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기담**
강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열두 평 남짓한 이 아파트는, 그에게 있어 세상의 전부이자 동시에 세상과 단절된 작은 섬이었다. 해가 지고 도시의 불빛이 하나둘 켜질 무렵, 그는 늘 그러했듯 허름한 소파에 몸을 묻고 눈을 감았다. 층간 소음, 옆집 아기의 울음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구급차 사이렌 소리까지, 이 모든 소음은 그에게 도시의 자장가와 같았다. 겉으로는 평범한 서른둘의 회사원. 속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
그때였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 한 줄기. 창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환절기에도 좀처럼 열지 않는 창문이었다. 강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착각이겠지. 피곤해서 헛것을 느꼈으리라.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곧이어 서재 방 쪽에서 ‘툭’ 하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서재? 평소 발길도 잘 닿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눈을 떴다. 고개를 갸웃하며 서재 방향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잊어버리자.
다음 날 아침. 커피를 내리기 위해 부엌으로 향한 강혁은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컵 받침이 삐딱하게 놓여 있었다. 어제 저녁 분명 제자리에 반듯하게 두었던 것이다. 그는 무심히 컵 받침을 바로잡았다. 점심시간, 그는 도시락을 먹다가 문득 허전함을 느꼈다. 며칠 전 새로 산 펜이 사라진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강혁은 씁쓸하게 웃었다. “건망증이 심해졌나.”
이후 며칠간은 더욱 기묘한 일들이 이어졌다. 밤마다 식탁 의자가 미세하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고, 냉장고 문이 살짝 열려 있는 채 발견되기도 했다. 급기야는 샤워 중, 분명 잠가두었던 욕실 문이 ‘덜컥’ 하고 열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는 점점 잠을 설치기 시작했다. 피로가 쌓였다. 그리고 단순한 ‘사고’로 치부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차갑고, 습했으며, 때로는 날카롭게 그의 정신을 스쳤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주위를 맴도는 듯한.
어린 시절, 남들보다 유독 감각이 예민하다는 말을 들었던 강혁이었다. 숲 속에서 길을 잃어도 본능적으로 방향을 찾아냈고, 사람들의 미묘한 감정을 읽어내는 데 탁월했다. 하지만 그 재능은 이 도시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해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무디게 만들었다. 감각의 날을 갈고 닦기보다, 뭉툭하게 무뎌지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런데 지금, 그 무뎌졌던 감각들이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다시금 깨어나고 있었다.
어느 밤이었다. 자정 무렵, 강혁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거실에서부터 ‘드르륵’, ‘쾅!’ 하는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다. 그는 벌떡 일어났다. 단순한 착각이나 피로가 아니었다. 명확한 소리였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었다. 복도는 어둠에 잠겨 있었다. 손을 더듬어 스위치를 켰다. 복도와 거실에 형광등 불빛이 번쩍이며 들어왔다.
그리고 그는 얼어붙었다. 거실 한복판에 놓여 있던 작은 화분이 공중으로 두어 뼘가량 떠올라 있었다. 흙이 조금씩 바닥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시야가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이… 이게 뭐야.” 그의 입에서 간신히 신음이 흘러나왔다. 화분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붙들린 것처럼, 허공에서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그의 눈앞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에 부딪힐 듯 아슬아슬하게 움직이다가, 거실 탁자 위를 한 바퀴 선회했다.
강혁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단순히 물리적인 현상만은 아니었다. 화분을 움직이는 그 무언가로부터, 마치 얼어붙은 칼날처럼 차갑고 끈적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피부를 긁고, 폐부를 파고드는 듯했다. 어딘가 익숙한, 하지만 동시에 끔찍하게 낯선 기운이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이 공간을, 그의 아파트를 침범하고 있었다.
화분이 그의 눈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는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산산조각 났다. 흙과 깨진 도자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혁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뒤로 나자빠졌다. 파편 하나가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따끔한 통증과 함께 피가 흘러내렸다. 그는 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웅크렸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이곳은 그의 집이었다. 세상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믿었던 그의 은신처. 그런데 지금, 보이지 않는 존재가 그 모든 것을 부수고 있었다.
“젠장…!”
그는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 안에는 공포뿐만 아니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떤 맹렬한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그는 침묵의 전쟁을 예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