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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망각된 서재의 심연

김지훈은 낡은 연구소의 철제 대문을 밀었다. 삐걱이는 쇠붙이 소리가 마치 고통받는 망령의 신음처럼 낮게 울려 퍼졌다. 서재골 연구소. 한때 기괴한 학자들이 모여들었다는, 그리고 어느 날 밤 홀연히 사라져버렸다는 기이한 소문이 따라붙는 폐허. 지훈은 그곳에 있었다. 스무 해 가까이 자신을 갉아먹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사라진 학자들, 그들이 마지막으로 붙들었던 ‘금지된 연구’의 실체.

오래도록 방치된 탓에 풀과 담쟁이덩굴이 건물 외벽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유리창은 대부분 깨져 있었고, 썩은 나무 냄새와 먼지, 그리고 정체 모를 곰팡이 냄새가 퀴퀴하게 뒤섞여 코를 찔렀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낡은 마루가 삐걱였다. 그의 숨소리만이 이 거대한 침묵을 위협하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여기에 정말 뭔가 있었단 말이지.”

낮게 중얼거렸다. 폐쇄된 지 수십 년이 지난 이곳에서 쓸 만한 것을 찾으리라는 기대는 애초에 접었다. 그는 그저 흔적을, 사라진 자들의 발자취를 좇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이 무엇을 보았고, 무엇에 매료되었으며, 대체 왜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지.

지훈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연구소의 가장 안쪽, 원장실로 쓰였을 법한 넓은 공간. 다른 방들과 달리 이곳은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묵직한 오크나무 책장들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텅 비어 있었고, 찢어진 소파와 부서진 테이블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는 방 한가운데 서서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구석에서 먼지 쌓인 큼직한 나무 상자를 발견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자 앞으로 다가갔다. 표면은 거무튀튀한 먼지로 뒤덮여 있었고, 삐뚤어진 못들이 듬성듬성 박혀 있었다. 단순한 보관함인가 싶었지만, 이상하게도 상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한 묘한 위압감이 지훈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상자를 더듬었다. 뻑뻑하게 잠긴 쇠 걸쇠를 힘겹게 들어 올리자, 낡은 경첩이 비명을 지르며 상자 뚜껑이 열렸다.

내부는 뜻밖에도 텅 비어 있었다. 실망감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여기까지 와서 겨우 발견한 것이 빈 상자라니. 허탈한 한숨을 내쉬려는 찰나, 그의 손가락이 상자 바닥의 묘한 질감을 스쳤다. 매끈한 나무 바닥이어야 할 곳에서 뭔가 울퉁불퉁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설마…….”

지훈은 손전등을 켜 상자 안을 비췄다. 빛이 닿자 희미한 선들이 드러났다. 바닥이 아니었다. 정교하게 숨겨진 이중 바닥이었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직감했다. 바로 이것이다. 그가 찾던 것이.

떨리는 손으로 이중 바닥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썩은 나무 냄새와 함께 비릿하고 시큼한, 알 수 없는 냄새가 훅 끼쳐왔다. 그리고 그 안에는, 검은 벨벳 천에 싸인 무언가가 놓여 있었다.

벨벳 천을 걷어내자, 어둠마저 집어삼킬 듯한 색깔의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불규칙한 다면체. 마치 잘게 쪼개진 암석 같기도 했고, 밤하늘의 별을 응축시켜 놓은 듯도 했다. 햇빛 한 조각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물체는 주변의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표면은 흠집 하나 없이 지독할 정도로 매끄러웠고, 만져보니 한여름에도 얼음처럼 차가웠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그 위에 새겨진 문양이었다. 인간의 언어라고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너무나도 섬세하고 복잡한 선들이 다면체의 모든 면을 뒤덮고 있었다. 기하학적이면서도 생명체 같은, 어딘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문양들은 시선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문양들이 아주 미세하게, 보는 각도에 따라 형태를 바꾸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이게…… 대체 뭐야?”

본능적으로 불안감이 엄습했지만, 지훈은 손을 뻗어 그 다면체를 움켜쥐었다. 차가움과 함께 미끄러운 감촉이 손가락을 감쌌다. 그는 조심스럽게 엄지손가락을 들어 가장 큰 면에 새겨진 문양 중 하나를 따라 그렸다.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수십 년 전, 이 물체를 붙들고 사라진 학자들의 지독한 열정의 잔해를 그저 탐색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손가락 끝이 문양의 마지막 선에 닿는 순간, 다면체가 심장처럼 미세하게 박동했다.

‘쿵!’

소리 없는 충격파가 지훈의 뇌리를 강타했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뒤틀리는 듯한 고통과 함께 눈앞의 풍경이 일그러졌다. 방의 모든 빛이 갑자기 사라졌다. 절대적인 어둠. 그러나 그 어둠 속에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법한 색깔의 빛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피처럼 붉고, 썩은 살점처럼 푸르며, 형용할 수 없는 보랏빛과 검푸른 광채가 서로 뒤엉켜 혼돈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귀에서는 비명과도 같고, 거대한 기계의 굉음과도 같은 알 수 없는 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존재하지 않는 음파가 고막을 찢고 뇌수를 흔들었다. 균형 감각이 사라졌다. 몸이 공중에 떠오르는 듯했다. 아니, 몸이 아니라 영혼이, 의식이 무한한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점점 더 깊은 심연으로.

그곳에는 형체 없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우주를 뒤덮고도 남을 크기의 그것은, 별들도 먼지에 불과할 정도로 거대하고, 시간마저도 의미 없는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림자의 중심에서, 수천 개의 눈이 번뜩이는 환영이 스쳐 지나갔다. 그것들은 아무런 감정 없이, 인간의 모든 존재를 가볍게 무시하는 듯한 냉담한 시선으로 지훈을 꿰뚫어 보았다. 그 시선에 닿는 순간, 지훈은 자신의 존재가 한 톨의 먼지보다도 하찮고, 의미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우주의 광대함 속에서 그는 이름 없는 벌레 한 마리에 불과했다.

‘아니야! 이건… 이건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야!’

의식의 끝자락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이 끔찍한 환영은 현실이 될 수 없었다. 그의 이성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비명은 소용없었다. 압도적인 공포가 지훈의 정신을 짓눌렀다. 영원히 이 심연에 갇혀버릴 것만 같았다. 이 불가능한 광경 속에서, 그는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었다. 그 꿈의 끝에는 형언할 수 없는 존재가 기다리고 있었다. 거대한 촉수, 비늘로 뒤덮인 몸, 그리고 인류의 모든 지식을 비웃는 고대의 미소.

그 순간, 지훈의 손에 들려 있던 다면체에서 차가운 진동이 다시 한번 울렸다.

‘쿵!’

마치 수면 위로 튀어 오르듯, 그의 의식이 갑자기 현실로 복귀했다.

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엎어졌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고,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었다. 머릿속에는 끔찍한 잔상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었다. 방은 여전히 어두웠고, 낡은 마루는 여전히 삐걱였다. 모든 것이 이전과 같았다.

아니, 같지 않았다.

손에 쥐여 있던 다면체는 여전히 차갑고 매끄러웠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희미하게 맥박이 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주변의 공기가 달라져 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고, 벽과 천장에 스며든 어둠이 단순히 빛의 부재가 아닌, 어떤 존재의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그의 시각이었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미세한 균열들이 벽에, 바닥에, 심지어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 알갱이들 사이에도 보였다. 마치 세상의 모든 틈새가 갑자기 열려버린 듯한 착각. 그리고 멀리서, 아주 희미하게, 바람 소리 같기도 하고, 먼 바다의 파도 소리 같기도 한, 웅얼거리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환청인가?’

아니. 그 소리는 분명히 존재했다. 그가 들고 있는 다면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듯했다. 속삭임. 오래된 존재들의 속삭임.

지훈은 온몸을 떨었다. 이건 단순한 유물이 아니었다. 고대 존재들의 마법, 아니, 그들의 지식과 힘이 담긴 일종의 ‘통로’였다. 그리고 그는, 방금 그 통로를 열어버렸다. 우연히, 그리고 무모하게.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깨진 창문 밖으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붉고 검은 하늘은 방금 그가 보았던 혼돈의 빛깔과 섬뜩하게 닮아 있었다.

“내가… 뭘 한 거지?”

두려움과 함께 알 수 없는 매혹이 그의 심장을 조여왔다. 그는 방금 인류가 알지 못했던 경계를 넘어섰다. 그리고 그 경계 너머에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힘과, 그에 비례하는 광기가 도사리고 있을 터였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그 다면체는 이제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손에 들린, 어둠으로 이끄는 이정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