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지우는 피곤에 절어 열쇠를 돌렸다. 낡은 금속 소리가 긁히듯 울리고, 익숙한 원룸의 공기가 그를 맞았다. 켜놓고 나간 보일러 덕분에 방 안은 훈훈했지만, 어쩐지 습기 섞인 서늘함이 등골을 스치는 기분이었다. 그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거실 불을 켰다. 형광등이 미미하게 깜빡이다 제 빛을 찾았다.
“젠장, 이것도 슬슬 갈 때 됐네.”
지우는 작게 중얼거리며 넥타이를 소파에 던졌다. 아무리 월세라지만, 이 집으로 이사 온 지 벌써 반년. 조금씩 낡은 흔적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주방으로 향하는 짧은 복도에서 문득 시선이 멈췄다. 거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열쇠 꾸러미가, 미묘하게 위치를 바꾼 듯했다. 분명 그는 문고리에 걸어둔 뒤 테이블에 내려놓았는데, 지금은 마치 누군가 건드린 것처럼 가장자리로 밀려나 있었다.
“내가 피곤해서 헛것이 보이나.”
고개를 젓고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냈다. 시원한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가자 답답했던 속이 좀 풀리는 듯했다. 다시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TV를 켜고 아무 채널이나 돌렸다. 뉴스 앵커의 차분한 목소리가 공간을 채우는 사이, 시야 한구석에서 또다시 불빛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주방 등이었다. 깜빡, 깜빡. 마치 고장 난 가로등처럼 불규칙하게 진동했다.
“진짜인가? 전선 문제인가.”
지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따 관리실에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리모컨을 들어 채널을 돌렸다. 그때였다. 등 뒤, 그의 침실 문이 삐걱이며 살짝 열렸다. 닫혀 있었는데?
쿵, 하고 심장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우는 얼어붙은 채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침실 문은 아까 분명히 닫아놓았던 기억이 선명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TV에서 나오는 소리만이 유일한 움직임을 대변했다. 그 순간, 지우의 등 뒤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쨍그랑!’
그제야 지우는 화들짝 놀라 몸을 돌렸다. 소파 옆 바닥에 그가 벗어두었던 넥타이핀이 떨어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넥타이핀이 있던 소파 위를 향했다. 분명 테이블에 던져두었던 넥타이 위에 얌전히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건드린 것처럼.
“뭐야…”
숨을 들이켰다. 오싹한 한기가 온몸을 휘감았다. 방 안에 혼자 있는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그는 애써 침착하려 노력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바람 한 점 없는 실내였다. 창문도 꼭 닫혀 있었다.
‘잘못 봤을 거야. 내가 넥타이 던지면서 같이 떨어진 건데, 뒤늦게 소리가 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려 애썼지만, 이미 심장은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그때, 주방 등 불빛이 아까보다 더 격렬하게 깜빡이기 시작했다. 다급한 박동처럼, 혹은 경련처럼. 그리고 침실 문이 ‘스르륵’ 다시 열리더니, 이번에는 꽤 큰 소리를 내며 벽에 ‘쿵’ 부딪혔다.
지우는 저도 모르게 비명을 삼켰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 쳤다. 벽에 등을 기댄 채 숨을 헐떡였다.
“누구… 누구세요?”
목소리가 바들바들 떨렸다. 대답은 없었다. 대신, 침실 안에서 뭔가 움직이는 듯한 희미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무언가가 바닥을 질질 끄는 듯한 소리.
점점 더 공포가 턱 밑까지 차올랐다. 지우는 휴대폰을 찾아 손에 쥐었다. 손가락이 굳어 번호조차 제대로 누를 수 없었다. 그때, 거실의 TV 화면이 갑자기 지직거리는 소리를 내며 검은색으로 변했다. 그리고 잠시 후, 화면 가득 정지된 옛날 드라마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빛바랜 색감, 촌스러운 옷차림. 지우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의 드라마였다.
“이게… 뭐야…”
그는 눈을 비볐다. 분명히 최신 드라마를 보고 있었는데. 다시 리모컨을 눌렀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화면은 여전히 옛날 드라마의 한 장면을 띄운 채 멈춰 있었다. 흑백도 아닌, 묘하게 색이 바랜 갈색 톤의 화면이었다.
그때, 거실 불이 ‘팟!’ 하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꺼졌다. 온 집안이 암흑에 잠겼다. TV 화면에서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빛이 유일했다. 그리고 침실 쪽에서 다시 들려오는 소리. 이번에는 분명한 발소리였다. 성인 남자의 발소리처럼 묵직하게, 하지만 어딘가 불안하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어.’
지우는 식은땀을 흘렸다. 그의 눈은 어둠에 익숙해지기 위해 애썼다. 발소리는 거실 쪽으로 향하는 듯했다. 마치 침실 문을 통해 누군가 그의 공간으로 걸어 나오는 것처럼.
쿵, 쿵, 쿵.
발소리가 점점 선명해지고, 그와 동시에 기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퀴퀴한 곰팡이 냄새 같기도 하고, 어딘가 오래된 나무에서 나는 것 같기도 한 냄새였다. 현대 아파트에서는 절대 맡을 수 없는, 낯선 냄새.
발소리가 멈췄다. 지우의 바로 코앞에서.
지우는 숨도 쉴 수 없었다. 눈앞이 깜깜한 어둠 속, 그의 시선은 TV 화면에 고정되었다. 멈춰 있던 화면 속, 빛바랜 거실 한편에, 어두운 그림자가 스르륵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마치 TV 속 화면에, 그의 눈앞에 있는 무언가가 투영되는 것처럼.
그때였다. 귓가에 섬뜩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돌아… 가…”
아주 낮은, 하지만 분명한 남자의 목소리였다. 지우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이 ‘탁’ 하고 떨어지는 소리가 어둠 속에서 유난히 크게 울렸다.
그리고 그의 눈앞, 벽지가 갑자기 일렁였다. 현대적인 무늬의 벽지가 한순간 사라지고, 그 아래 숨겨져 있던 오래된 꽃무늬 벽지가 드러났다. 갈라지고 바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벽지였다. 방 전체의 가구도, 그의 시야가 깜빡이는 찰나, 묵직하고 고풍스러운 옛 가구들로 바뀌는 듯했다. 어둡고 칙칙한 색감. 순간,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의 원룸이 아닌, 오래된 옛날 집의 거실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 한가운데,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서 있었다. 등골이 오싹했다.
지우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는 헛숨을 들이켰다. 온몸의 세포가 비명을 질렀다. 꿈인가? 환각인가? 아니, 이건 너무나도 선명했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것은 명백히 그가 알던 집이 아니었다. 낡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바깥 풍경마저, 고층 빌딩이 아닌 낮은 지붕의 집들이 빼곡한 옛 도시의 모습이었다.
“거… 거기 누구세요?”
이번엔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겨우 입만 뻐끔거렸다. 그때, 그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낡은 양복을 입은, 수염이 덥수룩한 중년 남자의 얼굴. 그의 눈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텅 비어 있었다. 남자의 입꼬리가 천천히 올라갔다.
섬뜩한 미소. 그리고 그 미소와 함께 남자의 몸이 희미해지더니, 순식간에 그의 집 벽지로 흡수되듯 사라졌다.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꽃무늬 벽지는 사라지고 현대적인 벽지가 다시 나타났다. 고풍스러운 가구 대신 그의 익숙한 소파와 테이블이 다시 제자리에 있었다. TV는 여전히 검은 화면에 정지된 옛날 드라마를 띄우고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 달라진 것이 있었다.
TV 화면 속 옛날 드라마 장면. 그 화면 한구석에, 낡은 양복을 입은 남자의 희미한 옆모습이 보였다. 마치 오래된 사진처럼 흐릿했지만, 분명 방금 전 지우가 봤던 그 남자였다.
그리고 다시 귓가에 속삭임이 울렸다. 이번에는 좀 더 분명하게.
“네 자리가… 아니야…”
지우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이건 분명 현실이 아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생생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 속에서, 그저 떨리는 몸으로 웅크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 집은, 더 이상 안전한 그의 공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 다른 시간의 문이 열린 듯한, 기묘한 공간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리고 방금 전 스쳐 지나간 그 낯선 과거의 풍경이, 그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마치, 그가 곧 그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