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빛 하늘이 잿더미가 된 도심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눅진한 공기 속에서는 항상 썩은 내와 비릿한 피 냄새가 뒤섞여 희미하게 감돌았다. 지훈은 익숙하게 마른침을 삼키며 무너진 건물 잔해들 사이를 조심스럽게 헤쳐 나갔다. 낡은 배낭 속에는 며칠 전에 겨우 구한 통조림 두 개와 삐걱거리는 손전등, 그리고 녹슨 맥가이버 칼이 전부였다. 보급은 언제나 바닥이었고, 희망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진짜 아무것도 없네.”
혼잣말이 텅 빈 거리에 메아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며칠째 물 한 모금 제대로 마시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한때 활기 넘치던 쇼핑몰은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유령 도시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유리창은 모두 깨져나가고, 내부의 상품들은 약탈당하거나 부패하여 악취를 풍겼다.
그의 눈은 본능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붕괴된 외벽 틈새, 어둠이 깔린 상점 입구, 심지어는 바닥에 뒹구는 부서진 입간판 뒤까지.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그것들을 경계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그것들’이라는 단어는 어느새 그들의 공식 명칭이 되어 있었다. 좀비, 워커, 감염자… 이름은 많았지만, 결국 그들은 움직이는 시체에 불과했다. 이성도, 감정도 없이 오직 살과 피만을 갈구하는 끔찍한 존재들.
삐그덕.
낡은 철제 문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였다. 지훈은 순간 얼어붙었다. 심장이 쿵, 하고 발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는 조심스럽게 몸을 낮춰 무너진 승용차 뒤로 숨었다. 숨소리마저 죽이며 소리의 근원지를 응시했다. 다행히 바람 때문이었다. 허탈감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이러다 미쳐버리겠군.”
자조 섞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차피 미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는 세상이기도 했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지도를 펼쳤지만, 종이는 이미 너덜너덜해져 거의 해독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과거에는 번화가였던 이 일대에서 그는 고층 아파트 단지를 찾고 있었다. 혹시라도 남아있을 식료품이나 물, 그리고 운이 좋다면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때문이었다. 물론, 사람을 찾는 것이 가장 위험한 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둠이 지평선 너머로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해가 저물면 시야는 극도로 제한되고, 그것들은 더욱 활발해졌다. 더 늦기 전에 은신처를 찾아야 했다.
그때였다. 찌익- 찌이익-
귀를 찢을 듯한 소음이 바로 옆 건물에서 터져 나왔다. 지훈의 몸이 경직되었다. 오래된 라디오가 켜진 듯한, 혹은 찢어지는 비명 같은 그 소리는 감염자들이 내는 특유의 소음이었다.
“젠장, 벌써 눈치챘나!”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폐허가 된 도시를 가로지르며, 무너진 담벼락과 부서진 상점들을 지나쳤다. 발밑의 파편들이 부서지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리는 짐승 같은 울음소리에 묻혔다. 하나가 아니다. 여럿이다. 지독한 악취가 바람을 타고 코끝을 스쳤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폐가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끝이었다. 그의 눈에 저 멀리,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낡은 건물이 들어왔다. 일반적인 건물과는 다른 형태였다. 기와지붕이 보였고, 주변은 숲처럼 우거져 있었다. 지진으로 인해 도로가 끊기면서 인적이 완전히 끊긴 곳에 홀로 남겨진 듯한 모습이었다.
“저기라면…!”
지훈은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그곳으로 향했다. 울타리처럼 쌓인 돌담은 무너져 있었고, 그 틈으로 들어서자마자 빽빽하게 자란 나무들이 시야를 가렸다. 마치 도시와는 완전히 단절된 다른 세상 같았다. 썩어가는 도시의 공포가 잠시나마 멀어진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착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뒤따라온 감염자들의 울음소리가 숲의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 낡은 건물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내부의 어둠이 그를 삼켰다.
내부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넓고 고즈넉했다. 오래된 목조 건물 특유의 퀴퀴한 나무 냄새가 났고, 먼지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이곳은 분명 누군가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었다. 벽에는 빛바랜 그림들이 희미하게 보였고, 한쪽 구석에는 석탑 조각 같은 것들이 뒹굴고 있었다.
감염자들이 문을 부수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없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바닥에 무너진 서까래 더미를 발견했다. 서까래 아래는 벽돌로 막혀 있었는데, 벽돌 틈새로 미세한 바람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지진으로 인해 벽이 무너져 내리면서 숨겨진 공간이 드러난 것이 분명했다.
“여기다!”
지훈은 온몸의 힘을 다해 서까래를 옆으로 밀어냈다. 낑낑거리는 소리와 함께 서까래가 겨우 움직였고, 드러난 틈새로 몸을 구겨 넣었다. 몸이 다 들어가자마자 그는 다시 서까래를 끌어당겨 입구를 막았다. 바깥에서 들리던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둔탁한 벽에 막혀 희미해졌다.
완전히 암흑이었다. 그는 허리춤에서 삐걱거리는 손전등을 꺼내 불을 밝혔다. 좁은 통로가 이어졌다. 길지 않은 통로의 끝에는 작은 방이 있었다. 방은 흙먼지로 뒤덮여 있었지만, 중앙에는 낡은 돌 탁자와 그 위에 놓인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지훈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돌 탁자 위에는 오래된 양피지 두루마리가 펼쳐져 있었다. 두루마리에는 고대의 것으로 보이는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새겨져 있었고, 그 옆에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검은 돌이 놓여 있었다. 돌은 아무런 장식도 없이 매끄러웠지만, 미묘하게 빛을 흡수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는 두루마리에 새겨진 글자들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알 수 없는 문자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글자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그의 눈을 잡아끌었다. 그는 홀린 듯 손을 뻗어 두루마리의 한 글자를 가볍게 쓸어봤다.
그 순간, 섬광이 터졌다.
지훈의 온몸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눈앞이 하얗게 번뜩이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귀에서는 윙- 하는 이명이 울렸다. 너무나 강렬하고 갑작스러운 감각에 그는 휘청이며 무릎을 꿇었다. 마치 뇌 전체에 전류가 흐르는 듯한 감각이었다.
눈앞의 양피지 두루마리에서 옅은 푸른빛이 새어 나왔다. 빛은 검은 돌을 감싸더니, 이내 돌 전체를 푸른색으로 물들였다. 검은 돌은 마치 살아있는 심장처럼 천천히 맥동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맥동은 지훈의 심장과 공명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머릿속으로 알 수 없는 영상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고대의 숲, 거대한 돌기둥, 하늘을 가르는 섬광, 그리고 알 수 없는 힘을 다루는 사람들의 모습…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너무나 선명해서 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게… 뭐야…?”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더 이상 알아볼 수 없었던 양피지 문자들이 아니었다. 이제 글자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이해 가능한 언어로 번역되어 박히고 있었다.
*고대의 힘, 만물을 잇는 생명의 숨결이여, 잠에서 깨어나라.*
지훈은 소름이 돋았다. 그의 몸 안에서 알 수 없는 힘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차가운 공포와 함께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상한 충만감이 밀려왔다. 바깥에서는 여전히 감염자들이 그의 은신처를 찾아 헤매는 짐승 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그 소리는 이제 멀게 느껴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빛나는 검은 돌을 움켜쥐었다. 돌의 차가운 표면에서 마치 온기 같은 것이 전해졌다. 동시에 그의 시야가 확장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흐릿했던 바깥의 소리들이 갑자기 또렷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벽 너머의 감염자들의 위치는 물론, 그들이 내쉬는 쉰 숨소리, 심지어는 저 멀리 지나가는 바람 소리까지.
이건… 마법인가?
지훈은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 돌을 바라봤다. 평범한 돌멩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비한 빛, 그리고 몸 안을 가득 채운 알 수 없는 힘. 이 끔찍한 세상 속에서, 그는 우연히 거대한 비밀의 문을 열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 힘이 자신을 구원할 것인지, 아니면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릴지는 알 수 없었다. 단지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의 세상이 완전히 뒤바뀌었다는 것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