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해, 가동률 87%. 동력 코어 출력은 불안정. 전방위 스캔, 침입자 탐지 완료. 교전 거리 500킬로미터.”
강하준은 낡은 메카 ‘잔해’의 조종석에 몸을 욱여넣으며 뻑뻑하게 굳은 손가락으로 콘솔을 두드렸다. 헬멧 속 시야는 붉은 경고등으로 가득했지만, 그의 눈동자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빛났다. 망가진 로터 블레이드처럼 지직거리는 무전기 너머로 익숙하면서도 끔찍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준이냐? 설마 살아있을 줄이야. 대단한 끈기군. 하지만 네놈의 고철 덩어리가 여기까지 온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지금이라도 돌아가라. 네 목숨은 살려주지.”
이현수. 한때 그의 심장과도 같았던 사내. 같은 꿈을 꾸고, 같은 기체에 올라 수많은 전장을 누볐던 유일한 친구. 그리고 그를 나락으로 밀어 넣은 배신자.
하준은 피식 웃었다. 핏기 없는 입술 사이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돌아가라고? 현수, 네가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난 이제 돌아갈 곳조차 없어. 오늘 이 밤, 네놈의 심장에 내가 꽂아 넣을 칼날을 생각하며 살아왔으니까.”
“하, 칼날? 그 녹슨 고철 덩어리로 뭘 하겠다는 거지? 네놈이 잃어버린 ‘철혈’의 조종간을 내가 쥐고 있는데 말이야.”
‘철혈’. 그것은 그와 현수가 함께 설계하고, 함께 만들었던 꿈의 기체였다. 완벽한 합금으로 빚어진 갑주, 폭발적인 동력, 그리고 두 사람의 합일된 정신이 만들어낼 무적의 메카.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현수의 탐욕에 의해 산산조각 났다. 현수는 철혈을 훔쳐, 하준을 죽음의 구덩이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그 철혈은 이제 ‘심판자’라는 오만한 이름으로 그의 앞에 서 있었다.
“현수, 네가 잃어버린 건 기체가 아니야. 영혼이지. 그리고 난 네놈의 영혼까지 갈가리 찢어놓을 거다.”
“헛소리는 그만! 내 진정한 힘을 보여주지!”
현수의 목소리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광기 어린 자신감만이 깃들어 있었다. 스크린에 현수의 ‘심판자’가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웠다. 검은색과 은색이 어우러진 유려한 갑주, 거대한 에너지 포와 펄스 블레이드를 장착한 모습은 과연 압도적이었다. 그것은 그가 과거에 꿈꿨던 완벽한 메카의 모습이었다. 다만, 그 조종석에 앉은 자가 지옥에서 기어 올라온 원수라는 사실만이 달랐을 뿐.
“전투 개시.”
하준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잔해’의 고철덩어리 같은 팔뚝에서 녹슨 개틀링이 굉음을 내며 불을 뿜기 시작했다. 현수의 심판자는 여유롭게 회피하며 거대한 에너지포를 발사했다. 폭발의 섬광이 우주 공간을 잠시 밝히고, 잔해는 간발의 차이로 폭심지를 벗어났다.
“어설픈 공격이군. 아직도 과거의 전술을 쓰나?” 현수가 비웃었다. “네놈이 설계한 무기가 얼마나 허접한지 몸소 느껴봐라!”
심판자의 팔이 변형되며 거대한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솟아올랐다. 현수는 망설임 없이 돌진했다. 그의 움직임은 정확하고 빠르며, 과거 하준과 함께 싸웠던 기억을 되살리게 할 만큼 완벽했다. 하준은 과거의 기억 속에서 현수의 공격 패턴을 읽어냈다. 그 패턴을 만들었던 건 바로 자신이었다.
“네놈의 모든 움직임, 내가 만들었지. 그래서 다 보인다고, 현수.”
잔해는 기적적으로 심판자의 맹공을 피하며 근접전을 유도했다. 심판자의 거대한 칼날이 잔해의 왼쪽 어깨를 스쳐 지나갔다. 찢어지는 쇳소리와 함께 스파크가 튀었다. 잔해의 팔이 너덜거렸지만, 하준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오히려 그 틈을 노려 잔해의 오른팔에 달린 낡은 진동 칼날을 휘둘렀다.
‘촤아악!’
심판자의 왼쪽 다리에 깊은 흠집이 생겼다. 강력한 실드에도 불구하고 하준의 칼날은 현수의 방어막을 뚫어냈다. 현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이럴 리가… 고작 저런 고철덩어리가?”
“나 역시 살아남기 위해선 뭐든 했어. 네놈이 날 버린 그 순간부터, 난 매일 밤 너를 죽이는 꿈을 꿨으니까!”
하준의 목소리에는 한이 서려 있었다. 그는 지난 몇 년간 지옥 같은 폐기물 행성에서 잔해를 수리하고, 강화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조립했다. 폐기된 무기와 버려진 부품들을 주워 모아 자신만의 싸움 방식을 익혔다. 더는 철혈의 완벽함에 의존하지 않았다. 오직 본능과 복수심에만 의존했다.
“닥쳐! 네놈의 추한 신세 한탄 따위!”
현수는 분노하며 심판자의 모든 무장을 개방했다. 등 뒤에서 수십 개의 미사일 포드가 열리고, 허벅지 장갑이 슬라이드 되며 소형 빔 캐논이 솟아올랐다. 우주 공간에 불꽃놀이가 터지듯 폭발과 섬광이 난무했다. 잔해는 압도적인 화망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렸다.
“망할! 이 정도는 예상했어!”
하준은 침착하게 기체를 조종하며 최대한의 회피 기동을 펼쳤다. 잔해의 몸체 곳곳이 피격되어 연기를 뿜어냈지만, 하준은 오직 한 점만을 노렸다. 심판자의 동력 코어. 현수와 함께 철혈을 설계할 때, 동력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코어를 기체의 중앙부에 집중시켰다는 것을 하준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동시에 가장 취약한 부분이기도 했다.
하준은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으로 잔해를 현수의 시야 사각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잔해의 모든 에너지를 한곳에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불안정하게 지직거리던 동력 코어는 위험 수위를 넘어섰다. 붉은 경고등이 섬광처럼 터졌다.
“제길, 버텨! 버티라고, 잔해!”
잔해의 오른팔에 장착된 진동 칼날이 거대한 굉음을 내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에너지가 칼날 끝에 집중되었다.
“어디냐! 어디 숨었어, 비겁한 놈!”
현수는 사방을 스캔하며 하준을 찾았다. 그때, 그의 뒤편에서 맹렬한 기세로 돌진해오는 잔해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미친 늑대 같았다.
“이런 무모한 짓을…!”
현수는 심판자의 플라즈마 블레이드를 휘둘러 잔해를 막으려 했다. 하지만 하준의 움직임은 예측 불가능했다. 그는 심판자의 블레이드를 온몸으로 받아낼 기세로 돌진했다.
‘콰아앙!’
플라즈마 블레이드가 잔해의 왼쪽 어깨부터 허리까지 대각선으로 갈랐다. 찢어지는 쇳소리와 함께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잔해는 한쪽 팔과 다리가 완전히 날아가며 처참한 모습으로 비명을 질렀다. 조종석에도 충격이 가해져 하준의 몸이 격렬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의 눈은 번뜩였다.
“지금이다…!”
하준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잔해의 오른팔을 뻗었다. 그리고 그 끝에 달린 붉은 진동 칼날을 심판자의 동력 코어에 정확히 박아 넣었다. 현수와 함께 수백 번 실험하고, 수천 번 수정했던 그 취약점을 향해.
‘지지직… 펑!’
진동 칼날이 심판자의 방어막을 뚫고 코어에 도달하자, 거대한 폭발이 심판자의 중앙에서부터 터져 나왔다. 검은 연기와 함께 내부 회로가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심판자의 화려했던 갑주가 녹아내리며 끔찍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현수의 절규가 무전기를 통해 하준의 헬멧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심판자의 조종간을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동력 코어의 폭발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고, 심판자는 내부에서부터 붕괴하기 시작했다.
잔해는 거의 반파된 몸으로 심판자의 폭발 범위에서 겨우 벗어났다. 하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조종석의 파편들이 그의 몸을 긁고 지나갔지만, 그는 아픔조차 느끼지 못했다. 오직, 현수가 절규하는 소리만이 그의 귓가에 선명했다.
심판자는 거대한 불덩이가 되어 우주 공간에서 천천히 산산조각 났다. 마지막 파편 하나까지 사라질 때까지, 하준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모든 것이 끝났다.
승리감도, 환희도, 심지어 후련함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깊고 깊은 공허함만이 그의 심장을 갉아먹었다. 수년간의 증오와 복수심이 사라지자, 그 자리에는 거대한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잔해… 가동률 0%. 모든 시스템 다운. 동력 코어 완전 파괴.”
잔해의 조종석 스피커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하준은 피식 웃었다. 친구가 사라진 것처럼, 그와 함께 싸웠던 잔해도 이제는 작동을 멈췄다. 폐기물 행성에서 주워 온 고철 덩어리는 그와의 복수극을 함께하며 장렬하게 불탔다.
그는 헬멧을 벗었다. 차가운 땀방울이 그의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별들이 수놓인 밤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 별들 속에서 그는 무엇을 찾아야 할까. 아니, 이제 더 이상 무엇을 찾아야 하는가.
하준은 망가진 잔해의 조종석에 등을 기댔다. 창백한 달빛이 그의 지친 얼굴을 비췄다. 그의 눈에는 눈물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오직, 끝없는 어둠만이 그를 감쌌다.
복수는 끝났다.
그리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