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갑고 축축한 새벽 공기가 강철 기체의 관절 틈새로 스며들었다. 발키리의 콕핏 안, 강민은 가슴께에서부터 치솟는 아릿한 통증을 억눌렀다. 그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한때 푸른 희망으로 가득했던 신도시 ‘에덴’의 잔해였다. 부서진 빌딩의 뼈대들이 앙상하게 드러나 있었고, 거대한 돔형 구조물의 절반은 찢겨나간 채 녹슨 철골들을 허공에 매달고 있었다.
“에덴이라… 역겹군.”
강민의 나직한 중얼거림이 통신망을 통해 울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메마른 분노와 체념, 그리고 지독한 복수의 갈증이 뒤섞여 있었다. 발키리의 센서가 폐허 속을 샅샅이 스캔했다. 망가진 교통 시스템의 잔해, 갈라진 아스팔트, 그리고 그 너머로 희미하게 감지되는 거대한 에너지 반응.
찾았다.
강민의 입가에 싸늘한 미소가 걸렸다. 발키리의 무장 시스템이 조용히 가동되었다. 어깨에 장착된 레일건이 충전음을 내며 푸른빛을 머금었고, 허리에 찬 고주파 블레이드가 은은한 진동을 시작했다. 그의 심장이 기체와 동기화되며 격렬하게 박동했다. 피가 끓는 듯했다.
“네가 왜… 아직 살아있는 거지?”
돌연, 통신망을 찢는 듯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는 강민의 뇌리를 깊이 파고들어, 차갑게 굳어 있던 그의 심장을 마치 뜨거운 쇠꼬챙이로 지지는 듯했다. 태호. 단 두 글자만으로도 온몸의 세포가 전율했다.
강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발키리의 자세를 낮추고, 폐허 속으로 더욱 깊숙이 파고들었다.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태호의 기체, ‘레기온’이었다. 이족 보행 병기치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덩치, 육중한 장갑, 그리고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압적인 포스. 그 기체는 에덴의 한가운데, 가장 높은 빌딩의 잔해 위에 군림하듯 서 있었다. 마치 이 모든 파괴의 주역이 자신임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그때, 네 심장을 꿰뚫었어야 했어. 너의 그 하찮은 정의감은 언제나 내 발목을 잡았지.” 태호의 목소리는 여유롭고 오만했다. 마치 과거의 모든 일이 자신에게는 즐거운 농담거리인 양.
“내 정의감 때문에… 네 발목이 잡혔다고?” 강민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은 분노와 경멸이 뒤섞인 비웃음이었다. “아니, 태호. 네 발목을 잡은 건… 너 자신의 탐욕이었어.”
발키리가 망가진 구조물 사이를 고속으로 질주했다. 잔해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뒤로 휙휙 날아갔다. 강민의 시야에 태호의 레기온이 더 크고 선명하게 들어왔다. 그 거대한 기체의 센서 아이가 붉은 섬광을 터뜨리며 강민을 주시하고 있었다.
“탐욕? 네가 감히 내게 그런 말을 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는데, 너 때문에 잃어버릴 뻔했잖아!”
태호의 목소리가 격앙됐다. 레기온의 육중한 팔이 움직였다. 콰아앙! 거대한 주먹이 지면을 내리찍자, 파괴된 도로가 지진이라도 난 듯 요동쳤다. 땅이 갈라지고, 부서진 건물의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어 올랐다. 강민은 발키리의 기동 시스템을 최대로 끌어올려 그 충격파를 아슬아슬하게 회피했다.
“내가 너에게 보여줬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하찮았나?”
발키리의 어깨 레일건이 불을 뿜었다. 찌이이잉-! 푸른 섬광이 에덴의 폐허를 가로질러 레기온의 육중한 가슴 장갑에 작렬했다. 쿠우웅!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레기온의 장갑에서 스파크가 터져 나왔지만, 심각한 손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강민은 예상했던 바였다. 레기온은 대파괴용 병기였다. 그의 발키리가 지닌 무장으로는 한 번에 치명타를 입히기 어려웠다.
“하찮다니? 네가 나에게 보여준 건… 결국 네 안의 나약함뿐이었어! 내가 그걸 딛고 올라섰을 뿐이다.”
레기온의 등에서 거대한 미사일 발사관이 솟아올랐다. 쉬이이익-! 수십 발의 대형 미사일이 불꽃 꼬리를 끌며 발키리를 향해 쇄도했다. 강민은 침착하게 기동 레버를 당겼다. 발키리가 마치 공중을 나는 학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며 미사일 세례를 피해 나갔다. 콰콰쾅! 미사일이 착탄한 자리마다 섬광과 폭음이 뒤따랐다. 지면은 더욱 깊게 파이고, 강민이 숨었던 잔해들은 먼지구름이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저 놈은 변함없어. 언제나 무식한 화력으로 밀어붙이지.’
강민은 발키리의 움직임을 더욱 정교하게 조작했다. 그의 뇌리에는 태호와 함께 훈련했던 나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서로의 약점을 완벽하게 보완해주며, 둘이 합치면 무적이 될 것이라 믿었던 순수했던 시간들.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산산조각 났다. 그가 가장 믿었던 친구의 손에 의해.
“네놈의 그 더러운 손으로… 나의 모든 것을 망쳤어.” 강민은 으르렁거렸다. 발키리의 고주파 블레이드가 최대 출력으로 진동하며, 날카로운 금속음이 폐허 속을 갈랐다.
발키리가 레기온의 거대한 팔 사이를 순식간에 파고들었다. 마치 그림자처럼. 태호는 강민의 움직임을 완벽히 읽고 있는 듯했지만, 발키리의 속도는 태호의 예상보다 한 수 위였다. 강민은 순간적인 가속으로 레기온의 어깨 뒤로 돌아갔다.
“어림없다!” 태호는 엉뚱하게도 레기온의 몸체를 크게 비틀며 등 뒤에 부착된 보조 추진기를 폭발시켰다. 콰아앙! 폭발의 충격파가 강민을 밀쳐냈다.
‘쳇, 저 녀석… 여전히 내 움직임을 예측하고 있어.’
강민은 허공에서 발키리의 자세를 바로잡으며 착지했다. 그 순간, 레기온의 거대한 다리가 회전하며 킥을 날렸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만으로도 주변의 잔해가 산산조각 날 정도의 위력이었다. 강민은 간발의 차이로 그 공격을 피하며 레기온의 무릎 관절을 향해 고주파 블레이드를 내리쳤다.
촤르르륵!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레기온의 무릎 장갑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고, 내부 전선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레기온의 거대한 몸체가 휘청거렸다.
“크윽… 이 자식이!”
태호의 분노에 찬 외침이 통신망을 통해 울렸다. 강민은 망설이지 않았다. 일격이 가해진 틈을 타, 발키리의 레일건을 다시 한 번 발사했다. 찌이이잉-! 푸른 섬광이 레기온의 손상된 무릎 관절을 정확히 강타했다. 쿠우웅! 이번에는 장갑이 완전히 찢겨나가며 내부의 유압 시스템이 노출되었다. 레기온의 다리에서 푸른 액체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발키리가 완벽한 움직임으로 뒤로 빠져나가며 거리를 벌렸다. 강민의 심장은 고요했다. 그는 일말의 동요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의 눈에 비치는 것은 오직 파괴되어가는 태호의 기체, 그리고 그 안에 갇힌 친구의 허망한 그림자뿐이었다.
“네놈이 감히… 내게 상처를 입혀?” 태호의 목소리에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경악과 함께, 순식간에 들끓는 살의가 담겨 있었다.
“넌 내가 죽은 줄 알았겠지. 내가 없는 세상에서, 너 혼자 모든 영광을 독차지할 줄 알았겠지.” 강민은 블레이드의 진동을 멈추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착각은 자유야.”
레기온의 거대한 몸체가 부상당한 다리를 끌며 휘청거렸다. 하지만 태호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얼굴에는 섬뜩할 정도의 광기가 번뜩였다.
“좋아… 그렇게까지 나오고 싶다면, 나도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
레기온의 등에서 숨겨져 있던 무장 시스템이 다시 솟아올랐다. 이번에는 훨씬 더 거대하고 위협적인 형태의 에너지 캐논이었다. 캐논의 포구에서 검붉은 에너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강민은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했다.
‘저건… 레기온의 최종 병기! 설마 저걸 이 도심 한가운데서 쓰려는 건가?’
검붉은 에너지가 점점 더 강력해지며 주변의 폐허마저 흔들었다. 발키리의 콕핏 안, 강민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모든 것을 걸어야 할 진정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그는 다시 한 번, 발키리의 추진 시스템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오직 복수의 칼날만을 휘두를 준비를 하며.
이번에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죽음을 딛고 일어선 강민의 유일한 목표였다.
그를 배신한 자의 심장을 꿰뚫는 것.
이 핏빛 낙원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