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이 지배하는 시간, 썩은 나무와 흙먼지 냄새가 뒤섞인 폐허 속에서 지혁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촛불은 흔들림 없이 타올랐지만, 그 빛조차 심연을 밝히지는 못했다. 고작 열두 개. 낡은 상자에서 꺼낸 촛불들이 흙바닥에 대충 그려진 뒤틀린 문양의 끝자락마다 서 있었다. 피와 말린 약초로 그려진 문양은 기괴하고 섬뜩한 기운을 내뿜었다.
지혁의 손에는 닳고 닳은 뼈 조각이 쥐여 있었다. 한때는 온전한 동물의 척추였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은 부스러기에 지나지 않았다. 차가운 뼈의 감촉이 그의 떨리는 손가락을 파고들었다.
“서진….”
지혁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이름은 메마른 나뭇가지처럼 부서졌다. 그 이름은 한때 그의 세상 전부였고, 이제는 그의 삶을 갉아먹는 독이었다. 지혁은 숨을 쉬는 모든 순간마다, 꿈을 꾸는 모든 밤마다 서진의 배신을 되새겼다. 눈앞에서 벌거벗겨진 채 나락으로 떨어지던 그 순간의 악몽이, 생생한 비명과 함께 그의 귓가를 맴돌았다. 모든 것을 잃었다. 가족도, 명예도, 미래도. 오직 증오만이 그를 지탱하는 유일한 감정이었다.
그는 천천히 뼈 조각을 제 이마에 가져다 댔다. 차가운 기운이 피부를 통해 뇌수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눈을 감자, 기억 속의 서진이 나타났다. 해맑게 웃던 얼굴, 든든했던 어깨,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를 노려보던 섬뜩한 비웃음.
“네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갔으니… 나 또한 네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이다.”
지혁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뼈 조각이 이마에 닿자, 문양의 가장자리에서 피어오르던 희미한 연기가 더욱 짙어졌다. 주변의 공기가 무거워지며 끈적한 기운이 피부에 달라붙는 느낌이었다. 그는 알 수 없는 언어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고대의 주문, 망자들이 속삭이는 언어와도 같은 소리가 폐허의 정적을 갈랐다.
문양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붉은 빛이 희미하게 깜빡이다가, 이내 강력한 맥동을 시작했다. 지혁은 눈을 떴다. 피로 그려진 선들이 꿈틀거리는 듯했다.
갑자기, 지혁의 손에 쥐여 있던 뼈 조각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뼈가 그의 손바닥을 파고드는 듯했다. 뜨거운 피가 손을 타고 흘러내려 흙바닥의 문양 속으로 스며들었다. 피가 닿는 곳마다 문양의 색은 더욱 선명해지고, 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그때였다. 촛불의 불꽃이 미친 듯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흔들림 없던 불빛은 이제 사방으로 흩날리며 그림자를 기괴하게 늘어뜨렸다. 폐허의 천장에서 알 수 없는 검은 액체가 뚝, 뚝 떨어졌다. 액체는 흙바닥에 닿자마자 사라져 버렸다.
지혁의 등골을 타고 오싹한 한기가 흘렀다.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히 느껴졌다. 차갑고, 날카롭고, 지독하게 배고픈 존재가.
“거래를… 원하는가?”
낮고 굵은 목소리가 지혁의 귓가에 속삭였다. 공기가 떨리고, 폐허의 벽들이 삐걱거리는 듯했다.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려오는 것 같지 않았고, 동시에 모든 곳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심연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메아리 같았다.
지혁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원한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대가로 치르겠다. 서진에게… 복수할 힘을 다오.”
목소리가 키득거렸다. 웃음소리는 뼈가 부딪히는 소리처럼 건조하고 섬뜩했다.
“네 모든 것을? 네 목숨, 네 영혼, 네 미래… 네가 가진 모든 것을? 과연 그럴 가치가 있겠는가? 복수는 꿀처럼 달콤하지만, 그 뒷맛은 지독한 독이 될 것이다.”
“내게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어.” 지혁은 이를 악물었다. “남은 건 오직 복수뿐이다. 그를 처참하게 짓밟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라도 영혼을 팔겠다.”
목소리는 잠시 침묵했다. 그 짧은 순간이 지혁에게는 영원처럼 느껴졌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서 다음 말을 기다렸다.
“좋다… 어리석은 인간이여. 네 욕망은 심연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문양의 붉은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지혁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 고통이 전신을 찢어발기는 듯했다.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동시에 그의 피부를 꿰뚫는 것 같았고, 동시에 그의 피가 끓어오르는 것처럼 뜨거웠다. 그의 시야는 붉은색으로 물들었고, 귓가에는 알 수 없는 환청들이 비명처럼 울렸다.
“받아들여라… 어둠의 축복을. 복수의 칼날이 되어라. 그의 심장을 꿰뚫어라.”
목소리는 점차 멀어졌다. 고통이 절정에 달했을 때,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폐허는 다시 정적으로 돌아왔고, 촛불은 이전처럼 흔들림 없이 타올랐다. 단지 문양의 피와 약초가 완전히 말라붙어 검은 재로 변해 있을 뿐이었다.
지혁은 숨을 헐떡이며 몸을 가누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뼈 조각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그의 손바닥에는 검고 기이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피와 어둠이 뒤섞인 듯한, 꿈틀거리는 문양이었다.
그는 천천히 일어섰다. 몸 안에서 전과는 다른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피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강력하게 박동했다. 시야가 확장되고, 어둠 속에서도 사물의 윤곽이 선명하게 보였다. 감각이 예리해졌다. 벽을 타고 기어가는 벌레의 소리,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의 속삭임까지도 생생하게 들렸다.
이것이 힘인가? 지혁은 주먹을 쥐었다. 그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이 느껴졌다. 섬뜩하면서도, 동시에 황홀했다. 이 힘으로 서진을 무너뜨릴 수 있을 터였다. 그의 비웃음을 영원히 지워버릴 수 있을 터였다.
지혁은 폐허의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문을 나서는 그의 얼굴에는 핏기 하나 없었지만, 그 눈빛은 활활 타오르는 숯불처럼 이글거렸다. 세상은 전과 다름없이 고요했다. 하지만 지혁의 내면은 이제 복수의 불꽃으로 가득 찬 지옥이었다.
서진.
너는 이제 끝이다. 내가 널 찾아갈 것이다. 그리고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단 하나도 남김없이, 처절하게 짓밟아 줄 것이다.
어둠 속에서, 지혁의 입술이 차갑게 말려 올라갔다. 피비린내 나는 복수의 서막이,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