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새벽은 언제나 장엄했다. 거대한 수정 첨탑들은 아침 햇살을 받아 무지개 빛으로 부서졌고, 학생들은 부유 마법으로 교정 위를 유영하며 강의실로 향했다. 그러나 강태율에게 그 모든 화려함은 낡은 종이 한 장처럼 무덤덤하게 느껴졌다. 그는 언제나 저 완벽한 풍경 어딘가에 숨겨진 작은 균열을 찾아 헤매는 아이였다.
“강태율! 또 딴생각이야?”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뚫고 들어왔다. 옆자리에 앉은 한세아였다. 은테 안경 너머로 그녀의 눈매는 칼날처럼 날카로웠지만, 왠지 모르게 걱정이 배어 있었다. 그녀의 손가락은 마법 서책 ‘에테르 기초론’의 페이지를 쉼 없이 넘기고 있었다.
“무슨 소리. 완벽하게 집중하고 있었거든.”
태율은 피식 웃었지만, 그의 시선은 창밖의 구름다리를 떠돌고 있었다. 구름다리 너머에는 학원 설립자들의 거대한 석상이 늘어서 있었고, 그 석상들 아래, 바위투성이 절벽 깊숙한 곳으로 이어지는 통로 하나가 희미하게 보였다. 저곳은 ‘잊힌 심층부’라 불리며, 학생들이 접근 금지된 구역이었다.
“거짓말도 그럴싸하게 해라. 이따가 ‘원소 분석’ 실기 시험인 거 잊었어? 또 최하위 찍을 셈이야?” 세아가 한숨을 쉬었다. “넌 대체 왜 이렇게… 아르카나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을 하는 거야?”
“어울리는 게 뭔데?” 태율은 어깨를 으쓱였다. “저 고리타분한 이론들? 아니면 밤낮없이 마력에 매달리는 미친 사람들? 난 그냥… 좀 더 흥미로운 걸 찾고 있을 뿐이야.”
그의 말에 세아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녀는 태율의 ‘흥미로운 것’이 보통은 문제를 일으키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야, 혹시 너 어제 그 소문 들었어?” 세아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사서 보조로 일하는 애가 그랬는데… 지하에 있는 폐기물 처리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났대.”
태율의 눈이 번뜩였다. “이상한 소리라니?”
“뭐, 웅얼거리는 소리 같기도 하고, 기계음 같기도 하대. 밤마다 들린다고 하더라. 기분 나빠서 못 자겠다고 난리더라니까.”
세아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이어갔지만, 태율의 머릿속에서는 어제 본 학원 설계도가 스쳐 지나갔다. 학원의 가장 오래된 도서관 지하에 ‘폐기물 처리장’이라는 명목의 공간이 있었는데, 그 규모가 비정상적으로 거대했다. 단순히 쓰레기를 처리하는 곳이라고 하기엔 너무 복잡한 구조였다. 게다가 그곳으로 향하는 길은 거의 봉인되다시피 했다.
“사서 보조라면… 지하 서고 쪽 이야기인가?” 태율이 중얼거렸다.
“응. 다들 오래된 학원 괴담 정도로 치부하더라. 지하 서고 끝에는 ‘금기 연구실’이 숨겨져 있다느니, 그곳에서 과거의 위대한 마법사들이 실종됐다느니 하는.” 세아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난 그런 미신 같은 건 안 믿어.”
태율은 대답 없이 턱을 쓰다듬었다. 미신이라… 하지만 아르카나 학원에는 너무 많은 ‘미신’이 있었다. 그리고 그 미신들 대부분은 어딘가에 실체가 숨겨져 있었다.
그날 오후, 태율은 ‘원소 분석’ 실기 시험에서 간신히 낙제를 면했다. 세아의 잔소리를 뒤로하고, 그는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목적지는 폐쇄된 지 오래된 ‘고대 마법 문서 보관실’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출입 금지 구역이었지만, 태율에게는 이미 여러 개의 우회로가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다.
낡은 복도를 따라 걸을수록 습하고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와 닿았다. 마력으로 밝혀진 길은 희미했고, 벽에는 오래된 먼지와 거미줄이 엉겨 있었다. 마침내 보관실의 육중한 문이 나타났다. 육안으로는 단순한 낡은 문처럼 보였지만, 태율의 ‘감각 마법’은 미세한 마력 보호막을 감지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손끝에 마력을 모았다.
“젠장, 이런 곳에까지 보안 마법이라니.”
복잡한 마력 흐름을 역추적해 봉인을 해제하는 데 성공하자, 문은 스르륵 열렸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고, 태율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섰다. 보관실 내부는 어둠으로 가득했다. 그의 손끝에서 작은 빛 구슬이 떠올라 내부를 밝혔다.
수많은 오래된 서책들과 두루마리들이 빽빽하게 쌓여 있었다. 먼지가 자욱했지만, 관리되지 않았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지런했다. 태율은 한참을 헤매다 서고의 가장 안쪽, 다른 서책들과는 다르게 검은색 철제 띠로 봉인된 낡은 목함 하나를 발견했다. 목함 위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강력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율은 조심스럽게 목함의 봉인을 풀었다. 철제 띠가 스르륵 풀리자, 오래된 나무 냄새와 함께 섬뜩한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목함 안에는 낡은 양피지 두루마리 하나와 수정으로 만든 듯한 작은 단말기가 들어 있었다. 양피지는 너무 오래되어 글자가 희미해져 있었지만, 단말기는 마치 어제 만들어진 것처럼 깨끗했다.
그는 단말기를 집어 들었다. 손에 닿자마자 차가운 기운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단말기 중앙의 검은 수정이 희미하게 빛나더니, 고대 문자들이 화면에 떠올랐다.
`[접근 코드 입력 바랍니다.]`
태율은 미간을 찌푸렸다. 암호화된 장치였다. 이런 곳에 숨겨져 있을 정도면 단순한 물건이 아닐 터였다. 그는 주변을 둘러봤다. 양피지에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너무 낡아 해독하기 어려웠다.
그때, 등 뒤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졌다. 바닥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지진이라고 생각했지만, 진동은 일정하고 규칙적이었다. 마치 거대한 기계가 지하 깊은 곳에서 숨 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진동과 함께, 아주 희미하게, 마치 물속에서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우우웅… 웅… 콰직…`
세아가 말했던 그 ‘이상한 소리’였다. 폐기물 처리장이라던가, 지하 서고 끝의 금기 연구실이라던가… 태율의 머릿속에서 파편들이 하나로 맞춰지기 시작했다.
진동은 점점 더 강해졌다. 보관실의 낡은 서책들이 희미하게 떨리기 시작했고, 어둠 속에서 알 수 없는 그림자들이 길게 늘어졌다. 단말기의 검은 수정은 더욱 강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단말기를 든 채 바닥에 귀를 기울였다. 소리는 확실히 아래에서 올라왔다. 아주 깊은 곳에서. 그리고 그 소리 속에는 단순한 기계음 이상의, 무언가 생체적인 리듬이 섞여 있는 듯했다.
갑자기, 단말기 화면의 고대 문자 옆에 새로운 문장이 깜빡이며 나타났다.
`[에너지원 감지. 지하 층간 이동 프로토콜 활성화 대기 중.]`
태율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었다. ‘지하 층간 이동’? 이 단말기는 단순한 정보 기기가 아니었다.
그 순간, 보관실 한쪽 벽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철판이 드러났다. 철판은 아무런 문고리도, 잠금장치도 없었지만, 중앙에 마치 마력 코어를 삽입하는 듯한 원형 홈이 파여 있었다. 그리고 그 홈은, 태율이 들고 있는 단말기의 검은 수정과 정확히 일치하는 크기였다.
그는 천천히 단말기의 검은 수정을 그 홈에 가져다 댔다. 망설임도 잠시, 묘한 끌림에 이끌려 단말기를 끼워 넣었다.
`철컥!`
단말기가 홈에 완벽하게 결합되자, 거대한 철문이 이글거리는 붉은빛과 함께 천천히 옆으로 미끄러져 열리기 시작했다. 문틈으로 스며드는 것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었다. 눅눅하고 축축한, 그리고 쇠 비린내가 섞인 역겨운 공기였다. 그리고 그 너머로, 끝없이 아래로 이어지는 나선형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통로의 벽면은 알 수 없는 금속 재질로 되어 있었고, 곳곳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문양과 함께 녹슨 파이프들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 통로의 가장자리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끈적하고 검붉은 액체였다. 그것은 마치 살아있는 피처럼 꿈틀거렸다.
그리고 아래에서 웅얼거리는 소리는 이제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수천, 수만 개의 목소리가 한데 엉켜 토해내는 비명 같기도 하고,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소리 같기도 했다. 그것은 심장을 옥죄는 공포 그 자체였다.
강태율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학원의 오래된 괴담이 아니었다. 그것은 살아있는 진실이었다.
아르카나 마법 학원의 지하에는, 단순한 폐기물 처리장 따위가 아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끔찍한 금기가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 금기의 문이 그의 눈앞에서 열렸다.
새로운, 그리고 끔찍한 세계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