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픽 하이 판타지 긴장감 넘치는 연재 웹소설의 최신 화

어둠이 잔뜩 고인 거대한 홀, 침묵만이 압도적으로 존재했다. 발소리조차 감히 소리를 낼 수 없다는 듯 돌바닥 위를 스치는 부츠의 마찰음은 아주 작게, 삭막하게 울렸다. 칼릭스는 헐렁한 망토 자락을 한 손으로 여미며 눈앞의 풍경을 응시했다.

“이게… 설마.”

그의 시선이 닿은 곳은 홀 중앙에 우뚝 솟은 거대한 제단이었다. 새까만 흑요석으로 깎인 듯한 제단 위에는 한눈에도 예사롭지 않은 장치가 놓여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금속과 수정의 구조물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희미한 푸른빛을 깜빡이고 있었다. 고대 문명의 정수가 응축된 듯한 섬세하면서도 육중한 만듦새였다.

“칼릭스, 너무 가까이 가지 마.”

뒤에서 세라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홀의 사방을 살피며 허리에 찬 검의 손잡이를 가볍게 쥐고 있었다. 전사의 본능은 언제나 위험을 먼저 감지했다.

“하지만 세라, 이건 달라. 우리가 찾던 바로 그 물건일지도 몰라.”

칼릭스는 멈출 수 없었다. 학자의 광기 어린 호기심이 그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장치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푸른빛은 더욱 선명해졌고, 공기 중에는 미세한 진동과 함께 알 수 없는 에너지가 감돌았다. 오래된 먼지 냄새 사이로 서늘하고 신비로운 금속의 향이 섞여들었다.

손을 뻗었다.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그 순간, 장치에 새겨진 복잡한 문양들이 칼릭스의 눈에 들어왔다. 그중 가장 중앙에 위치한, 거미줄처럼 섬세하게 뻗어나간 기하학적 문양 하나. 직감적으로, 칼릭스는 그것이 열쇠임을 깨달았다.

“이거야.”

중얼거림과 함께 그 문양을 가볍게 눌렀다.

콰아아앙-!

예상치 못한 굉음이 홀을 뒤흔들었다. 푸른빛이 장치 전체를 휘감으며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칼릭스는 순간 눈을 가렸고, 세라는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홀 전체가 푸른 섬광에 잠시 백색이 되었다가, 이내 희미한 광원으로 채워졌다.

“젠장, 이게 무슨…” 세라가 눈을 찡그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치는 여전히 푸른빛을 머금은 채 조용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홀의 벽이었다. 칠흑 같던 벽면의 일부가 투명한 수정처럼 빛나기 시작했고, 그 안에서 고대의 벽화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거대한 괴물들과 맞서 싸우는 인간 형상의 존재들, 알 수 없는 의식을 치르는 사제들의 모습,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듯한 거대한 눈동자의 형상…

벽화는 침묵의 역사를 웅변하고 있었다. 이곳이 단순히 버려진 유적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힘이 잠들어 있는 성소였음을, 아니, 지금도 그러하다는 것을.

“이봐, 칼릭스. 저길 봐.”

세라의 목소리가 경고처럼 날카로워졌다. 그녀가 가리킨 곳은 제단 뒤편, 거대한 벽화가 그려진 벽의 한 부분이었다. 벽화 속에서 거대한 문이 서서히 갈라지더니, 육중한 돌덩이들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내며 안쪽으로 밀려들어 가기 시작했다.

쉬이이이익…

그러나 그 뒤에서 나타난 것은 새로운 통로만이 아니었다. 어둠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안개와 같은 형체. 안개는 빠르게 뭉쳐지더니, 이내 거대한 인간 형상의 그림자로 변모했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매끄러운 머리, 길고 날카로운 손톱을 가진 팔. 그것은 그림자였으나, 섬뜩하게도 실재했다.

“수호자…!” 칼릭스의 입에서 본능적인 외마디가 터져 나왔다.

그림자 수호자는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푸른빛으로 물든 홀 안에서, 그 존재는 더욱 심연처럼 어두웠다. 하지만 칼릭스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방금 막 깨어난 잠자는 분노라는 것을.

“움직이지 마.” 세라가 칼을 뽑아 들었다. 강철이 뽑히는 소리가 홀에 날카롭게 울렸다. “내가 시간을 벌게.”

“하지만…”

“빨리, 저 통로로 들어가! 뭔가 다른 게 있을 거야!” 세라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는 이미 전장에 선 전사였다.

그림자 수호자가 움직였다. 아주 느리게, 하지만 확신에 찬 움직임으로. 거대한 팔이 서서히 들어 올려지자, 홀 안의 온도가 급격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냉기가 폐부까지 파고들었다.

“내가 막는 동안, 최대한 깊이 들어가!” 세라가 소리쳤다.

쿠오오오오-!

수호자의 손끝에서 어둠의 에너지가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세라는 그 즉시 몸을 날려 방패로 막아섰다. 굉음과 함께 세라의 몸이 뒤로 밀려났지만,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 찰나, 칼릭스는 망설일 틈도 없이 새롭게 열린 통로를 향해 전력으로 달렸다. 통로 안은 칠흑 같았다. 고대 유적 특유의 곰팡이 냄새와, 알 수 없는 흙냄새가 뒤섞여 코끝을 자극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아니, 돌아볼 수 없었다.

통로 안으로 발을 디딘 순간, 뒤에서 콰앙-! 하는 굉음과 함께 통로의 입구가 육중한 돌덩이로 다시 봉쇄되었다. 모든 빛이 차단되었다. 홀 안에 남아있던 세라와 수호자의 격렬한 전투음은 마치 꿈처럼 아득히 멀어졌다.

“세라!”

그의 외침은 메아리치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흡수되었다. 그는 혼자였다. 완전한 어둠과, 낯선 공기만이 그를 감싸고 있었다. 통로 안은 홀과는 또 다른 기운으로 가득했다. 습하고 무거운 공기가 피부에 달라붙는 듯했다.

발밑에서 웅- 하는 낮은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미약했지만, 점차 강렬해졌다. 그 진동은 땅속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거대한 북소리 같기도, 혹은 잠자는 거인의 심장 박동 같기도 했다. 웅… 웅… 웅…

어둠 속에서 칼릭스는 두려움과 경외심이 뒤섞인 숨을 내쉬었다. 이곳은 단순한 유적이 아니었다. 살아있는 심장을 가진, 고대의 비밀 그 자체였다. 진동은 점점 더 격렬해졌다. 마치 거대한 존재가 깨어나기 시작하는 것처럼.

그리고 그 진동 속에서, 칼릭스의 귀에 속삭이듯 들려오는 아주 희미한, 하지만 명확한 소리 하나가 닿았다.

— 깨어나라… 잠들었던 자들이여…

그것은 환청인가, 아니면 이 고대 유적 자체가 발하는 소리인가. 칼릭스는 차갑게 식어가는 등골을 느끼며 손을 뻗어 더듬거렸다. 더 이상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어둠의 심연이 그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