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마른 바람이 창백한 달빛 아래 거대한 성벽을 휘감았다. 왕도 아카디아의 심장부, 가장 오래되고 위엄 있는 가문 중 하나인 ‘블랙우드’ 공작가. 그 웅장한 저택의 최상층에 위치한 서재는 밤의 정적 속에서 더욱 짙은 침묵을 머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고요함은 불과 몇 시간 전, 하나의 찢어지는 비명과 함께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기사단장 카이르의 딱딱한 철제 부츠가 공작가 복도의 붉은 카펫 위를 불안하게 울렸다.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은 그림자처럼 가늘고 창백한 남자, 엘리안 크롬웰이었다. 왕국 수도에서 ‘그림자 속의 눈’이라 불리는, 별종 중의 별종. 법률도 마법도 아닌, 오직 순수한 논리와 관찰로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내는 기재(奇才). 카이르는 그를 탐탁지 않아 했다. 기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강인한 육체와 불굴의 정신인데, 엘리안은 그 두 가지와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 어떤 기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할 정도로 기괴했다.
“여기입니다, 엘리안 경.” 카이르의 목소리에는 어색한 존경과 노골적인 불신이 뒤섞여 있었다. 그는 굳게 닫힌 거대한 오크나무 문 앞에 멈춰 섰다. 문고리에는 이미 왕실 인장의 봉인이 붙어 있었다. “고위 마법사 아르젠 님께서 발견되었습니다.”
엘리안은 아무 말 없이 문을 올려다보았다. 희미한 룬 문자가 문설주에 새겨져 있었고, 그 위로 오래된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방어를 위한 마법진. 그뿐만 아니라, 문틈 하나 새어 들어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닫혀 있었다. 밖에서는 굳건히 잠겨 있었고, 안에서는 이중 볼트가 걸려 있었다. 문을 부수는 대신, 고위 마법사들이 침투 마법을 시도했지만, 그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결국, 공작의 명령으로 문은 완전히 해체되어야만 했다.
“피해자는 고위 마법사 아르젠?” 엘리안의 목소리는 한밤의 서늘한 공기처럼 차분했다.
“네. 새벽녘에 그의 조수 시그룬이 아르젠 님을 깨우러 왔다가… 문이 잠겨 있어 이상하게 여겼답니다. 아침 식사에도 내려오지 않자 공작께서 직접 확인을 명하셨고, 결국 문을 부수고 들어갔을 때… 아르젠 님은 이미…” 카이르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눈에 번져 있는 혼란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엘리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부서진 문틀 사이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서재는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고대 두루마리와 마법 서적들이 빽빽이 들어찬 책장은 천장까지 닿아 있었고, 중앙에는 별자리와 룬 문자가 새겨진 거대한 지구의가 놓여 있었다. 공기의 흐름마저 멈춰버린 듯한, 오래된 종이와 잉크 냄새가 맴도는 공간. 그리고 그 중심에, 털이 곤두서는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마법 원형 탁자 위, 아르젠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 자세로 쓰러져 있었다. 눈은 공포에 질린 채 크게 뜨여 있었고, 입은 경악에 벌어져 있었다. 그의 가슴에는 빛나는 검은 수정 단검이 깊숙이 박혀 있었다. 칼날에서 희미한 어둠의 기운이 피어오르는 것이 보였다. 문제는 단검이 아니었다. 그의 시신 주변, 약 3피트 정도의 공간이 마치 투명한 막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곳에 있는 모든 먼지, 작은 조각 하나조차 흔들림 없이 정지해 있었다.
“그 누구도 이 방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직접 모든 출입을 통제했습니다.” 카이르가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창문은 어떠냐고 묻는 이들도 있겠지만, 보시다시피 이 방은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아래는 수백 피트의 낭떠러지이고, 창문은 강철 봉으로 단단히 막혀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서재는 아르젠 님께서 특별히 마법으로 봉인해 두셨습니다. 외부에서는 그 어떤 마법적인 간섭도 불가능합니다. 그 누구도 이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엘리안은 말없이 방을 훑었다. 그의 시선은 책장, 탁자, 바닥의 미세한 먼지, 그리고 천장의 샹들리에까지 빠짐없이 훑어 내려갔다. 그의 눈빛은 날카로운 독수리 같았고, 모든 것을 스캔하는 듯했다. 그는 카이르가 미처 보지 못한, 혹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모든 것을 담아내는 듯했다.
“재밌군요.” 엘리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방에서 나간 사람도 없다는 말이 되겠군요.”
카이르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합니다. 문은 안에서 걸려 있었고, 밖에서는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었습니다. 시신을 처음 발견했을 때도 방은 여전히 봉인된 상태였습니다. 말 그대로 밀실입니다.”
엘리안은 시신을 중심으로 천천히 원을 그리며 걸었다. 그의 발걸음은 깃털처럼 가벼웠고, 오래된 마법 양탄자 위에서도 거의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는 검은 단검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은 생명력을 빨아들이는 듯한 섬뜩함을 주었다. 분명 강력한 저주 마법이 깃든 무기였다.
“칼을 본 적 있습니까?” 엘리안이 물었다.
카이르는 잠시 생각했다. “아르젠 님은 여러 마법 도구를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렇게 사악한 기운을 뿜어내는 단검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평화로운 연구자였습니다.”
“그렇다면 범인은 이 칼을 어디서 구했을까요? 그리고 어떻게 이 완벽한 밀실 안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마치 유령처럼 사라질 수 있었을까요?” 카이르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듯 중얼거렸다. 그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엘리안은 답하지 않았다. 그는 시신을 둘러싼 왜곡된 공간에 손을 뻗었다. 그의 손가락이 투명한 경계에 닿자, 미세한 파동이 일었다. 마치 고인 물에 돌을 던진 것처럼.
“음…” 엘리안은 짧게 콧소리를 냈다. “강력한 시간 왜곡 마법의 흔적. 살해당한 순간의 시간이 이 공간에 갇혀 버린 것 같군요. 범인이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의도치 않게 일어난 부작용인지는 좀 더 살펴봐야겠습니다.”
카이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시간 왜곡 마법이라니요? 그런 강력한 마법을 쓸 수 있는 자는 왕국에도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게다가, 그것이 어떻게 살인과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엘리안은 손을 거두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은 천장의 화려한 샹들리에를 향했다. 샹들리에에는 수십 개의 마법 수정이 박혀 있었고, 그중 하나가 미세하게 금이 가 있었다. 워낙 높은 곳에 있어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였다.
“카이르 단장, 이 방의 모든 창문은 외부에서 봉인되어 있다고 했죠?” 엘리안이 물었다.
“네. 강철 봉과 마법 봉인으로 완벽하게. 어떤 조그만 벌레 한 마리도 드나들 수 없을 겁니다.” 카이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엘리안은 창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말이죠, 단장. 이 방의 공기가 너무나도 고요하고 오래된 냄새가 나는데, 창문이 그렇게 완벽하게 봉인되어 있었다면… 이 작은 모래먼지는 어떻게 이 창틀 위에 쌓일 수 있었을까요?”
카이르의 시선이 엘리안의 손가락 끝을 따라 창틀로 향했다. 그곳에는 정말, 아주 미세한 모래알갱이 몇 개가 앉아 있었다. 육안으로는 거의 식별하기 힘들 정도의 작은 흔적. 카이르는 눈을 찡그렸다. “그것은… 그저 오래된 먼지일 뿐입니다. 공작저의 모든 서재가 그렇습니다.”
“먼지와 모래는 다릅니다, 단장.” 엘리안은 여전히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직했지만, 그 안에는 강철 같은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이 모래는… 외부에서 유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선한 흔적입니다. 심지어 이 방의 마법 봉인이 작동하고 있었다면, 이런 외부 먼지는 절대 들어올 수 없었겠죠.”
카이르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엘리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엘리안의 말이 맞다면… 이 완벽한 밀실은, 사실은 완벽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럼… 창문을 통해 침입자가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말도 안 됩니다. 수백 피트 낭떠러지인데다가, 그 높이에서 강철 봉을 부수고 마법 봉인을 해제했다면… 그건 인간의 짓이 아닙니다!”
엘리안은 비로소 샹들리에에서 시선을 떼고 카이르를 똑바로 응시했다. 그의 창백한 눈동자가 차가운 지성을 뿜어냈다.
“단장님, 인간의 짓이 아닐 수도 있죠. 하지만 ‘불가능’은 아닙니다. 이 모래의 출처가 정확히 어디인지, 그리고 왜 아르젠 님이 칼에 찔린 채 시간 속에 갇혀버렸는지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이제부터 제가 풀어야 할 퍼즐입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범인이 들어오고 나간 통로는 오직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통로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완벽하게 봉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엘리안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시신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는 이미 사건의 윤곽이 어렴풋이 그려지고 있는 듯했다. 카이르는 여전히 의심과 경외심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천재의 그림자가 서서히 밀실 살인의 베일을 걷어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 방에는, ‘시간’의 흔적 외에도… 아주 흥미로운 ‘무게’의 흔적이 남아 있군요.” 엘리안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의 시선은 바닥의 마법 양탄자 한 귀퉁이를 향해 있었다. 카이르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