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하늘 아래, 무너진 고층 빌딩의 그림자가 황혼을 삼키고 있었다. 곰팡이 냄새와 피비린내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이진우는 허리춤에 찬 녹슨 칼자루를 꽉 쥐었다. 한때 사람들로 북적이던 도심은 이제 폐허와 망자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한 공동묘지나 다름없었다.
사흘째 허탕이었다. 마지막 남은 통조림을 어제 바닥낸 이후, 그의 뱃속은 시계추처럼 허전함을 알리고 있었다. 먹을 것을 찾아 버려진 마트의 잔해를 뒤지고, 약국이라도 찾아볼까 하여 부서진 건물 틈새를 헤집고 다녔지만 수확은 없었다. 대신, 움직이는 시체 몇 마리와 마주쳐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었을 뿐.
“젠장, 정말 아무것도 없다고?”
진우는 텅 빈 창고 구석에 쭈그려 앉아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체력은 바닥났고, 정신력 또한 한계에 달한 지 오래였다. 이런 날이 언제까지 이어질까. 아니, 이런 날이 끝나기는 할까? 끝없이 자문해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저 살아남는 것, 그것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때였다. 창고 바깥에서 희미한 소음이 들려왔다. 단순한 좀비의 신음소리가 아니었다. 불규칙적이고, 둔탁하며, 마치 무언가 거대한 것이 움직이는 듯한 소리. 진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칼을 뽑아 들었다. 심장이 귀청을 때릴 듯 울렸다. 새로운 종류의 변이체인가? 아니면 생존자들끼리의 싸움? 어느 쪽이든, 그에게 좋은 상황일 리 없었다.
기척을 죽이고 창고 문틈으로 바깥을 엿봤다. 먼지 낀 시야 너머, 건물 잔해 사이로 거대한 그림자가 일렁였다. 일반 좀비들과는 확연히 다른 움직임이었다. 비틀거림이나 예측 불가능한 돌진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나도 부드럽고, 간결하며, 망설임 없는 움직임.
그것은 한 무리의 좀비들 사이에 서 있었다. 적어도 스무 마리는 되어 보이는 좀비들이 먹잇감을 발견한 듯 그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끝장이다. 저런 떼거리를 혼자서 상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저 그림자가 과연 저 무리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잠시 후에 또 다른 좀비 떼가 늘어날 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마치 춤을 추듯 우아하면서도 치명적인 동작이었다. 손에 든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림자의 팔이 휘둘러질 때마다 좀비들이 퍽, 퍽 소리를 내며 나가떨어졌다. 목이 꺾이고, 팔다리가 비정상적인 각도로 꺾였다. 어떤 좀비는 머리통이 통째로 으깨지며 녹색 피를 뿜어냈다.
단순한 힘이 아니었다.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고, 빠르며, 효율적인 움직임. 마치 사냥꾼이 먹잇감을 가지고 놀듯, 그림자는 좀비 떼 한가운데를 유린했다. 진우는 숨 쉬는 것조차 잊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저건, 인간이 아니었다. 좀비도 아니었다. 그럼 대체 뭐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스무 마리가 넘던 좀비들은 모두 쓰러졌다. 그 중 단 한 마리도 온전한 형태를 유지한 채 서 있는 것은 없었다. 그림자는 폐허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때였다. 붉은색, 아니, 주홍빛에 가까운 섬광이 진우의 시야를 강타했다. 그림자가 그의 시선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마치 짐승의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도 명확하게 지능을 담고 있는 두 눈.
그것은 인간이었다. 적어도 형태는 그랬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 야위었지만 균형 잡힌 몸매, 찢겨진 옷가지. 그러나 그 피부는 창백하다 못해 푸른빛을 띠었고, 손톱은 맹수의 발톱처럼 길게 뻗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 얼굴이었다. 차갑고 무표정했지만, 한때 분명 인간이었음을 짐작하게 하는 이목구비. 그러나 그 강렬한 주홍빛 눈동자 속에는 인간의 감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냉혹함만이 가득했다.
여성체였다.
그녀의 시선이 진우가 숨어 있는 창고 문틈에 정확히 박혔다. 심장이 발끝까지 곤두박질쳤다. 들켰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그녀의 몸이 한순간에 사라지더니, 다음 순간 진우의 눈앞에 나타났다.
“크헉!”
순식간에 벽에 처박힌 진우는 콜록이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단단한 손아귀. 그녀의 얼굴은 지척에 있었다. 주홍빛 눈동자가 그의 눈동자를 꿰뚫어 보는 듯했다. 숨통이 조여들었다. 공포가 온몸을 휘감았다.
“너… 넌… 뭐냐?” 진우는 간신히 말을 쥐어짜냈다.
그녀의 입술이 살짝 움직였다. 갈라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송곳니가 엿보였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인간의 언어와는 확연히 다른, 짐승의 으르렁거림 같으면서도 묘하게 선율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마치 고대 언어의 조각들이 뒤섞인 듯한, 이해할 수 없는 울림.
그러나 그 소리보다 더욱 진우의 심장을 뒤흔든 것은, 그 목소리에 담긴 어떤 감정이었다. 알 수 없는 호기심, 아니면 경멸, 혹은 단순한 관찰. 그 어느 쪽이든, 그녀는 그를 해치려 한다는 직접적인 의도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이질적인 존재를 탐색하는 듯한 시선.
그녀의 눈동자가 진우의 목에 걸린 인식표를 훑었다. 닳고 닳은 금속 조각에 그의 이름, 이진우 석 자가 희미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녀의 차가운 손가락이 인식표를 스쳤다.
“이… 진우…”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또다시 기이한 음색이었지만, 이번에는 어렴풋이 그의 이름과 비슷한 발음이었다. 인간의 언어를 흉내 내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인가? 혼란이 진우의 머릿속을 휩쓸었다.
그녀는 천천히 진우의 목을 쥔 손에 힘을 풀었다. 진우는 콜록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살았다. 하지만 왜? 왜 죽이지 않았지?
그녀는 진우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홍빛 눈동자 속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마치 바닷속 심연처럼 깊고 고요했다. 그러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 동작은 놀랍게도 인간적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은 진우의 시선을 넘어, 그의 옆에 놓인 그의 칼, 그리고 그의 등 뒤에 있는, 방금 막 좀비들이 쓰러진 폐허를 훑었다. 그녀의 입술이 다시 한번 움직였다.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음성이었지만, 그 소리 끝에 묘한 여운이 남았다. 마치 질문인 듯, 혹은 경고인 듯.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그리고 방금 전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치 연기처럼 흩어진 듯, 흔적도 없이.
진우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앉아 있었다. 폐허가 된 도시의 정적만이 그의 귀를 때렸다. 어둠이 완전히 깔리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의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는 보았다. 인간도 좀비도 아닌, 완전히 새로운 종족을. 그리고 그들은, 놀랍도록 강력하고, 지능적이며, 치명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들 중 하나가 그를 살려두었다. 왜?
의문만이 남았다. 동시에, 그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섬뜩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했다. 공포와 경계심 너머, 미지의 존재에 대한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
그는 자신이 무엇을 목격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뒤바뀔지, 아직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오늘 밤 그의 세상은 완전히 뒤집혔다는 사실이었다. 인간과 망자, 그리고 그 ‘사이’의 존재. 이 금지된 경계가, 그의 생존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그는 아직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