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빛 먼지가 덮인 하늘 아래, 강진우는 폐허가 된 도시의 심장부로 조심스럽게 발을 들였다. 녹슨 철골과 바스러진 콘크리트 잔해들이 거대한 뼈대처럼 흉물스럽게 솟아 있었다. 한때 번화했던 상점가의 흔적은 이제 그저 썩어가는 시체와도 같았다. 그의 목표는 저 멀리, 기형적으로 주저앉은 ‘신세계’라는 간판이 걸린 거대한 백화점 건물이었다.
“젠장, 또 여기로 오게 될 줄이야.”
진우는 낮게 중얼거렸다. 스크래치 투성이의 마스크 안으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몇 달 전, 이곳에 발을 들였다가 죽을 뻔한 기억이 생생했다. 놈들은 마치 건물의 그림자처럼 숨어 있었다. 이번에는 달라야 했다. 식량도, 약품도 바닥이었다. 이젠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낡은 방탄 조끼는 제 기능을 할지 의문스러웠고, 손에 든 반자동 소총은 묵직했지만 탄창은 절반도 채워져 있지 않았다. 등에 멘 배낭 속에는 겨우 물 한 병과 몇 개의 에너지바, 그리고 만일을 대비한 칼이 전부였다.
백화점 입구는 거대한 이빨 빠진 아가리처럼 뻥 뚫려 있었다. 자동문은 진작에 파손되어 어디론가 사라졌고, 유리 파편들이 바닥에 별처럼 흩어져 있었다. 진우는 길게 숨을 들이쉬고는, 발소리를 죽인 채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내부는 지독한 먼지와 곰팡이 냄새로 가득했다. 햇빛이 부서진 천장에서 희미하게 쏟아져 내려와, 썩어가는 마네킹들의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고급스러웠을 진열대들은 텅 비어 있었고, 그 위에 쌓인 먼지는 수십 년의 시간을 말해주는 듯했다.
“아무것도 없네.”
진우는 1층을 훑어보았다. 이미 수없이 많은 생존자들이 다녀간 흔적이 역력했다. 찢어진 옷가지, 빈 통조림 캔, 그리고 바닥에 굳어버린 검붉은 얼룩. 그 얼룩을 볼 때마다 진우의 심장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누군가의 마지막 흔적.
그는 더욱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소총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런 곳에서는 작은 소음도 죽음을 부를 수 있었다. 숨소리마저 멎는 듯한 고요 속에서, 그의 귀는 미세한 움직임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때였다. 텅 빈 화장품 코너의 한 진열대에서 무언가 번뜩였다. 유리 조각이 아니라, 금속성의 작은 반짝임이었다. 진우는 천천히 다가가, 흐릿한 조명 아래 그것을 확인했다.
자세히 보니, 한때 향수병이 놓여 있었을 진열대 가장자리에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갓 떨어진 듯한 핏방울이 말라붙어 있었다. 검붉은 얼룩과는 달랐다. 이건, 최근의 흔적이었다.
“젠장.”
진우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누가 다녀간 걸까? 다른 생존자일까, 아니면… 놈들일까?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덜컹’ 하는 소리가 들렸다.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 2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진우의 심장이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놈들이었다. 분명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벽 뒤에 숨겼다. 소총을 바짝 당겨 쥐었다. 놈들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했다. 하지만 소리는 하나뿐이었다. 한 마리인가? 아니면 유인책인가?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놈들이 이 층으로 내려오기 전에 위로 올라가야 했다. 이 거대한 폐허 속에서 놈들에게 쫓기다간, 결국엔 막다른 곳에 몰릴 게 뻔했다.
진우는 천천히, 그러나 빠르게 움직여 낡은 에스컬레이터로 향했다. 작동하지 않은 지 오래된 에스컬레이터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를 때마다 삐걱이는 금속 소리가 그의 심장을 옥죄었다.
2층에 발을 디디자마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진우를 덮쳤다. 피와 썩은 살, 그리고 곰팡이가 뒤섞인 듯한 지독한 악취였다. 분명 놈들이 가까이 있었다.
내부는 1층보다 훨씬 더 어두웠다. 옷가지들이 널브러진 의류 코너 사이로, 찢어진 마네킹들이 팔다리가 부러진 채 널려 있었다. 진우는 소총을 비스듬히 들고 전방을 주시했다.
그때였다. 시야 한쪽 끝, 거울처럼 빛나는 쇼윈도에 비친 희미한 형체. 길고 비정상적으로 꺾인 팔다리, 굽은 허리. 머리에는 뿔처럼 솟아오른 뼈 조각들.
진우는 숨을 멈췄다. 놈은 ‘추적자’ 변종이었다. 놈들은 다른 변종들과 달리 소리에 민감하고, 느리지만 집요하게 먹잇감을 추적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놈들이 단독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추적자가 나타났다는 건, 주변에 다른 놈들도 있다는 뜻이었다.
놈은 쇼윈도 반대편, 꽤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진우를 보지는 못했지만, 놈의 기형적인 머리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공기 중의 미세한 진동을 감지하는 것처럼.
진우는 최대한 몸을 웅크렸다. 절대 먼저 움직여선 안 된다. 놈의 움직임을 파악해야 했다. 놈이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의 목숨은 위태로워질 터였다.
추적자는 갑자기 고개를 꺾어 진우가 숨어 있는 방향을 응시했다. 마치 그의 심장 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이. 그리고는 천천히, 마치 먹잇감을 감상하듯이,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덜컹.’
그 소리는 1층에서 들었던 바로 그 소리였다. 놈은 이미 진우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마도 아까 그 핏방울은, 이놈이 떨어뜨린 것이었으리라.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이었다. 소총을 들어 놈의 머리를 겨냥하려는 순간, 그의 뒤편에서 또 다른 ‘덜컹’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훨씬 가까운 곳에서. 마치 그의 등 뒤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진우는 재빨리 고개를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또 다른 추적자의 그림자가 그의 목덜미를 향해 길게 뻗어왔다. 날카로운 발톱이 공기를 갈랐다.
“크악!”
진우는 몸을 옆으로 던져 간신히 피했지만, 날카로운 발톱이 그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찢어진 방탄 조끼 틈새로 살이 찢어지는 고통이 밀려왔다. 뜨거운 피가 솟구쳤다.
두 마리였다. 놈들은 그를 사이에 두고 포위하고 있었다. 놈들의 찢어진 입에서 끔찍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우는 쓰러진 자세 그대로 소총을 놈들을 향해 겨냥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그는 이 지옥 같은 백화점에서,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놈들의 그림자가 점점 더 그를 덮쳐왔다. 진우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쏴야 했다. 지금 당장. 하지만 어디를 쏴야 할까? 어떤 놈을 먼저 쓰러뜨려야 할까? 그의 눈앞이 아득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