챕터 1. 고요한 서원, 깨어난 기원
회색빛 도시의 잔해가 끝없이 이어졌다. 한때 번화했던 서울의 거리는 이제 녹슨 철골과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들, 그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로 뒤덮인 거대한 무덤이나 다름없었다. 이지혁은 낡은 등산화 밑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걷고 또 걸었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은 이미 오래전에 말라붙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식량과 물 때문에 목구멍은 사막처럼 메말라 있었다.
‘젠장, 아무것도 없어.’
며칠째 헤매고 있지만, 쓸 만한 것이라고는 먼지 쌓인 통조림 깡통 몇 개가 전부였다. 그마저도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것들이라 뚜껑을 딸 때마다 혹시 모를 위험에 가슴을 졸여야 했다. 지혁은 낡은 백팩을 고쳐 메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저 멀리서 들려오는 좀비들의 으르렁거림은 이제 배경 음악처럼 익숙해져 버렸지만, 그 익숙함은 결코 공포를 덜어주지 못했다. 오히려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불안감만 키울 뿐이었다.
폐허가 된 상가 건물을 지나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유난히 무성하게 자란 담쟁이덩굴과 무너져 내린 벽돌더미 사이에서, 왠지 모르게 주변과 동떨어져 보이는 건물이 지혁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다른 건물들처럼 완전히 파괴되지는 않았지만, 오랜 세월 방치된 듯 낡고 초라했다. 얼핏 보면 평범한 낡은 주택 같았지만, 어딘가 모르게 풍겨오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그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뭐지? 여긴 지도에도 없던 곳인데.”
그가 가진 낡은 종이지도는 이미 무용지물이 된 지 오래였지만, 이런 식의 ‘예상 밖’ 장소는 항상 위험과 기회를 동시에 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다가가자, 담쟁이덩굴 틈새로 낡은 목판 현판이 드러났다. ‘화원서원(花源書院)’. 알아보기 힘든 한자였지만, 지혁은 이곳이 적어도 수백 년은 된 고색창연한 서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좀비 사태 이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아 자연에 잠식된 채 잊힌 곳인 모양이었다.
삐걱거리는 나무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자, 외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정갈하게 가꿔졌을 터인 마당은 잡초가 무릎까지 자라 있었지만, 본채와 부속 건물들은 놀랍도록 온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기이한 것은, 이곳이 외부의 소음과 단절된 듯한 고요함이었다. 멀리서 들리던 좀비들의 으르렁거림조차 이곳에서는 희미한 메아리처럼 느껴졌다.
“아무도 없나?”
지혁은 권총을 꽉 쥐고 경계하며 서원 안으로 들어섰다. 흙먼지로 뒤덮인 마루를 지나, 여기저기 찢겨나간 고서들이 쌓인 방을 발견했다. 아마도 서재였던 모양이다. 희미한 햇빛이 창틈으로 쏟아져 들어와 먼지 알갱이들이 춤추는 것을 비췄다. 그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책들을 뒤적거렸지만, 모두 좀벌레 먹은 종이 뭉치일 뿐, 쓸 만한 정보나 물건은 없었다.
그때였다. 낡은 책장 뒤편에서 미묘한 틈새가 지혁의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나무의 결을 자세히 살피자, 손잡이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조심스럽게 그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끼이이익—’ 끔찍한 마찰음을 내며 책장이 옆으로 밀리자, 어둠 속에 감춰져 있던 좁은 통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지하로 이어지는 듯한 어둡고 습한 통로였다.
숨을 들이쉬며 조심스럽게 통로를 따라 내려갔다. 공기 중에 흙냄새와 함께 알 수 없는 향내가 희미하게 맴돌았다. 통로 끝에는 자그마한 석실이 나타났다. 바닥에는 이끼가 가득했고, 중앙에는 낡은 나무 탁자가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먼지 한 겹 없이 깨끗하게 보존된, 기묘한 형태의 목간(木簡) 하나가 놓여 있었다.
지혁은 조용히 다가가 목간을 바라봤다. 일반적인 목간과는 달랐다. 나무가 아닌, 마치 돌처럼 단단하면서도 맑은 옥색 빛을 띠는 재질이었다. 표면에는 알아볼 수 없는 고대의 상형문자들이 미세하게 새겨져 있었고, 손끝으로 만져보니 희미하게 온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목간에서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기운’이 느껴졌다. 살아 있는 듯한, 거대한 존재감을 가진 기운이었다.
“이게 뭐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어 목간을 만지는 순간이었다.
‘콰앙!’
정적을 깨고 섬광이 터져 나왔다. 목간에서 뿜어져 나온 옥색 빛이 석실을 가득 채웠고, 지혁의 몸을 타고 거대한 에너지가 흘러들어왔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활성화되는 듯한 강렬한 전율이 그를 덮쳤다. 그의 피부 위로 목간에 새겨진 것과 동일한 상형문자들이 옥색 빛을 내며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정신이 아득해지는 동시에, 세상의 모든 소리가 한꺼번에 그의 뇌를 때려 박는 듯했다. 멀리서 들리던 좀비들의 으르렁거림이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고, 흙냄새 사이로 스며든 희미한 혈향, 그리고 무언가 기어 다니는 소리까지. 오감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된 듯했다.
갑자기, 지혁의 머릿속에 알 수 없는 영상들이 스쳐 지나갔다. 고대의 숲, 신비로운 의식,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한 존재들이 손에서 빛을 뿜어내는 모습… 너무나 빠르고 혼란스러워 붙잡을 수 없는 이미지들이었다.
‘으윽…!’
그가 고통에 신음하며 무릎을 꿇었다. 목간은 여전히 옥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 빛은 그의 몸 안으로 계속해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려 애쓰던 그때, 지하 통로 저편에서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려왔다.
‘크르르… 으으…’
익숙하면서도 섬뜩한 소리. 좀비였다. 그것도 일반 좀비와는 다른, 뼈가 뒤틀리는 듯한 둔탁한 소리. 아마도 이 섬광에 이끌려 온 것이 분명했다.
지혁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정신은 아직 혼미했지만, 목간에서 흘러들어온 힘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알 수 없는 자신감과 함께, 주변의 모든 에너지가 그의 의식 속에 선명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흙 속의 미세한 진동, 벽돌 사이의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냉기, 심지어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 하나하나까지.
통로 입구에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보통 좀비보다 훨씬 거대하고, 피부는 마치 검은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변이 좀비였다. 놈의 몸에서는 끔찍한 악취가 풍겨왔고, 핏발 선 눈동자가 지혁을 노려봤다.
‘크아아악!’
변이 좀비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은 맹수처럼 빨랐다. 지혁은 피할 새도 없이 놈의 거대한 팔에 깔릴 위기에 처했다.
그때였다. 지혁의 손바닥에서 옥색 빛이 섬광처럼 터져 나왔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은 그에게서, 목간과 동일한 빛의 장벽이 순식간에 형성되었다. 투명하면서도 단단한, 영롱한 빛의 벽.
‘콰앙!’
변이 좀비의 거대한 주먹이 빛의 장벽에 부딪쳤다. 금속이 부딪히는 듯한 굉음과 함께 장벽이 흔들렸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좀비의 팔이 비정상적으로 뒤틀리며 뒤로 밀려났다.
지혁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불과 몇 초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힘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이걸, 내가 만들었다고?’
변이 좀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한번 괴성을 질렀다. 놈의 눈빛에 분노와 함께 미약한 혼란이 스치는 듯했다. 좀비는 다시 한번 달려들 준비를 했다.
지혁은 자신의 손바닥에서 뿜어져 나오는 옥색 빛을 내려다봤다. 심장이 격렬하게 두근거렸다. 혼란스럽고 두려웠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희열과 함께 거대한 가능성이 그의 앞에 펼쳐진 듯했다.
이 힘은 대체 무엇인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어쩌면, 이 끝없는 절망 속에서 그가 찾던 유일한 ‘희망’일지도 모른다는 섬뜩하고도 찬란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 예감만큼이나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덮치려 하고 있었다. 지하 석실은 다시 한번 변이 좀비의 포효로 가득 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