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바람이 거친 손아귀처럼 망토를 할퀴었다. 깎아지른 절벽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낡은 감시탑, 그 폐허의 그림자 속으로 이서린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달은 구름 뒤에 숨어 빛을 잃었고, 희미한 별빛만이 그녀의 발밑에 돌무더기의 윤곽을 흐릿하게 비출 뿐이었다. 밤의 장막이 너무도 깊어,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이 곳에서 길을 잃은 듯 적막했다. 이따금 고요를 찢는 매서운 바람 소리만이 그녀의 불안한 심장을 더욱 움켜쥐었다.
“늦었군, 서린.”
어둠 속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녀가 미처 그를 찾기도 전에, 존재의 기척만이 먼저 다가왔다. 이서린은 본능적으로 그 목소리가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붕괴된 감시탑의 잔해,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워진 그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아니,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림자 자체이기도 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지만, 주변의 어둠을 집어삼킨 듯 존재감이 희박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밤과 한 몸이었고, 달빛마저도 감히 침범하지 못하는 깊은 눈동자에는 설명할 수 없는 냉기와 열기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미안해, 카이론. 순찰대가 숲을 헤치고 돌아다니는 바람에….”
이서린의 목소리가 한숨처럼 흩어졌다. 그녀의 말 끝에 카이론은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다가온 그의 손길이 이서린의 뺨을 부드럽게 감쌌다. 얼음장 같으면서도 이상하게 온기가 도는 손이었다. 그녀는 그 손에 자신의 뺨을 기댔다.
“괜찮다. 기다리는 시간조차 달콤했으니.”
그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미소는 잔혹한 밤의 주인인 그가 얼마나 다른 존재인지, 그리고 이서린 앞에서 얼마나 다른 존재가 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금지된 자와의 만남은 언제나 숨 막히는 긴장감과 함께 이처럼 찰나의 평화를 선사했다. 그녀는 그의 품에 안겼고, 등 뒤에서 느껴지는 그의 차가운 온기는 오히려 그녀의 영혼을 따뜻하게 데워주었다.
“이런 만남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카이론?”
이서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중얼거렸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깊은 불안감이 서려 있었다. 인간과 그림자의 군주. 상상조차 불가능한, 세상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인연이었다.
“세상이 끝나는 그 날까지. 혹은 그 너머까지.”
카이론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이서린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그의 대답은 맹세이자 저주처럼 들렸다. 그들의 사랑은 달콤한 독이었고, 그들은 기꺼이 마시고 있었다.
그 순간이었다. 멀리서 불빛이 번쩍이는 것이 이서린의 시야에 잡혔다. 동시에 묵직한 발굽 소리가 땅을 울리며 희미하게 들려왔다. 인간의 기척이었다. 그것도 상당한 수의 무장한 기사들이 움직이는 소리였다.
“순찰대야…! 왜 여기까지 온 거지?”
이서린은 몸을 움츠리며 카이론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녀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쾅거렸다. 이 외딴 폐허에 인간의 발길이 닿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많은 병력이 움직이는 것은 분명 심상치 않은 상황을 의미했다.
카이론의 눈동자에 섬뜩한 빛이 스쳤다. 그의 인간적인 모습이 미세하게 일렁이는 듯했다. 주변의 그림자가 그의 존재를 중심으로 더욱 짙어지는 것을 이서린은 느꼈다. 뼈를 에는 듯한 한기가 온몸을 감쌌다.
“기사단인가. 놈들이 이 영역까지 침범할 줄이야.”
낮게 으르렁거리는 그의 목소리에는 살기마저 깃들어 있었다. 카이론의 오른손이 그림자처럼 변하며 허공을 휘저었다. 동시에 주변의 어둠이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리더니, 이서린과 카이론의 주변을 거대한 장막처럼 에워쌌다. 감시탑의 잔해가, 그들이 서 있던 폐허 전체가 순식간에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불빛 하나 들지 않는 절대적인 암흑이었다.
발굽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제는 말들의 거친 숨소리와 갑옷이 부딪히는 둔탁한 소리마저 들려왔다. 기사들이 감시탑 아래까지 도달한 모양이었다.
“탑 안으로 수색조를 보내! 놈들의 흔적이 여기까지 이어져 있다!”
밖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기사단의 지휘관이었다. 이서린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만약 자신들이 발각된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은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인간의 영웅들이 그림자의 군주와 얽힌 인간 여인을 본다면.
카이론의 손이 이서린의 허리를 감쌌다. 그의 심장이 규칙적으로 울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울림 속에는 분노와 함께 그녀를 보호하려는 강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가만히 있어라, 서린. 놈들은 우리를 볼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이서린의 귀에 속삭이듯 들려왔다. 절대적인 어둠 속에서 오직 카이론만이 또렷이 보였다. 그의 눈빛은 칠흑 같은 밤하늘의 심연 그 자체였고, 그 속에서 한 줄기 위험한 불꽃이 이글거렸다.
쿵, 쿵. 발소리가 감시탑 내부로 진입하는 것이 느껴졌다. 기사들이 횃불을 들고 폐허 안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이서린은 자신의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카이론의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이곳에 아무것도 없다, 대장님! 그저 낡은 돌무더기뿐입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색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빛이 미약하게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 그들이 횃불을 휘두르며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불빛은 카이론이 만들어낸 그림자 장막을 뚫지 못했다. 마치 그들이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처럼, 기사들은 카이론과 이서린의 존재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젠장, 놈들이 이 밤에 흔적을 완전히 지웠나 보군! 돌아간다!”
불만 가득한 지휘관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이내 발소리와 말발굽 소리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치 유령처럼 사라진 두 사람의 존재를 끝내 알지 못했다.
기사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발굽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자 카이론이 만들어냈던 그림자 장막이 서서히 걷혔다. 폐허는 다시 달빛과 별빛에 잠겼지만, 이서린의 심장은 여전히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카이론….”
그녀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녀는 두려웠다. 자신 때문에 그가 발각될까 봐, 그리고 언제까지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계속될지 알 수 없었기에.
카이론은 한숨을 쉬며 그녀를 품에 더욱 세게 안았다. 그의 차가운 턱이 그녀의 정수리에 닿았다.
“두려워 마라, 서린. 너를 해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내가 있는 한.”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하지만 이서린은 알고 있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가장 큰 위협이라는 것을. 그들의 사랑은 너무나 강력해서, 동시에 너무나 위태로웠다. 세상이 결코 용납하지 않을 금지된 감정. 이 밤이 끝없이 이어지기를 바랐지만, 동시에 곧 다가올 아침이 더욱 잔혹하게 느껴졌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결코 행복하게 끝날 수 없을 것이라는 잔혹한 예감을. 하지만 그녀는 그의 손을 놓을 수 없었다. 이 감정은 너무나 깊었기에.
