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비가 내렸다. 봉인각의 낡은 돌계단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물은 마치 붉은 피를 씻어낸 듯 희미한 비릿함을 머금고 있었다. 천명대회의 열기가 채 식기도 전에, 대회장은 싸늘한 적막감에 잠겨 있었다. 아니, 적막이라기보다는… 비명조차 삼켜버린 듯한 먹먹한 침묵이었다.
강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결승전에 마련된 무대 중앙으로 향했다. 발밑의 돌은 수많은 고수들의 피와 땀을 머금고 얼룩져 있었지만, 지금은 그 위에 기이한 서늘함만이 감돌았다. 지난 며칠간, 봉인각을 가득 채웠던 환호성과 격정적인 기합 소리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각 문파의 고수들이 하나둘씩 사라져갔다. 패배한 자들은 물론이요, 심지어 승리한 자들 중에서도 경기 후 홀연히 자취를 감춘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남은 건 그들의 비어버린 자리와,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질린 이들의 핏기 없는 얼굴뿐이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반대편에서 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적련(赤蓮). 핏빛 연꽃이라는 섬뜩한 이름의 사내. 흑마문의 숨겨진 계승자라고 했던가. 그의 뒤로는 칠흑 같은 어둠이 덩어리째 따라다니는 듯했다. 빛을 삼키는 듯한 기묘한 기운은 강휘의 오감을 마비시킬 지경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강휘.”
적련의 목소리는 빗소리조차 꿰뚫는 듯했다. 낮고 음산한 울림은 뼈 속까지 스며드는 한기를 동반했다. 그의 눈은 핏빛으로 번뜩였다. 그 안에는 인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잔혹한 희열과, 무언가 깊은 심연을 들여다본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텅 빈 광기가 공존했다.
강휘는 오른손을 천천히 검집으로 가져갔다. 묵직한 강철의 감촉이 손바닥에 닿자 비로소 정신이 또렷해지는 기분이었다. ‘심연의 그림자’. 사부님께서 그에게 내려주신 검의 이름이었다. 그림자를 가르고, 심연을 밝히는 검.
“천하의 운명을 건 대회라고 했지. 대체 무엇을 위한 운명이란 말인가, 적련.”
강휘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의 내면에서는 격렬한 파도가 일렁였다. 이 대회가 단순한 무술 대회가 아님은 진작에 짐작했다. 봉인각 아래 잠들어 있다는 ‘그것’. 천년 전, 구천마도(九天魔道)가 세상을 멸망시키려 할 때 겨우 봉인했다는 미지의 존재. 이 대회의 진정한 목적은 그 봉인을 강화하거나, 혹은… 풀어내는 것이리라.
“어리석은 질문이군. 운명은 승리자의 것이다. 패배한 자는 운명에 종속될 뿐.”
적련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빗물에 섞여 기분 나쁜 파문을 일으켰다. 그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가 순식간에 강휘를 향해 덮쳐들었다. 그림자는 단순한 그림자가 아니었다. 마치 살아있는 촉수처럼 시커먼 기운을 뿜어내며 뱀처럼 휘감겨 들어왔다.
쉬이이익!
강휘는 검집에서 검을 뽑아낼 겨를도 없이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림자 촉수는 그가 서 있던 자리를 깊게 할퀴었고, 돌바닥에는 섬뜩한 검은 자국이 남았다. 검은 기운은 마치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며 주변의 모든 활력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주변의 풀들은 순식간에 시들었고, 멀리서 울던 벌레 소리마저 멎었다.
“하찮은 잔재주로군.”
강휘는 중얼거렸지만, 그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적련의 무공은 단순한 술법이 아니었다. 그것은 이 봉인각의 심연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태고의 어둠 그 자체였다. 그의 검, 심연의 그림자가 과연 이 어둠을 베어낼 수 있을까?
적련은 팔을 벌렸다. 그의 몸 주변으로 검은 기운이 회오리치며 빠르게 응축되었다. 그 기운 속에서 수많은 원혼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난 대회에서 사라진 고수들의 영혼일까? 강휘의 심장이 격렬하게 뛰기 시작했다.
“강휘, 너는 아직 인간의 미련한 굴레에 갇혀 있군. 깨달아라. 이 천명대회는 단순한 무도(武道)의 장이 아니다. 이건… 제물 의식이다.”
적련의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 말과 함께, 봉인각의 지하에서부터 깊은 진동이 울려 퍼졌다. 쿵, 쿵, 쿵… 마치 거대한 심장이 뛰는 소리 같았다. 강휘의 시야가 흔들렸다.
그때였다. 적련이 지면에 손을 짚었다. 그의 손에서 검은 피가 흘러나와 돌바닥으로 스며들었다. 피가 닿는 곳마다 낡은 봉인진의 문양이 섬광처럼 번뜩였다가 이내 사그라들었다. 마치 봉인이 점차 약해지는 것을 알리는 신호 같았다.
“이 봉인이 풀리면, 세상은 새로운 질서 아래 놓일 것이다. 구천마도가 꿈꿨던 진정한 세상. 그리고 너의 영혼은 그 새로운 세상의 밑거름이 될 테지.”
적련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기운은 이제 하늘마저 집어삼킬 듯 맹렬하게 타올랐다. 거대한 그림자 촉수들이 봉인각의 천장을 뚫고 솟아오르는 듯했다. 빗물은 검은 액체로 변해 지면을 흥건히 적셨다.
강휘는 심연의 그림자를 뽑아 들었다. 차가운 강철이 빗물에 씻겨 어둠 속에서 푸른빛을 희미하게 반사했다.
“나는… 누구의 운명에도 종속되지 않는다. 그리고 세상의 질서를 바꾼다고? 그 허황된 망상, 내 검으로 끊어주마!”
강휘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 그의 몸에서 순수한 내공이 폭포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봉인각을 향해, 한 줄기 섬광처럼 강휘가 돌진했다. 그의 검이 핏빛 연꽃을 향해 맹렬하게 쇄도했다.
콰앙!
강철과 어둠이 부딪치는 굉음이 봉인각을 뒤흔들었다. 검은 파도가 강휘의 검 끝에서 갈라지며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이내 더욱 거대한 형태로 다시 합쳐졌다. 적련은 그 검은 폭풍의 중심에서 섬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네가 베는 것은 어둠이 아니다. 너의 심연, 바로 너 자신이다!”
적련이 외쳤다. 그의 손에서 뻗어나온 검은 기운이 강휘의 검을 휘감았다. 검은 기운은 강휘의 내공을 빨아들이는 듯했고, 그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눈앞에 환영이 스쳤다. 사부의 비명, 문파의 몰락, 그리고… 봉인각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거대한 그림자.
강휘는 이를 악물었다. 환영은 현실이 아니었다. 그의 심연은 어둠에 잠식되지 않았다. 그는 검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자신의 내공이 빨려 들어가는 고통 속에서도, 강휘는 한 점 빛을 놓지 않았다.
“심연은… 나를 삼킬 수 없다!”
그의 몸에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왔다. 검은 기운에 갇혀 있던 심연의 그림자가 번개처럼 번뜩이며 적련의 그림자 촉수를 베어냈다. 푸슉! 푸슉! 마치 살아있는 살점을 찢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적련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건방진!”
적련이 이를 갈았다. 그의 검은 기운이 더욱 맹렬하게 강휘를 향해 날아들었다. 이제는 단순한 공격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봉인각 아래의 심연 그 자체가 강휘를 집어삼키려는 듯한, 차마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감을 지닌 거대한 어둠의 파도였다.
강휘는 이를 피하지 않았다. 검을 쥔 손에 모든 내공을 쏟아부었다. 그의 몸이 빛을 내는 듯했다.
“일검… 천리빙혼(千里氷魂)!”
강휘의 검에서 푸른빛 섬광이 뿜어져 나왔다. 단순한 검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모든 투지와 의지, 그리고 봉인각의 어둠에 맞서 세상을 지키려는 굳은 신념이 응축된 빛이었다. 섬광은 어둠의 파도를 뚫고, 마치 푸른 용처럼 적련을 향해 쇄도했다.
순간, 봉인각 전체가 뒤흔들렸다. 지하에서 울리던 거대한 심장 소리가 더욱 격렬해졌다.
적련은 피하지 않았다. 그의 두 눈은 광기로 번뜩였다. “좋다! 네놈의 마지막 발악, 기꺼이 받아주마! 허나… 그 빛은 결국 어둠에 삼켜질 뿐!”
검은 파도와 푸른 섬광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쿠구궁!!!
귀청을 찢는 듯한 폭음과 함께, 봉인각의 천장에서 거대한 돌덩이들이 쏟아져 내렸다. 두 거대한 힘의 충돌은 공간 자체를 비틀어버리는 듯했다. 어둠과 빛이 뒤섞여 마치 거대한 태극 문양처럼 회전했다.
그 안에서, 강휘와 적련의 형체가 빛과 어둠에 가려졌다.
그리고…
모든 것이 잠시 멈춘 듯한 착각 속에서,
강휘는 무언가를 보았다. 어둠 속에서, 봉인각의 깊은 심연 아래에서, 거대한 눈동자가 번쩍 뜨이는 것을.
그것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태초의 공포,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심연 그 자체였다.
그 순간, 강휘의 검에서 뿜어져 나오던 푸른빛이 희미해졌다.
적련의 섬뜩한 웃음소리가 봉인각을 가득 채웠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강휘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어둠이, 모든 것을 삼켰다.
**다음 화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