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금속 내음과 피비린내가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발밑은 축축했고, 천장에서는 끈적한 이물질이 뚝뚝 떨어졌다. 이곳은 ‘무저갱’ 심부, 서울 한복판에 갑자기 열린 최악의 균열이었다. 우리는 기어코 최종 보스, 거대한 촉수 괴수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아… 하아…”
한지혁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전신에서 터져 나오는 마력은 이미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였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은 끝부분이 뭉개져 있었고, 검날에는 마수의 검푸른 피가 덕지덕지 말라붙어 있었다. 옆을 돌아보자, 땀으로 범벅이 된 김도윤이 보였다. 도윤은 지혁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안에는 격려와 함께 ‘조금만 더 버티자’는 무언의 약속이 담겨 있었다.
우리 둘은 십 년 지기였다. 재능은 평범했지만, 유난히 끈기가 있었던 지혁은 각성 후 피나는 노력으로 강자가 되었다. 반면 도윤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지만, 훈련보다는 요령을 익히는 데 능숙했다. 그렇게 달라도 우리는 늘 함께였다. 지혁이 선봉에 서서 길을 뚫고, 도윤이 후방에서 정교한 마법으로 지원하는 완벽한 조합. 수많은 위기를 넘기며 우리는 이 지옥 같은 ‘무저갱’의 끝까지 도달했다.
“지혁아, 내가 왼쪽 눈을 묶을게. 그때 네가 약점을 노려.” 도윤의 목소리가 갈라진 공기를 뚫고 들려왔다.
“알았어. 준비되면 말해.” 지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마지막 남은 마력을 끌어모았다. 전신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의 눈은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타올랐다. 이 놈만 잡으면, 이 끔찍한 임무도 끝이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잠시나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간다!”
도윤의 외침과 함께 거대한 마법진이 허공에 펼쳐졌다.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 마력은 거대한 쇠사슬로 변해 촉수 괴수의 왼쪽 눈을 칭칭 감았다. 괴수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몸부림쳤고, 그 충격으로 동굴 전체가 흔들렸다. 천장에서 돌멩이가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지금이야, 지혁아!”
도윤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로웠다. 지혁은 망설이지 않았다. 남은 모든 것을 검에 실어 마수의 심장을 향해 돌진했다. 그의 몸은 이미 한계였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팔은 감각조차 없었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 순간만을 위해 달려왔으니까.
검이 마수의 단단한 비늘에 부딪히며 섬뜩한 굉음을 냈다. 마수는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고, 지혁은 온 힘을 다해 검을 밀어 넣었다. 검날이 꿰뚫고 들어가는 고통스러운 감촉. 됐다!
그 순간, 지혁의 발밑에서 낯선 마법진이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시감. 그의 몸을 순식간에 ско러오는 듯한 강력한 속박.
“크윽!”
갑작스러운 속박에 지혁의 몸이 경직됐다. 검을 뽑을 수도, 더 깊이 찔러 넣을 수도 없었다. 마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거대한 촉수를 휘둘렀다. 지혁은 몸을 피하려 했지만, 발목을 묶는 마법의 족쇄는 너무나 강력했다. 촉수가 그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뼈가 부러지는 끔찍한 소리와 함께 지혁의 몸은 멀리 날아갔다.
“도윤… 이건… 무슨…”
그는 피를 토하며 바닥에 쓰러졌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가운데,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자신을 묶었던 마법진이었다. 저건, 도윤의 고유 마법이었다. 내가 아는 도윤의 마법과 거의 흡사하지만, 훨씬 더 사악하고 강력했다.
“왜… 왜 이래, 도윤아?”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을 때, 도윤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표정은 경악할 만큼 차분했다. 방금 전까지 함께 사투를 벌이던 전우라고는 믿기지 않는 냉정한 얼굴이었다.
“너무 시끄럽네, 지혁아.”
도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옥타브 낮았다. 그 안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어… 어떻게… 된 거야… 설마… 네가…”
지혁의 눈이 공포에 질려 커졌다. 믿고 싶지 않은 진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지기 시작했다.
“그래. 내가 했어.” 도윤은 너무나 쉽게 인정했다. “네가 죽어줘야 하거든.”
지혁의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십 년 지기 친구의 입에서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왜… 왜 날 죽여야 하는데? 우리가… 함께 여기까지 왔잖아!”
“함께? 아니, 내가 널 데리고 여기까지 온 거지.” 도윤은 비웃듯 말했다. “네가 너무 눈에 띄었어, 지혁아. 늘 네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 내가 널 뒤에서 지지한다고? 웃기는 소리. 난 늘 네 그림자였다고. 내가, 이 김도윤이, 네놈 따위의 조력자 역할이나 하고 있을 운명이 아니란 말이야!”
그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됐다. 그의 눈에는 이글거리는 광기가 서려 있었다. 지혁은 이 사람을 몰랐다. 자신이 알던 김도윤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무저갱은 단순한 균열이 아니야. 심연과 맞닿은 곳이지. 그리고 저 촉수 괴수는 그 심연의 힘을 흡수하는 존재. 네가 저 놈을 죽이면, 그 막대한 심연의 마력을 네가 흡수하게 될 거야.” 도윤은 차갑게 설명했다. “난 그걸 원치 않아. 그 힘은 내가 가져야 해.”
“미쳤어…! 그런다고 그 힘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아? 심연의 힘은…”
“닥쳐!” 도윤이 소리쳤다. “네놈의 잔소리는 이제 지긋지긋하다. 항상 나보다 한 발 앞서 나가는 척, 늘 올바른 길을 아는 척! 지겨워 죽겠어! 이제 그 자리, 내가 차지할 거야. 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힘은, 전부 내 것이 될 거야!”
그는 지혁의 곁으로 다가와 쓰러진 지혁의 머리채를 잡아 올렸다. 지혁의 눈앞에 김도윤의 광기에 찬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잘 가라, 한지혁. 네 덕분에 내가 더 강해질 수 있게 됐다. 고맙다고 해줘야 하나? 아, 네 시체에나 대고 말해줄게. 죽어버린 네 눈깔에 대고!”
도윤은 지혁을 마수가 있는 방향으로 내던졌다. 지혁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몸을 묶은 속박 마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수는 이미 치명상을 입은 상태였지만, 마지막 발악으로 거대한 촉수를 휘둘러 지혁의 몸을 감쌌다.
“크아아악!”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마수의 촉수가 그의 몸을 조이는 순간, 지혁의 전신에 흐르던 마력이 역류하기 시작했다. 그가 막 찔러 넣었던 검에서부터 마수의 몸속으로, 그리고 마수가 흡수하고 있던 심연의 마력이 지혁의 몸으로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몸이 터져나갈 것 같은 압력, 정신이 붕괴될 것 같은 혼돈. 고통 속에 지혁의 의식이 희미해졌다.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균열 밖으로 나가는 도윤의 뒷모습이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지혁은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깨어났다. 주위는 완전한 어둠이었다. 촉수 괴수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대신 그 자리에는 거대한 검은 수정이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의 몸은…
온몸의 뼈가 부서지고 내장이 뒤틀린 고통은 사라졌다. 대신, 그의 몸 안에는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낯선 마력이 가득했다. 그의 근육은 이전보다 훨씬 단단해졌고, 피부에는 검은 문신 같은 무늬가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눈을 감자, 세상의 모든 기운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전에 경험했던 각성자의 감각과는 차원이 다른, 훨씬 더 깊고 섬뜩한 연결감이었다.
“하아… 하아…”
지혁은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무저갱은 여전히 붕괴 직전의 모습이었다. 사방에서 돌이 떨어지고 균열이 깊어지고 있었다. 그는 거울처럼 매끄러운 바닥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의 눈은 더 이상 예전의 선량한 눈이 아니었다. 검은 심연처럼 깊고, 불타는 복수심으로 가득 찬 눈이었다.
“김도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배신당한 친구의 이름,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이름.
“네가 가졌어야 할 것? 영광? 힘? 다 좋아. 네가 모든 것을 가졌다 생각하겠지. 하지만 하나만 기억해라, 김도윤.”
그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하나의 감정만이 선명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내가 너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거야. 네가 내게서 빼앗아 간 것보다, 훨씬 더 처절하게.”
그는 심연의 마력이 뒤섞인 거친 숨을 내쉬며 붕괴하는 무저갱의 어둠 속을 걸어 나갔다. 지옥에서 돌아온 자의 서늘한 복수극이, 이제 막 시작될 참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