 조각과 깨진 콘크리트 파편들이 널려 있었다. 발걸음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혹시라도 날카로운 파편을 밟아 부상을 입으면, 이 황량한 곳에서 살아남는 건 더 어려워질 터였다.
저 멀리, 한때 번화했을 쇼핑몰의 흔적이 보였다. 거대한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고, 내부의 철제 구조물들이 마치 갈비뼈처럼 드러나 있었다. 저곳이라면 뭔가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최소한 비를 피할 만한 공간이라도. 하지만 동시에, 저런 큰 건물에는 분명 다른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라는 경고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크으읍….”
목이 너무 말랐다. 그는 주변을 샅샅이 뒤졌다. 버려진 쓰레기 더미, 녹슨 철제 상자, 뒤집힌 자동차의 잔해. 그러나 쓸 만한 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흙먼지 속에서 겨우 발견한 것은 바닥에 박혀 있는 깡통 조각 하나뿐이었다. 절망적이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지는 기척이 느껴졌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몸을 숙여 건물 잔해 뒤로 숨었다.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가상현실이었지만, 공포는 현실과 다름없이 생생했다.
멀리서, 삐걱거리는 금속음과 함께 둔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하는 잿빛 하늘 아래, 실루엣이 움직이고 있었다. 인간의 형체를 하고 있었지만,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너덜너덜한 천 조각을 걸친 그 존재는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간 채 비틀거리며 걸어왔다. 부서진 기계 부품과 살점이 뒤섞인 것처럼 보였다.
“젠장, 저게 벌써 나와?”
낮은 욕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돌연변이’. 이 게임의 가장 흔한 적이자, 가장 위협적인 존재 중 하나였다. 약한 돌연변이일지라도, 맨몸으로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지금은 목마름과 허기까지 시작되고 있었다.
민준은 숨을 죽였다. 그의 시야에 희미하게 그 돌연변이의 정보가 스쳤다.
[오염된 노동자 – 등급: 하급]
[상태: 공격적, 부패 중]
놈은 비틀거리며 민준이 숨어있는 곳에서 불과 몇십 미터 떨어진 곳을 지나갔다. 찢어진 입에서는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마치 긁는 듯한 소리였다. 그는 온몸의 근육을 긴장시킨 채, 놈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놈이 지나간 자리에는 역겨운 썩은 내와 함께 희미한 녹색 액체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후우….”
길고 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 게임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매 순간 이런 위협에 직면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현실에서 도피하듯 들어온 곳이었지만, 이곳은 현실보다 더 혹독한 생존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민준은 포기할 수 없었다. 현실에서 그의 삶은 이미 바닥이었다. 더 이상 잃을 것도, 내려갈 곳도 없었다. 이곳에서 그는 새로 시작할 수 있었다. 아니, 반드시 살아남아야만 했다. 이 게임에서 ‘살아남는 것’은 현실에서의 그에게 유일한 희망과도 같았다.
“젠장, 물 한 모금이라도.”
그는 다시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돌연변이가 지나간 반대 방향, 어두컴컴한 건물 잔해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기며 나아갔다. 해가 완전히 저물기 전에, 그는 반드시 안전한 은신처와 최소한의 생존 물품을 찾아야만 했다. 이 황폐한 세상의 첫 번째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