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아포칼립스 생존 연재 웹소설의 첫 번째 챕터

재가 부서지는 소리가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폐허가 된 도시의 잿빛 잔해 위로 붉게 녹슨 태양이 겨우 몸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텁텁한 흙먼지가 목구멍을 긁었다. 스무 해를 이런 세상에서 살아온 유진에게는 이제 너무나 익숙한 감각이었다.

손에 든 낡은 나이프는 닳고 닳아 날이 무뎌졌지만, 아직은 쓸 만했다. 오늘은 운이 좋았다. 무너진 백화점 잔해 속에서 찌그러진 통조림 몇 개와 거의 말라버린 물통을 찾아냈다. 이 정도면 일주일은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사흘?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를 ‘그것들’에게 당하면 끝이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솟아 있는 거대한 그림자를 응시했다. 무수한 첨탑과 아치형 지붕이 뒤섞인 기괴한 형상. 세상이 멸망하기 전, 마법의 정점이라 불리던 아르카나 마법학원의 잔해였다. 저곳은 소문이 무성했다. 마법 재앙의 근원이었다는 말부터, 모든 마법 지식이 잠들어 있는 보고라는 말까지. 하지만 가장 널리 퍼진 소문은, 그곳이 ‘죽음의 둥지’라는 것이었다. 발을 들이는 자는 누구든 살아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섬뜩한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진의 시선은 낡은 종이 한 장에 박혀 있었다. 오늘 통조림과 함께 찾아낸, 더 낡은 종이. 찢어진 가장자리를 따라 옅게 번진 잉크 자국. 알아보기 힘든 글자들이 춤을 추듯 흐트러져 있었지만, 한 단어만큼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지하(地下)’

그리고 그 아래에는 희미하게 그려진 미로 같은 선들이 있었다. 아르카나 학원의 건물 구조도가 분명했다. 특히 맨 아래쪽에 그려진, 기괴하게 뒤틀린 문양과 연결된 ‘알 수 없는 공간’이 유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다른 부분은 대충 그려져 있었지만, 이 부분만큼은 섬세하게, 마치 무언가를 경고하듯이 강조되어 있었다.

“죽음의 둥지라…….”

유진은 피식 웃었다. 어차피 이 세상 모든 곳이 죽음의 둥지였다. 굶어 죽지 않으면, 병들어 죽고,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아니면 살아남은 인간들의 칼날에 쓰러진다. 어쩌면 그 죽음의 둥지 아래에, 지독한 세상에서 살아남을 한 줄기 희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그녀를 사로잡았다.

결정은 빨랐다. 이곳에서 며칠 더 버티는 것과, 저 미지의 학원으로 향하는 것. 어느 쪽이든 위험한 건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미지의 위험을 택하리라.

해가 질 무렵, 유진은 학원의 거대한 그림자 아래에 도착했다. 수십 미터에 달하는 높이의 건물들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갈라진 벽면에는 한때 화려했을 마법 문양들이 희미하게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건물 주변은 무성한 잡초와 기형적으로 자란 덩굴식물로 뒤덮여 있었다. 공기는 묵직했다. 단순한 먼지가 아니라, 오래된 마법의 잔향,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혐오스러운 기운이 섞여 있는 듯했다.

“젠장, 정말 기분 더럽네.”

유진은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을 삼키며 조심스럽게 폐허 안으로 발을 디뎠다. 내부 또한 외부와 다를 바 없었다. 무너진 천장, 깨진 마법 램프 조각들,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뒤틀린 가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때 수많은 학생들이 오가며 마법을 탐구했을 복도는 이제 적막만이 가득했다. 발소리조차 크게 울려 퍼지는 게 불쾌했다.

“누구 없어요?”

혹시 모를 생존자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지만, 돌아오는 것은 자신의 메아리뿐이었다. 유진은 품에서 낡은 종이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찾아야 할 것은 ‘지하’로 향하는 길이었다. 학원의 구조는 복잡했지만, 그녀가 가진 지도는 가장 하층부, 그 알 수 없는 공간을 강조하고 있었다.

복도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도서관의 입구가 보였다. 육중한 나무 문은 이미 반쯤 부서져 있었고, 내부에는 책들이 썩어 문드러진 냄새가 진동했다. 유진은 코를 찌푸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수천, 수만 권의 책들이 쌓여 있던 서가들은 이제 흉물스러운 뼈대처럼 남아 있었다. 바닥에는 곰팡이가 피고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낡은 종이에서 본 문양과 흡사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도서관 중앙의 거대한 받침대. 그 위에는 한때 마법 지도를 펼쳐놓았던 것으로 보이는 둥근 석판이 있었다. 석판의 가장자리에는 닳고 닳은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종이 속의 뒤틀린 문양과 정확히 일치했다.

유진은 조심스럽게 석판에 다가갔다. 먼지를 털어내자, 문양 사이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깜빡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석판 아래에서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진동이 느껴졌다.

서가 한쪽이 천천히 옆으로 밀려났다. 그 뒤에는 칠흑 같은 어둠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지하에서 불어 올라와 유진의 머리칼을 흩날렸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었다. 비릿하고 습한 냄새, 그리고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한 냉기가 그녀를 감쌌다. 본능적으로 경고등이 울렸다.

“젠장, 이게 대체…….”

지도를 따라왔지만, 이토록 노골적으로 드러난 입구는 오히려 유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너무나 쉽게 발견된 것 아닌가? 그러나 이미 발은 한 발짝 내딛고 있었다. 그녀는 나이프를 고쳐 잡고, 허리춤에 찬 낡은 손전등을 켰다. 좁은 계단이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내려갈수록 공기는 더욱 차갑고 끈적해졌다. 벽면에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들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했다. 불쾌한 속삭임이 귓가를 맴도는 것 같았다.

얼마나 내려갔을까. 계단의 끝에 다다르자, 거대한 복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복도의 천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높았고, 양쪽 벽면에는 등 간격으로 기둥들이 솟아 있었다. 이 기둥들은 단순한 건축물이 아니었다. 하나하나가 거대한 마법 수정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그 수정 안에서는 붉고 검은 섬광이 불규칙하게 깜빡였다.

바닥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액체가 고인 듯했다. 그것은 물이 아니었다. 끈적하고 탁한 붉은빛 액체였다. 비릿한 철분 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부패한 향기가 진동했다.

유진은 손전등을 복도 끝으로 비췄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보이는 거대한 문. 낡은 금속과 뼈 조각들이 뒤섞인 듯한 기괴한 형상의 문이었다. 문 위에는 거대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그것은 그녀가 낡은 종이에서 보았던 ‘알 수 없는 공간’의 문양과 똑같았다. 그러나 종이의 문양은 순수한 검은색이었지만, 이 문양은 핏물 같은 붉은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때, 복도 끝에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스스로 열리고 있었다. 서서히 벌어지는 문틈 사이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튀어나왔다.

길고 검은 촉수.

그 촉수는 마치 굶주린 뱀처럼 꿈틀거리며 유진을 향해 뻗어 왔다. 동시에 어둠 속에서 수많은 눈동자가 일제히 유진을 응시하는 듯한 섬뜩한 감각이 그녀의 온몸을 덮쳤다.

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이것은, 분명 그녀가 평생을 피해왔던 ‘그것들’과는 다른 종류의 공포였다. 이것은 살아있는 공포, 끔찍한 금기의 현신이었다.

촉수는 빠르게 다가왔다. 차가운 금속 같은 질감과 끈적한 이물감이 느껴졌다.

“크윽!”

유진은 비명을 삼키며 나이프를 휘둘렀지만, 촉수는 너무나 빨랐다. 그녀의 몸을 휘감은 촉수는 순식간에 그녀를 들어 올렸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유진은 자신이 끔찍한 문 안으로 끌려들어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복도 전체를 가득 채운 기괴한 비명 소리가 유진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것은 괴물의 소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인간들의 고통스러운 절규가, 어둠 속에서 그녀를 맞이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