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잿빛 도시의 빗물
천장이 무너진 건물 사이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흙탕물 웅덩이에 고인 잿빛 하늘이 일그러진다. 강준은 익숙하게 망가진 철골을 밟고 비틀린 계단을 올랐다. 그의 손에는 녹슨 쇠막대기가 단단히 쥐여 있었다. 온몸을 감싼 낡은 방수포 코트가 빗물을 튕겨냈지만, 이미 눅눅하게 젖은 안쪽 옷이 살갗에 달라붙어 불쾌했다.
“젠장, 또 비야.”
낮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입에서는 하얀 입김이 새어 나왔다. 이곳 ‘구역 7’은 한때 번화했던 상업 지구였으나, 지금은 뼈대만 남은 건물들이 음울한 그림자를 드리운 채 서 있었다. ‘대붕괴’ 이후 모든 것이 멈췄다. 도시의 심장은 기능을 잃었고, 사람들은 사라지거나, 아니면… 변했다.
강준은 감각을 곤두세웠다. 빗소리 사이로 미세한 움직임이라도 포착할까 싶어 숨소리마저 죽였다.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잡종’들은 물론, 자신과 같은 생존자들 역시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다. 이곳에선 모든 인간이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그가 향하는 곳은 과거 자료를 보관하던 ‘기록보관소’ 건물이었다. 희망은 없었다. 다만, 과거의 잔해 속에서 쓸 만한 것을 찾으려는 일말의 생존 본능만이 그를 움직이게 했다. 물품, 식량, 하다못해 고철이라도. 이곳의 기록보관소는 붕괴 당시 비교적 온전히 형태를 유지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물론, 그 소문은 잊을 만하면 떠도는 헛소리 중 하나일 가능성이 더 높았지만.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곰팡이 냄새와 축축한 흙먼지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천장의 일부가 날아가 비를 피할 수 없는 곳도 있었지만, 중심부로 갈수록 상태는 양호했다. 책장들은 쓰러져 있었고, 종이들은 누렇게 바래거나 아예 바스라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기며 주변을 스캔했다.
“하, 역시.”
강준은 헛웃음을 흘렸다. 예상대로였다. 이곳에 남겨진 것은 인류의 찬란했던 과거를 증명하는 쓰레기 더미뿐이었다. 전력도, 조명도 없이 그의 손전등 불빛만이 희미하게 길을 밝혔다. 바닥에는 부서진 유리 조각과 건축 자재, 그리고 정체 모를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수 시간 동안 이어진 수색은 별다른 소득 없이 지나갔다. 빗소리는 여전히 지루하게 이어졌고, 그의 몸은 점점 차갑게 식어갔다. 지쳐갈 무렵, 그는 한쪽 구석에 쓰러져 있는 금속 책장을 발견했다. 다른 책장들과 달리 이 책장은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을 뿐, 내용물은 비교적 온전해 보였다. 그는 무심코 손전등을 비췄다.
철컥.
무언가 밟혔다. 낡은 금속 책장의 아랫부분이 미세하게 들려 있었다. 그 틈새로 손전등 빛이 스며들었다. 다른 곳과 달리 그 틈새 안쪽은 깔끔했다. 강준은 쇠막대기로 책장을 밀어 올리려 했으나, 꼼짝도 하지 않았다. 꽤 무거웠다.
그는 조심스럽게 책장 아랫부분의 잔해들을 걷어냈다. 흙먼지에 덮여 잘 보이지 않던 것이 드러났다. 금속 책장과 벽 사이, 숨겨진 작은 공간.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가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안에는, 낡았지만 어딘가 견고해 보이는 작은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는 닳고 닳은 가죽으로 덮여 있었는데, 가장자리에는 금속 장식이 박혀 있었다. 잠금장치는 없었다. 강준은 잠시 망설였다. 이런 곳에, 이토록 ‘깔끔하게’ 숨겨져 있다는 것은 뭔가 이유가 있을 터였다. 위험할 수도 있었다. 폭발물일 수도 있고, 독극물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호기심이 그의 심장을 쿵쾅거리게 만들었다. 굶주림과 피로에 절어 있던 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그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생각보다 가벼웠다. 낡은 가죽 위에는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나뭇가지 같기도 하고, 번개 같기도 한 기하학적인 무늬였다. 강준은 코트 주머니에서 낡은 천 조각을 꺼내 상자에 묻은 먼지를 닦아냈다.
손가락으로 뚜껑을 들어 올리자,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상자가 열렸다.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거의’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는 상자의 바닥에, 손바닥만 한 낡은 금속판 하나가 놓여 있었다.
금속판은 은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표면에는 미세한 스크래치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깨끗했다. 강준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가락 끝에 닿았다. 앞면에는 섬세하게 새겨진 문자들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학교에서 배운, 대붕괴 이전의 ‘고대 문자’였다.
“……시스템 로그?”
그는 낮은 목소리로 읽었다. 글자들은 너무 작고 희미해서 한눈에 알아보기 어려웠다. 손전등을 가까이 대고 집중해서 읽어나갔다.
**[경고: ‘침묵의 날’ 발생. 모든 비상 프로토콜 활성화.]**
**[확인: 외부 통신망 완전 두절. 내부 연결 제한적.]**
**[접속: 중앙 관리 시스템… 오류. 연결 실패.]**
**[탐지: 비정상 에너지 패턴 확인. 위치… 불분명.]**
**[권고: ‘격리 구역 알파’로 대피. 즉시 실행.]**
**[…오류. 데이터 손상.]**
그는 더듬더듬 금속판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뒷면은 매끄러웠다. 글자가 새겨진 앞면의 한쪽 구석에는, 작은 원형 홈이 파여 있었다. 마치 무언가 다른 조각과 결합되어야 할 것처럼 보였다.
강준의 심장이 다시 한번 크게 울렸다. ‘침묵의 날’이라는 단어. 그것은 대붕괴를 일컫는 생존자들 사이의 은어였다. 하지만 ‘격리 구역 알파’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이 모든 재앙이 시작되기 전에, 누군가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대비하려 했던 흔적처럼 보였다.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다. 이 금속판은 무엇인가? 누가 여기에 숨겨둔 것인가? ‘격리 구역 알파’는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왜 이 모든 것이 이렇게 감춰져야 했던 것인가?
그때였다.
투둑, 투둑.
빗소리에 섞여 들려오는, 불규칙적이고 무거운 발소리. 하나가 아니었다. 셋, 아니면 넷. 잡종들의 소리가 아니었다. 좀 더… 정돈된, 하지만 어딘가 잔혹한 기운을 풍기는 발소리였다. 그것은 건물 안으로, 그가 있는 곳으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강준은 본능적으로 상자와 금속판을 코트 속에 숨겼다. 그리고 손에 든 쇠막대기를 고쳐 쥐었다. 그는 마치 폐허의 일부처럼 어둠 속에 몸을 감췄다.
발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그리고 곧, 그의 시야에 네 명의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들은 모두 낡은 군복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얼굴은 두건으로 가려져 있었고, 손에는 길고 날카로운 무기를 들고 있었다. 그들의 눈은 마치 먹잇감을 찾는 맹수처럼 번뜩였다.
그들은 주변을 훑어보더니, 강준이 상자를 발견했던 금속 책장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한 명이 웅크려 앉아 책장 밑바닥을 더듬었다.
“젠장, 늦었잖아.”
낮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혹시 이 상자였던가?
강준은 숨을 죽였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우연히 발견한 이 금속판 하나가, 어쩌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험한 진실의 조각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예감이 들었다.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나날 속에서, 그는 의도치 않게 거대한 미스터리의 한복판으로 발을 들여놓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이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이토록 위험한 자들이 찾아 헤매는 거지?*
강준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놈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 그러나 모든 것을 지켜볼 수 있는 곳으로. 빗소리가 점점 거세졌다. 잿빛 도시의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