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내렸다. 도시의 밤을 적시는 빗줄기는 윤슬의 망토 위로 투둑거리며 부서졌다. 물방울 하나하나가 흡수되지 못한 채 검은 벨벳 위를 미끄러져 내렸고, 그처럼 윤슬의 마음에도 어떤 감정도 스며들지 못했다. 오직 차가운 분노만이 단단하게 굳어 심장을 짓누르고 있을 뿐이었다.
손에 쥔 수정 단검은 희미하게 푸른빛을 내뿜었다. 검 끝에서 서린 한기는 공기를 갈랐고, 윤슬은 그 한기가 자신의 손을 얼어붙게 만드는지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그 냉기가 지독하리만치 선명한 감각을 선물했다. 살아있음을. 그리고 다가올 순간을.
빌딩 숲을 벗어나자 눈앞에 거대한 장미 덩굴이 얽힌 저택이 나타났다. 철제 대문은 녹슬어 있었지만, 그 위로 휘감긴 핏빛 장미들은 여전히 생생한 독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저택 안에서 새어 나오는 옅은 빛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아른거렸다.
“기다려, 윤슬.”
언젠가 세린이 웃으며 속삭였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내 곁이야.”
그 맹랑한 위선이, 달콤한 독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얼마나 많은 피와 눈물이 필요했던가. 윤슬은 이를 악물었다. 그 날의 배신은 심장에 박힌 수정 파편처럼 아물지 않고 있었다. 고통은 이제 감각이 마비될 지경이었지만, 그 감각 너머에는 더 선명하고 지독한 복수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대문은 잠겨 있었다. 하지만 윤슬에게 그건 아무런 장애물도 되지 못했다. 단검 끝에서 섬광이 터져 나오자, 거대한 덩굴들이 비명을 지르며 찢겨 나갔다. 굳게 잠겼던 자물쇠는 마치 설탕 조각처럼 부서져 내렸다.
“드디어 오셨군요, 윤슬.”
안뜰로 들어서자마자,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림자 속에 가려진 인물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늘어뜨린 은빛 머리카락, 검은 드레스. 그리고 섬뜩하리만치 우아한 미소.
“세린.”
윤슬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세린은 여유롭게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핏빛 장미 향을 품고 있었다.
“이렇게 비 오는 밤에, 불청객이라니. 예의가 없군요.”
“네가 감히 예의를 논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세상 일이란 참으로 우습지 않나요? 한때는 서로의 전부였던 존재가, 이렇게 서로를 칼날로 겨눌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요?”
세린은 찻잔을 든 채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에는 어떤 후회도, 죄책감도 없었다. 오직 잔인한 조롱만이 가득했다.
“하지만 윤슬, 네가 여기까지 온 것이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이대로 돌아간다면, 아직은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을 텐데.”
윤슬은 단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손끝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왜 돌아가야 하지? 내가 네게 돌려줄 것은, 내가 겪었던 고통보다 더 지독한 절망뿐인데.”
세린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그 어린 날의 환상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군. ‘친구’라는 허상에 말이야.”
그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네가 강해진 건 인정하마. 하지만 날 이길 수 있을 리 없지. 이 모든 것은 이미 예견된 결말이었으니까.”
세린의 손에서 붉은 마력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장미 덩굴들이 움찔거리더니, 날카로운 가시를 세우며 윤슬을 향해 뻗어 나왔다.
“이곳은 내 정원이다. 네가 감히 발을 들여놓을 곳이 아니라는 말이야.”
윤슬은 비웃었다.
“그래, 네 정원. 피로 물든 너의 왕국. 하지만 오늘은 그 왕국을 내가 잿더미로 만들러 왔다.”
윤슬의 망토가 바람 한 점 없는 공간에서 맹렬히 휘날렸다. 검은 마력이 그녀의 몸을 감쌌고, 단검은 더욱 강렬한 푸른빛을 내뿜으며 형태를 바꾸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크리스탈 파편들이 허공을 수놓더니, 이내 거대한 대낫의 형상으로 합쳐졌다. 날카로운 곡선이 달빛 아래 섬뜩하게 빛났다.
“감히 그 힘으로 날 상대하려 하는가? 네가 잃어버린 그 조각들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한 힘으로?”
세린은 경멸하듯 말했다. 붉은 장미 가시들이 윤슬의 주변을 겹겹이 에워쌌다.
“허상?”
윤슬은 나직이 읊조렸다. 대낫을 든 그녀의 모습은 과거의 연약한 마법소녀의 잔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얼어붙은 분노가 빚어낸 냉혹한 복수의 화신이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네 덕분에 얻게 된 ‘진정한’ 힘이다, 세린.”
그녀의 눈동자가 차가운 광기로 빛났다.
“너를 찢어발기고, 네 모든 것을 부수고, 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들을 하나하나 빼앗아 갈 힘.”
대낫이 허공을 갈랐다. 크리스탈 날이 붉은 가시 덩굴들을 단번에 베어냈다. 장미 덩굴들이 비명을 지르며 핏물을 쏟아냈다. 잘려나간 가시들은 땅에 떨어지며 검은 연기로 변해버렸다.
세린의 미소가 굳었다. 그녀의 눈에 비로소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이럴 리가… 네가 그 정도의 힘을 가질 리 없어!”
붉은 마력이 폭풍처럼 세린의 주변을 휘감았다. 그녀의 검은 드레스가 장미 덩굴처럼 변형되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드레스 곳곳에서 솟아나더니, 그녀의 손에는 거대한 채찍이 형성되었다. 가시가 박힌 붉은 채찍이었다.
“내가 네게 알려주지.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자의 절망이 얼마나 깊은지. 그리고 그 절망이 얼마나 지독한 힘으로 변할 수 있는지를.”
윤슬은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세린을 향해 돌진했다. 대낫이 불꽃처럼 번뜩였다.
“감히!”
세린의 채찍이 허공을 갈랐다. 찢어지는 소리가 빗소리를 집어삼켰다. 붉은 채찍은 거대한 뱀처럼 윤슬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하지만 윤슬은 피하지 않았다. 대낫을 비스듬히 세워 채찍의 일격을 막아냈다. ‘쨍!’ 하는 굉음과 함께 섬광이 터져 나왔다. 대낫의 크리스탈 날과 가시 박힌 채찍이 격렬하게 충돌했다. 붉은 마력과 검은 마력이 뒤엉키며 주변의 모든 것을 뒤흔들었다. 안뜰의 조각상들이 균열하기 시작했고, 저택의 유리창들이 파르르 떨렸다.
“끝이다, 세린.”
윤슬의 목소리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없이 차갑게 울렸다. 그녀의 대낫이 빠르게 회전하며 세린의 채찍을 얽어매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크리스탈 파편들이 마치 칼날처럼 세린의 마력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세린의 얼굴에 고통스러운 비명이 번졌다.
“크아악! 이럴 수가… 네가 감히!”
윤슬은 세린의 비명을 들으며, 과거의 자신이 흘렸던 눈물을 떠올렸다. 그 날, 모든 것을 잃었던 절망을. 그리고 그 모든 절망을, 이제 세린에게 되돌려줄 시간이었다. 대낫의 날이 더욱 깊이 파고들었고, 세린의 마력 채찍은 점점 더 비명을 지르며 찢겨나갔다. 검은 마력의 폭풍이 핏빛 장미 정원을 집어삼키는 듯했다.
이것이 시작이었다. 피와 고통으로 점철된 복수의 서막이었다.
윤슬은 미련 없이 대낫을 휘둘렀다.
“이제부터 시작이야, 세린.”
그녀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번졌다.
“네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난 너의 모든 것을, 하나하나 부숴줄 테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